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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성을 뒤흔든 총성… ‘암살’ 김원봉의 길을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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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 가득한 밀양의 약산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작은 표지석만 흔적으로…
영화 ‘암살’로 그가 돌아왔다

14일 경부선 밀양역에 내렸다. 밀양시 한복판 내이동으로 향하는 동안 사방에 둘러쳐진 산이 보였다. 능선은 유려하지 않고 단단했지만 높고 험준하지 않아 도시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산 아래로 밀양강이 곡선을 그리며 흘렀다. 반짝이는 강을 보면서 도시 이름이 왜 햇볕 가득한(密陽) 고장인지 실감했다.

남천강 북쪽 큰길의 이름이 ‘약산로’다. ‘산과 같다’는 뜻의 약산(若山)을 활동명으로 사용한 이 고장 출신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길이다.

▲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오른쪽)과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 역을 맡은 조승우.

약산로 한복판 내이동우체국 오른쪽 골목길로 150m가량 걸어가면 창포와 꽃으로 단장된 생태하천가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눈에 띈다.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생가 터. 1898·3·14~1958(행불)’ ‘의열단’ ‘임시정부 군무부장’이라고 간략하게만 적혀 있었다. 약산로 다음으로 밀양에서 두번째 만난 김원봉의 흔적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그가 1948년 ‘자진 월북’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그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밀양시가 시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김원봉의 이름은 없다.

약산 김원봉은 백범 김구와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산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의열단장,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그는 남과 북이 모두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그는 남한에서 좌익으로 몰려 지명수배당한 뒤 월북했다. 이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지만 월북 10년 만인 1958년 ‘국제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히지 못한 것은 물론 무덤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원봉이? 북한에 넘어가서 그이 동생들이 다 그이(죽었다) 됐다카는 거 아잉교.” 70년 넘게 밀양에서 산 토박이 김정웅씨의 첫 마디였다. “예전에 영남에서 김원봉이 젤 어르신이라 했는데. 그 조카들이 참 똑똑하고 공부 잘했다는데 출세를 몬했지요. 아직도 생가가 있습니껴? 없을 텐디….” 내이동에서 만난 그도 김원봉 생가 위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남한에 남겨진 김원봉의 가족들은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갖 수난을 겪었다. 특히 한국전쟁 때 김원봉의 동생 4명은 보도연맹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또 다른 동생도 형제들의 억울함을 밝히려다 박정희 군사정부 때 좌익으로 몰려 10년형을 선고받았고,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복절인 15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하는 영화 <암살>로 약산이 부활했다.

약산, 그는 누구인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ㆍ은신처 5~6곳, 가명 17개… 일제에게 그는 ‘교묘한 토끼’였다

▲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이어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세상을 놀라게 한 의열단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핵심인물 한 명도 잡히지 않았다

▲ 11세 때 일장기 변소에 넣어 퇴학
18세 때 중국 건너가 무장 투쟁
해방 후 좌우합작 찬성 빌미로
빨갱이로 공격받으며
결국 북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1923년 1월12일 오후 8시.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폭탄이 터지고 서쪽 창이 산산조각났다. 누군가 폭탄을 던져놓고 달아난 것이었다. 당시 종로서는 종로2가 서울YMCA(기독청년회) 건물 바로 왼편에 있었다. 당시에도 번화가이자 정치 중심지였다. 경성YMCA와 천도교당을 중심으로 진보적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강연회·토론회 등이 잇따라 열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한 일제는 조선인들의 모임을 허용했지만 경찰을 잠입시켜 ‘불온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감시했다. 종로서 경찰관들이 주로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찰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찰은 사흘 후에야 철물점 주인 김상옥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1000명을 동원해 검거작전을 펼쳤다. 그는 3년 전 데라우치의 후임인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극비 잠입한 상태였다. 김상옥은 열흘간 경찰을 따돌리다 효제동 73번지 지인의 집에서 총격전 끝에 경찰관 6명에게 총상을 입히고 마지막 한 발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그는 ‘의열단원’이었다.

의열단은 수차례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20년 단원 박재혁과 최수봉은 각각 고서적 상인과 사과 행상으로 변장하고 부산·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김익상은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하고 1921년 조선총독부 건물에 폭탄을 던져놓고 무사히 탈출해 이듬해 상하이에서 다나카 일본군 육군대장을 저격했다. 1910년대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광복회’가 대구 친일 부호 장승원을 암살했지만, 의열단은 일본군 수뇌부와 도심 주요 기관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가 컸다.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들이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가와구치 대장(심철종)을 암살한다는 설정은 1910년대 대한광복회와 1920년대 의열단의 활동을 모티브로 했다. 도심 총격전은 ‘김상옥 의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의열단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밀양사람 김원봉’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만 알았다. 김원봉은 17개의 가명을 쓰고 5~6개의 비밀은신처가 있었다. 김원봉을 암살하기 위해 보낸 현지 밀정들은 의열단에 피살됐다. “교묘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는 영화 속 대사는 헛말이 아니었다. 일제 공안당국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남겼다. “재중 한인 독립운동자들은 거의 전부가 의열단원인 것으로 고찰되나 일면으로 보면 김원봉 1인의 의열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열단은 김원봉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죽음을 무릅쓰는 불평배의 집합단체로 동단의 진상을 아는 자는 김원봉 1인뿐이다.”

