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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년들은 왜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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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21] 일본군에 징용됐다 소련군 포로가 된 청년들


▲ 해방과 함께 남북을 쪼개버린 38도선. 사실상 국경선으로 변했다.



1949년 1월 말, 6.25전쟁을 앞두고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38도선에 소련군복을 입은 청년 50여 명이 무리지어 나타났다. 놀란 경비병들이 총을 들이대고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야?”


“소련에서 포로 생활을 끝내고 북한을 거쳐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괴청년들은 고향별로 나누어 38선을 넘어왔다. 대략 1월 말부터 2월 중순 사이에 500여 명이 남한으로 넘어왔다. 이들 월남자들은 전원 연행되어 인천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 전쟁터에 끌려간 조선청년들, 일본군에 끼여 시베리아로 끌려가다


▲ 소련 육군 53사단에 항복한 중국 푸신(Fuxin)의 일본 제57보병여단 병사들

1945년 8월 9일 소련 극동군은 170만 명의 병력을 세 개 방면으로 나눠 만주와 북조선, 남사할린으로 진격했다.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의 관동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6일이 지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 소련군에 항복한 일본군은 67만 9,776명에 달했다. 8월 23일 소련 국가방위위원회 의장 스탈린은 부하들에게 극비 지령을 보냈다.

“일본군 포로 50만 명을 소련 내 포로수용소로 보내 전후 복구를 위한 강제 노역을 시켜라.”

이렇게 해서 일본군 57만 명과 강제로 징병된 조선 청년들 1만여 명이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에 끼여 화물차에 실리거나 걸어서 시베리아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은 자신들이 조선인이라고 항변했으나 묵살당했다.

시베리아의 각처에 흩어져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포로의 약 10%가 첫해 겨울에 숨졌다. 이른바 ‘시베리아 3중주’가 가져온 재앙이다. 바로 혹한·기아·중노동을 말한다. 대부분 말단 사병이었던 조선인들의 사망률은 더 높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살아돌아온 병사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말똥이 감자로 보인 적도 있었지. 한겨울에 마차를 끄는 말이 똥을 싸면 금방 얼어버리는데, 내 눈에 그게 꼭 감자였어요. 호송병의 눈을 피해 몰래 집어 작업장에 갖고 가 녹였더니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거야.”

“막사에는 이가 들끓었어요. 잠자기 전에 누워서 천정을 보면 이가 마치 고공 낙하하는 병사처럼 달려들었지. 그래도 그나마 체력이 좋은 편인 사람만 이를 상대할 수 있었지. 우글거려도 이를 잡을 힘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소. 송장을 치울 때 보니 머리와 수염이 온통 이투성이인거야.”

이들과 대조적으로 자진해서 만주의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일제에 충성했던 이들의 인생은 달랐다.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유승렬 등 다수의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일제가 항복하자 잽싸게 빠져나와 신생 대한민국의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 대장으로 출세의 길을 달렸다.

◇ 일본군 포로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조선인은 “받아줄 나라가 없다”


▲ 교토의 마이즈루항을 통해 되돌아오는 시베리아 억류 일본인 포로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없고 그가 추구했던 신념과 정신을 우리는 되새기지 못하고 있다.


소련 정부는 포로들의 시베리아 억류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러나 1946년 3월 말 AP통신이 이 사실을 먼저 보도했다. 이어 5월 말 모스크바에서 귀국하던 사토 나오타케 소련 주재 일본대사가 시베리아철도 연변에서 수많은 일본군 포로들이 강제노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외교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길고 긴 협상 끝에 1956년 12월 26일 마지막 귀향선이 교토 마이즈루항에 1,021명을 싣고 오면서 송환이 마무리되었다. 11년간의 불법 포로 강제노동이 이어져온 것이다.

그러면 조선인 포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7년 어느 날 조선인 포로들에게 모두 짐을 싸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다들 ‘고향에 돌아가는구나’ 하고 흥분했다. 그러나 악몽같은 일이 벌어졌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일본군이 쓰던 막사로 숙소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울부짖는 광경이 벌어졌다. 항의하는 조선인들에게 수용소 당국은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인들을 돌려보내려 해도 받아줄 정부가 없다.”

다들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는 정부가 있고, 식민통치의 피해자인 조선에는 정부가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고국에 돌아왔으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산발적으로 귀환하던 조선인들이 대거 돌아온 것은 1948년 12월 말이다. 포로들은 이제 조선인들을 돌려보낼 수 있는 정부가 수립돼 귀환시킨다는 설명을 들었다. 하바롭스크에 집결한 조선청년 2200여명은 소련 화객선(貨客船) 노보시비르스크호를 타고 북한의 흥남항에 도착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불편하지 않았다. 만주 출신에 이어 북한에 연고지가 있는 청년들이 풀려났다. 문제는 남쪽 출신 귀환자들이었다. 다들 연천으로 내려가 밤길을 걸어 38도선을 넘었다.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렸다. 다들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고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환 청년들은 속속 붙잡혀 경찰서에서 나흘 정도 조사를 받은 후 인천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수용소로 옮겨졌다. 이들은 여기서 50여 일간 가마니 바닥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그리고는 드디어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들의 운명은 1년 후에 터진 한국전쟁에 휘말려 제각기 고된 삶을 이어갔다.

◇ 시베리아 포로를 쉬쉬하던 일본정부, 느닷없이 세계기록유산 신청


▲ 한소수교 이후 모임을 갖기 시작한 시베리아 포로 생존자들. 이제는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사진=삭풍회 제공)



일본정부는 최근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일본 관동군 포로들에 대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시베리아에서의 전쟁포로 억류는 일종의 금기사항이었다. 60만 명이 넘는 ‘천황의 군대’가 포로가 되어 장기간 강제노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의 수치로 간주된 것이다.

그런데 아베 정권이 들어선후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나 산업시설에 이어 포로 억류를 공론화한 것은 자신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강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문제는 관동군에 끼여 시베리아에 끌려간 조선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 문제이다.

조선인 생존자들은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해 일본정부에 정신적·육체적 피해 보상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일본은 시베리아 포로 출신 일본군에게는 위로금을 지급했지만 한국을 포함한 외국인에 대한 지급은 거절했다.


이 와중에 생존자들은 천추의 한을 품고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 이전에 자기들이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가 엄청난 고통을 준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다룬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서해문집 간)를 저술한 언론인 김효순은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 때 징병으로 끌려가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소련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까지 받은 사람들. 이들의 삶은 한국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김효순 저 (서해문집 간)


<2015-08-25> 노컷뉴스

기사원문: 조선청년들은 왜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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