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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70년](20)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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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창비의 비판·문지의 지성, 70년대 암흑기 한국 사회를 이끌다

▲ 민족주의·민중주의 추구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자유주의·시민주의 정신

김현의 ‘문학과지성’

▲ 앞서거니뒤서거니 창간돼

신군부 세력에 폐간될 때까지

권위주의·유신체제에 맞선

70년대 한국 지성사의 ‘등불’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사회를 이끌어온 주체의 하나로 ‘공론장’(public sphere)을 주목했다. 공론장이란 공적 토론이 이뤄지는 공간을 뜻한다. 공론장에서 제기되고 토론되는 담론은, 한편으로 국가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으론 시민을 계몽시킨다. 서구사회든 우리 사회든 이 공론장을 주도해온 것은 신문과 방송, 그리고 잡지였다. 정보사회가 도래하면서 인터넷 공간이 새로운 공론장의 중심을 이뤄왔지만, 1990년대 이전에는 잡지가 신문과 방송 못지않은 담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잡지는 월간과 계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사상계’, ‘신동아’, ‘말’ 등이 대표적인 월간지였다면, ‘창작과비평’(이하 창비)과 ‘문학과지성’(이하 문지) 등이 대표적인 계간지였다. 종이 매체에서 일간지, 월간지, 계간지는 인간의 삶의 리듬에 각각 대응한다. 특히 계절마다 나오는 계간지는 사회구조와 시대의 흐름을 고민하고 성찰하기에 적합한 매체다. 최근 삶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계절에 따른 대응이 낡은 방식이 돼버린 감이 있지만, 논쟁으로 광복 70년을 돌아보는 이 기획에서 계간지의 기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70년대는 창비와 문지의 시대였다.


▲ 김윤수씨(왼쪽)와 백낙청씨가 1988년 2월 ‘창작과비평’이 강제폐간된 지 8년 만에 복간되자 현판식을 갖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김현(작고), 김치수(작고), 김병익, 김주연씨(왼쪽부터)가 1970년 ‘문학과지성’ 창간호 발간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창비 대 문지의 라이벌 구도

창비와 문지의 활동을 논쟁 구도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계간지가 1970년대 담론을 이끌어온 대표적 라이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창비를 주도한 이들이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영문학), 염무웅(영남대 명예교수, 독문학), 김윤수(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였다면, 문지를 주도한 이들은 김현(전 서울대 교수, 불문학), 김병익(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 김치수(전 이화여대 교수, 불문학), 김주연(숙명여대 석좌교수, 독문학)이었다.

이들 가운데 창비와 문지의 사유를 대변해온 두 사람은 백낙청과 김현이었다.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 국문학)에 따르면, ‘추상·이론·주장·논리를 세우는 게 인간 본질에 속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백낙청과 ‘자기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사상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한 김현의 문학사적 라이벌 의식은 1970년대 지성사의 ‘한 장관’이었다(김윤식,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 2013). 1970년대와 80년대 대학을 다닌 인문·사회과학도들은 백낙청과 김현의 크고 작은 지적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창비와 문지가 가졌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는 김병익과 염무웅의 대담인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을 말한다’(<동방학지>, 2014)이다. 백영서(연세대 교수, 역사학)의 사회로 열린 이 대담에서 김병익과 염무웅은 창비와 문지의 창간, 주요 활동, 폐간을 회고한다. 두 계간지의 라이벌 의식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주목할 것은 창비와 문지가 문학지였던 동시에 종합지였다는 점이다. 두 계간지 모두 시와 소설, 평론은 물론 역사와 사회에 관한 다양한 담론 및 분석을 다뤘다.

염무웅에 따르면, 1966년 창간에서 1980년 폐간까지 창비를 지탱했던 것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였다. 민족을 앞에 세우되 그 실천적 주체를 민중으로 설정해 좌우의 극단적 편향을 모두 넘어서고자 했다. 이우성, 강만길, 임형택, 이오덕 등의 인문학 담론과 송건호, 리영희, 박현채, 한완상 등의 사회과학 분석을 대중에게 전달한 것은 창비의 중요한 기여였다. 문학 계간지를 넘어서서 좁게는 유신체제를 비판하고, 넓게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서의 담론적 구심 역할을 창비는 떠맡았다.

