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놀랍다. 그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광복 직후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지만, ‘폭풍 성장’에 힘입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현재 경제규모가 세계 제13위 국가로 성장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953년에 비해 3만1000배 증가했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같은 기간 420배 늘었다. 1956년 25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은 무려 2만 3천배 정도로 늘어나 전 세계 수출 총액의 3.1%이며, 세계 6위 수준이란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 되었다는 그것만으로도 광복 70년은 감격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데, 이 같은 놀라운 성장과 발전은 감사할 분들을 더욱 떠오르게 한다. 이 같은 감격과 감사는 독립을 전제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떳떳이 존재할 수 있을까.
헌신한 분께 감사하고, 희생자를 위로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이 여운형이 언급한 “조선 독립은 단순한 연합국의 선물이 아니며 우리 동포가 과거 35년 동안 유혈의 투쟁을 계속하여 온 혁명으로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는 말이다. 이승만 또한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만약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라 한다면 이는 연합국의 도움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매우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하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3·1독립혁명을 일으켰다고 하면서 독립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이 성립되었음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야기하면서 어찌 이분들에게만 감사하겠는가. 조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해 희생된 수십만의 애국 군인들, 몇 번에 걸친 독재적 권력을 물리치고 자유와 인권, 민주와 평등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민주열사들, 이만한 삶을 유지하도록 애쓴 근로자와 기업인들, 해방 후 새 인재를 길러낸 교육자들 그리고 일일이 매거할 수 없는 농민, 소시민 사회구성원들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종종 성장의 열매를 누리기만 하는 우리 세대를 향해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자고 주장한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말할 수 있는 자유와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각종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이를 위해 몸을 바친 많은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감시와 고문을 당하고 혹은 감옥으로 혹은 죽음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많은 선진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들이다. 때문에 우리 세대가 그런 자유를 누리기만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임승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도 우리 공동체의 절박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다음 세대로 하여금 이 세대를 향해 빚진 자들이 되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을까. 여기에 역사의 발전 또한 기약할 수 있다.
그뿐인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역사기술에서조차 잊혀진 많은 분들이 있다. 이들이 이런저런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사라져 갔기에 그들을 제대로 추도조차 할 수 없다. 징병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고혼이 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 수십만의 한국 전쟁 민간인 희생자, 보도연맹이나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떼 죽음을 당한 수십만의 희생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고혼은 아직도 이 골짜기 저 산야를 헤매고 있다. 그 유족들 중에는 아직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데, 무고한 희생자를 낸 권력은 반성은커녕 떵떵거린다. 좌우와 남북의 대립 가운데 사상적인 갈등으로 희생된 지식인들, 그들은 자신의 이념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아직도 고독한 영혼만이 남북과 좌우를 넘나들고 있다.
이렇게 이루 매거할 수 없는 희생자들에게 광복 70년을 맞아 한모금의 위로주라도 올려야 하지 않을까. 할 수 없다면 사람사는 사회가 아니다. 까닭도 명분도 없이 사라졌던 그들이 없었던들 어떻게 오늘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이 땅의 멍에를 지고 십자가를 진 이들이요, 한줌의 거름이 되어 우리 공동체를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기념탑이라도 세워 그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광복 70주년을 맞는 산자들, 빚진 자들의 할 일이 아닐까.
공동체의 새로운 과제, 삶의 방향 전환을 의미
광복 70년은 어쩌면 생존 자체에 급급하여 앞만 향해 질주했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질주를 인륜과 대의, 남북의 공동체적 삶, 세계와 자연의 생태계와 공생이라는 관점에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삶은 성장과 번영의 그 속도만큼 큰 재앙을 맞게 되어 있다. 속도를 늦추면 성장의 과실은 그만큼 덜 먹게 될 것이지만, 새로운 지향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서 한국이 출산율이 가장 낮고 자살률이 가장 높으며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폭풍 성장’이 남겨준 후과다. 이를 묵과하고 앞을 향해 계속 속도를 내야 할 것인가.
이제 광복 70년을 보내면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면서 자연환경과의 화해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묘안이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면 인간과 공동체의 자기절제가 아닐까 한다. 절제를 기반으로 한 인간과 공동체의 화해가 아닐까. 농경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세웠던 공동체적 가치관을 새로 적용해 볼 수 없을까. 공동체적 가치관을 강조한다면 독주에 가까운 개인주의를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생산 속도를 늦추지 않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방만한 소비생활을 절약하는 삶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핵발전소를 중지해야 한다면서 전기 소비를 이 상태로 두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아야 한다면서 소비를 그대로 둔다면 이건 대안이 아니라 기만이다. 소득 불평등이 심각하다면서 ‘부익부 빈익빈’의 제도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소득 불평등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보면 광복 70년을 맞는 우리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고 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2016년과 2017년의 선거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런 과제들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2015-08-21> 다산연구소
☞칼럼원문: 광복70년, 감사를 새로운 성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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