김원봉은 11세 때 일왕 생일축하연에 쓸 일장기를 변소에 집어넣어 학교에서 퇴학당하는 등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그는 군사학에 관심이 많았다. 군사력으로 나라를 되찾고 싶었다. 중국을 거쳐 독일로 유학가 군사학을 배워올 작정으로 18세 때 중국으로 건너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3·1운동이 벌어지면서 계획을 바꿨다. 1911년 중국 신해혁명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보면서, 무장투쟁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고조됐다. 신흥무관학교 등 1910년대 비밀리에 결성하던 해외 독립군 기지도 얼추 틀을 갖췄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의 해”라고 선포했다. 전쟁을 ‘지금 당장’ 할지, ‘실력을 더 키워서 싸울지’가 관건이었다.

청년 김원봉은 ‘당장 싸우는 쪽’을 택했다. 김원봉은 3·1운동이 벌어지던 해 신흥무관학교 동료를 모아 의열단을 만들었다. 창립 단원 13명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고모부 황상규를 통해 북만주 독립군 조직의 후원도 받았다. 김원봉 개인의 조직이면서도 당대 독립운동 역량이 결집된 단체였다.

의열단원들은 매일 수영·테니스·사격 훈련을 하면서도 멋내고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생활은 경건했다. 김원봉 개인은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좋아했다. 미국 여성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는 “의열단원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했던 것이다”(<아리랑>)라고 남겼다. 동료 김성숙은 김원봉을 두고 “열정에 가득 차 있는 사람, 남이 움직이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김상옥 의거에 대해 보고받은 김원봉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의열단은 당시 헝가리인 아나키스트 마자르가 개발한 고성능 폭탄을 반입해 대규모 파괴작전을 세웠는데, 김상옥 수사 과정에서 들통났기 때문이다. 관련된 조직원 다수가 검거됐다. 1922년 다나카 대장 저격 때에는 신혼여행 온 애꿎은 미국 여성이 대신 총을 맞고 사망했다. 의열단과 김원봉의 명성이 높아질 때마다 목숨을 잃는 동료는 늘어갔다. 정작 중요한 작전은 밀정의 방해로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다. 영화 말미에서 김원봉이 해방 소식을 들으며 착잡한 표정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라며 회한에 젖은 목소리로 동료들을 추념한 것도 이 때문이다.

▲ 경남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현재 주소 약산로 노상하1길 25-12) 김원봉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 표지문에는 생몰연대와 함께 ‘의열단장’ ‘임시정부 군무부장(대표적 항일운동가)’이라고만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집은 남아 있지 않고 주변은 생태하천 공원으로 꾸며졌다.

영화 속 배경인 1930년대에 김원봉은 다른 전략을 택했다. ‘당’과 ‘군’을 만들고 ‘외국’과 연계하면서 ‘정부’에 참여했다. 김원봉은 1926년 중국 국민당 사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 장제스 정부, 중국 공산당 양쪽과 다 인연을 쌓았다. 1929년에는 소련의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조직)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1932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를 개설했고, 3년 뒤에는 독립운동단체 5개를 합쳐 ‘민족혁명당’을 만들었다. 1938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 등을 중심으로 군사조직 ‘조선의용대’를 만들어 중국 국민당과 연계해 활동했다. 1939년에는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합류를 결정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군은 광복군에 편입됐다. 1940년대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을 거쳐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취임했다.

김원봉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좌우 양쪽과 모두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이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 내 급진좌파 세력은 일본군과 좀 더 빨리 싸우고 싶어 했다. 그들은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고 ‘조선의용군’을 따로 만들어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다. 이 사건은 김원봉의 리더십에 상처를 남겼다. 김구는 1930년대 내내 민족혁명당의 임시정부 합류를 거부했다. 1940년대 합작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중국 정부의 강한 압력이 있어 가능했다. 1930년대 김구와 김원봉이 임시정부 내에서 사이좋게 협력하는 영화 속 장면은 환상에 가깝다.

갈등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김원봉은 국내에서 가는 곳마다 “김원봉 장군”이라 불리며 환영받았다. 반면 남한의 주요 집권세력은 그를 ‘빨갱이’라며 의심했다. 대한광복회에 처단당한 친일 부호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이 1947년 미 군정에서 수도경찰청장(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되면서 김원봉은 일왕으로부터 7급 훈장을 받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3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미 군정의 쌀가격 통제에 반발해 일어난 ‘대구 총파업’ 사건 조사에 김원봉이 참여한 것이 빌미가 됐다.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고문당한 후 3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해 8월에는 위험인물로 간주돼 지명수배를 당했다. 1948년 북한을 방문한 김원봉은 이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경남 밀양 감천리에는 김원봉 조상의 선산이 있다. 김원봉은 중국에서 함께 활동하다 숨진 아내 박차정의 유골을 이곳에 묻었다. 밀양에 남은 김원봉의 형제 4명은 6·25전쟁기에 발생한 ‘보도연맹 학살’ 당시 처형당했다. 9남매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있는 막내여동생 김학봉씨(83·삼문동 거주)는 여고 시절 “오빠의 행적을 대라”며 경찰에 불려다녔다. 밀양시청 홈페이지에 등록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도 김원봉의 이름은 빠져 있다. 평양 혁명열사릉에 김원봉의 무덤은 없다. 김원봉은 전쟁 후 납북된 저명 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을 추진하다 1957년 김일성에게 숙청된다. 최후 모습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감옥에서 청산가리를 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언이 있다.

김원봉은 어떤 사회를 꿈꿨을까. 1920년대 초 김원봉이 부탁해 신채호가 집필한 의열단 강령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은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라는 구절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선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剝削)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민족혁명당 강령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해 국민경제의 생활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

<2015-08-14> 경향신문

☞ 기사원문: [광복 70주년]일제 경성을 뒤흔든 총성… ‘암살’ 김원봉의 길을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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