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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 ‘반역자’로 알려진 염동진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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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19] 해방정국에서 정치인 테러의 문을 연 극우파

▲ 해방 직후 대중집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몽양 여운형. 그의 죽음과 함께 남북한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은 물거품이 되었다


“탕~탕~탕!”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경, 서울시내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몽양 여운형이 탄 승용차가 트럭에 막혀 멈춘 순간, 괴한 1명이 자동차 범퍼에 뛰어올라 몽양을 향해 권총 3발을 쏘았다.

한 발은 등에서 복부로, 다른 한 발은 어깨 뒤쪽에서 심장을 관통했다. 총탄을 맞은 여운형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숨을 멈췄다. 그의 나이 62세일 때이다. 이렇게 해서 남북한의 좌우를 아울러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경찰은 3일 후 범인이 평북 영변 출신의 19세 소년 한지근이라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먼 훗날 진짜 범인 4명이 자수하고, 유명한 정치깡패 김두한이 방송에서 폭로하면서 ‘백의사'(白衣社)라는 단체가 암살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 일제 관헌이 남긴 염동진의 사진과 기록. 그의 얼굴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김두한은 1969년 12월 지금은 사라진 동아방송의 ‘노변야화(爐邊夜話)’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해방 직후의 상황을 자세하게 토로했다.


“백의사의 총사령인 염동진이 참모였던 나를 오라고 해서 갔죠. 그랬더니 암만해도 여운형을 패야 된다고 해요. 그러니 ‘김 동지가 정보와 돈과 무기만 우리한테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좋습니다. 여기서 못하면 제가 하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저보고 총을 구해달라는 거에요. ‘총이요? 제가 드린 것은 다 어떻게 했습니까?’ 하고 묻자, 그걸 가지고 38선을 넘어가 이북에서 공작을 하느라 탄환하고 총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총을 갖다 주었어요.”


김두한의 진술대로라면 백의사 조직이 여운형을 암살했고, 김두한은 총을 전달한 것이다.


이 백의사 조직은 해방 정국에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사건을 주도했고, 그 이전에 북한에서 김일성과 그 측근들을 상대로 한 테러사건을 일으켰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들 입맛에 안 맞으면 좌(左)건 우(右)건 사그리 제거한 무시무시한 테러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의 총사령 염동진이 영화 <암살>의 모델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최동훈 감독이 ‘염동진’을 모델로 친일파 ‘염석진’이란 인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중국대륙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염석진과 염동진

▲ 독립투사에서 밀정, 대한민국 경찰로 계속 변신한 염석진. (영화 스틸)

여기서 영화의 첫 무대인 1933년 항저우로 돌아가보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해의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몰살하자, 일본 군경은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수배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잽싸게 상하이를 탈출해 항저우 일대에 흩어져 은신했다.


영화의 무대인 ‘항저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서 김구는 영화에서처럼 ‘약산 김원봉’을 만난 것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 주석 장개석과 은밀한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합의를 본 것이 조선독립군 장교를 양성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분교’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다음해 2월 최고의 교수진과 최고의 학생들이 낙양분교에 모였다. 이때 모인 92명의 학생 가운데 1명이 염동진이었다. 1년간의 교육을 마친 염동진의 활동 무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장개석 직속의 ‘남의사'(藍衣社·한국으로 치면 국가정보원)에서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은 분명하다. ‘남의사’는 중국인이 즐겨입던 ‘남색 옷’을 의미하고 ‘백의사’는 한민족이 즐겨 입던 ‘흰색 옷’을 말한다. 해방 후 자기 조직을 이렇게 ‘백의사’로 이름 붙였다.


일설에는 첩보공작을 하려고 만주에 밀파되었다가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변절해 밀정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면 정확하게 영화 <암살>의 염석진의 길을 걷는 셈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기록이나 증언은 전혀 없다.


오히려 장개석의 ‘남의사’와 대립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의 첩보부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아 점차 시력을 잃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장애인이 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염동진이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大同團)’을 설립하고. 해방 후 이 단체를 반공단체인 ‘백의사’로 이름을 바꿔 격렬한 반공투쟁을 벌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에 영화 속의 염석진은 밀정에서 일본군의 앞잡이로, 신생 대한민국의 경찰로 변신하며 더러운 삶을 이어나간다.


◇ 대담무쌍한 염동진의 ‘백의사’, 무자비한 테러를 벌이다

▲ 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백의사의 가장 중요한 테러 대상이었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백의사’는 반공테러에 나섰다. 제일 먼저 인민위원회 평남도당 위원장인 현준혁을 평양 거리에서 권총으로 쏘아 암살했다. 이어 북한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김일성 처단에 나섰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장에서 ‘백의사’ 단원이 던진 수류탄이 터졌다. ‘백의사’ 대원이 던진 수류탄이 김일성을 향해 날라갔으나 그는 가까스로 피하고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오른팔이 날라가고 한쪽 눈이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이틀 뒤인 3월 3일과 5일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의 최측근 최용건의 집에서 폭탄이 터졌다. 3월 11일에는 또 다른 김일성의 측근 강양욱의 집이 습격당해 그의 아들, 딸과 식모, 경비보초 등이 살해당했다.


이들 테러가 성공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수사망이 압축되자 염동진과 ‘백의사’의 대원들은 은밀하게 남한으로 넘어왔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백의사’는 새로운 테러를 시작한다. 바로 ‘빨갱이 사냥’이다.


남로당 총수였던 박헌영 납치에 실패하자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암살에 개입했다. 김구 암살과의 관련은 미군의 보고서에는 나오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김구와의 오랜 인연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봤을 때 관련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염동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에 잡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직후의 격변기의 일이지만 정말 이런 조직은 대한민국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고은 시인은 ‘염동진’이란 시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1945년 겨울 / 서울 종로 2가에 염동진이 나타났다 / 아니 / 스며들었다 / 그가 누구인지 / 어디서 왔는지 / 누구의 동지인지 / 어디로 갈 것인지 몰랐다 / 수군거리기를 /
중국 북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한다 / 수군거리기를 /
가족 전부가 /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 극우테러 본부 백의사 우두머리 / 잠자리에서도 / 검은 안경 벗지 않는 / 장님 / 잠자리에서도 권총을 챙겼다 / 청년 유진산은 머리였고 / 청년 김두한은 주먹이었다 / 모자 벗은 머리에서 / 포마드 냄새가 진했다 / 냉혈인간 / 그의 말은 칼끝 / 그의 생각은 찰나였다 / 그의 하루하루는 / 누구를 죽이는 일 / 누구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 단독정부가 들어선 뒤 / 홀연 사라졌다 / 그러나 그의 극우 테러는 백주에 호열자로 퍼져나갔다.

☞기사원문: 영화 <암살>의 ‘반역자’로 알려진 염동진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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