김병익에 따르면, 1970년 창간에서 1980년 폐간까지 문지를 관통했던 정신은 자유주의와 시민주의였다. 문지의 편집위원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시민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에 담긴 권위주의적이며 집단주의적 성향을 고려할 때 근대적 개인주의를 중시한 문지 편집위원들이 자유주의와 시민주의에 친화성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또 문지는 시민사회와의 연대보다는 지식사회와 지식인의 자율성을 상대적으로 더 강조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차이점과 더불어 관찰할 수 있는 공통분모다. 1970년대라는 당대의 관점에서 볼 때 창비와 문지는 문학의 장(場) 안에서 ‘현대문학’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문학잡지에 맞섰고, 지식의 장과 정치의 장 안에서 유신체제라는 권위주의와 대결했다. 보수적 권위주의에 대항해 창비의 민족적 민중주의와 문지의 시민적 자유주의가 한편으론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론 연대해온 셈이었다. 당시 민족적 민중주의가 진보를 대표하는 이념이었다면, 시민적 자유주의는 중도 또는 중도진보를 대변하는 이념이었다.

1980년 신군부 세력의 정기간행물 취소 조치로 창비와 문지는 폐간됐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열린 민주화시대를 맞이해 1988년 창비는 복간했고, 문지는 ‘문학과사회’로 계승됐다. 창비와 ‘문학과사회’는 최근까지 문화적·사회적 담론의 장을 제공해 왔지만, 두 계간지의 영향력이 1970년대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 일차적인 이유는 매체 환경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정보사회의 진전으로 우리 삶의 속도가 가속화하면서 현실의 빠른 변화를 계간지 형식으로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창작과비평’ 창간호 표지.



‘문학과지성’ 창간호 표지


■ ‘비판’과 ‘지성’의 의미

창비와 문지에 대한 회고는 자연스레 필자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서 1980년 5월 광주항쟁까지의 격동의 시대에 필자는 대학 1학년과 2학년을 보냈다. 대학에 입학하자 선배들은 계절이 바뀌면 창비와 문지를 꼭 읽어보라고 권했고,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을 빌려줬다. 창비, 문지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안타깝게도 이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앞서 말했듯 두 계간지는 1980년 여름호를 낸 뒤 폐간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중반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면서 도서관 서가에 놓인 창비와 문지를 찾아 여러 사람들의 글을 읽었다. 창비와 문지의 편집위원들은 물론 이 계간지에 글을 기고한 이기백, 리영희, 강만길, 한완상 등의 글들은 젊은 시절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학도가 아닌 사회과학도의 시선에서 두 계간지로부터 내가 배운 것은 ‘창작과 비평’에서의 ‘비평’과 ‘문학과 지성’에서의 ‘지성’의 의미였다. ‘비평’을 ‘비판’이란 말로 바꾸어 쓴다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대한 일관된 ‘비판’은 창비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영혼 없는 지식을 넘어서 현실에 대한 살아있는 균형감각을 가져야 하는 ‘지성’은 문지의 정신이었다.

1970년대 창비와 문지에 실린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적잖이 낡았다. 하지만 창비, 문지의 정신인 비판과 지성은 어두웠던 1970년대를 비춘 등불이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등불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이러한 비판과 지성의 광휘를 위해 청년 및 중년 시절을 불살랐던 창비와 문지의 편집위원들에게 광복 70년을 맞이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 지식인의 마지막 거점이자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비판과 지성을 위한 후배세대의 분발이 더욱 요구된다.



▲ 리영희와 ‘전환시대의 논리’

성역인 분단체제·반공주의에 정면 도전 ‘용기 있는 지식인의 상징’


리영희 한양대 교수(작고)


<전환시대의 논리> 표지.


1970년대 계간지를 통해 알려진 사회과학자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이는 언론인 리영희(1929~2010)일 것이다. 신문기자 출신인 그는 창비에 ‘베트남 전쟁’ 1·2·3을 발표해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를 규정해온 냉전분단체제와 반공주의에 도전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0년대 리영희의 대표 저작이었다. 이 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다뤘다. 중국의 재인식을 중심으로 닉슨 독트린과 미국의 대외정책,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역사와 현실에 이르기까지 생생한 분석과 예리한 통찰을 통해 냉전분단체제에 갇혀 있던 시민의식의 각성을 요구했다. 출간되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누린 <전환시대의 논리>는 정부에 의해 판매금지를 당했지만, 당시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가 제시한 몇몇 가설들은 더러 낡았고,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체적 관점에서 탈냉전적 국제질서를 모색한 것은 더없이 선구적인 통찰이었다.

리영희만큼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지식인도 드물다. 보수 세력에겐 ‘의식화의 원흉’으로 비판받았지만, 진보 세력에겐 ‘사상의 은사’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가 겪었던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 유예, 세 번의 징역’은 민주화 세력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드물고 용기 있는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2015-8-18>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20) 창작과비평 대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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