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신군부 ‘80년 광주의 진실’ 감추고 왜곡
항쟁 기간 언론 일제히 침묵
사흘 지나 계엄사 발표 인용
“광주서 소요사태” 첫 보도
동아일보 “남파간첩 검거”
북한 조종설 논란 빌미 남겨
항쟁 발생 이유·희생자 수 등
근본적인 의문 여전히 남아
1980년 5월17일자 신문에는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 성과’(경향신문)와 ‘중동 진출의 새 방향’(동아일보)에 대한 사설이 실렸다. 주요 뉴스는 최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 간의 만남을 통한 시국 수습안, 경제위기에 대한 미국의 지원 가능성,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소식 등이었다. 원·달러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달러당 600원에 근접했으며, 1980년 들어 실업자가 26만명 늘었고, 1분기 실업률도 5.7%로 1년 전보다 1.7%포인트 증가했다는 소식도 눈에 띄었다. 이날 신문 기사는 다음 날부터 벌어졌던 ‘비극’을 전혀 예상할 수 없도록 했다. 5월18일은 일요일이었지만, 경향신문은 호외(號外)를 발행했다. 앞면에는 시위를 선동한 정치인들과 부패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했다는 소식이, 뒷면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고,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는 내용이 실렸다. 또 ‘북괴’의 선동과 전국적인 ‘소요사태’로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허가하지 않고, 영장 없는 체포와 언론 검열 등이 가능한 비상계엄이 내려졌다는 소식도 전했다.
▲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980년 5월18일자 호외 |
■신문으로 보는 10일간의 항쟁
그해 5월20일 주미 한국대사는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와 두 차례에 걸친 회담을 가졌고, 주한 미국대사는 박동진 외무부 장관과 요담을 가졌다. 하지만 대화 내용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가 한국과 대만에서 수입되는 컬러 TV에 대해 쿼터제를 계속 적용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이를 폐지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경제난국 타개를 위해 국제수지 방어가 중요한 과제라는 기사가 1면 하단과 2면 1단으로 실렸다.
▲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당시 시민들이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5월21일 계엄사 발표를 인용해 광주의 상황이 처음으로 보도됐다.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터무니없는 각종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가세함으로써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계엄사의 보도를 인용했다. 3일간 군인과 경찰 5명,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 시위는 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소요 주동 학생과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벌였다는 진단도 내렸다.
이날 계엄사가 밝힌 유언비어 내용도 주목된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 죽이고 있다.’ ‘18일 40명이 죽었고 금남로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군인들이 여학생들의 브래지어까지 찢어버린다.’ ‘공수부대가 몽둥이로 머리를 무차별 구타, 눈알이 빠지고 머리가 깨졌다.’ ‘데모 군중이 휴가병을 때리자 공수부대 요원이 군중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마침 이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5월22일부터 광주 상황이 신문 1면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소년체전도 연기됐다. 같은 날 판문점에서는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이 있었다. 북한 측에서 남한의 국내 상황을 언급하면서 회담은 결렬됐다. 5월24일에는 김재규의 사형집행 소식이 신문 1면을 차지한 가운데 광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뜻이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발표됐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비해 미국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한국으로 출발했고, 공중조기경보 통제기 2대가 경계태세에 들어갔다는 내용도 보도됐다. 이날 처음으로 광주의 상황이 사진으로 공개됐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는 주목되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광주 잠입기도, 시위 선동 간첩 검거’라는 기사다. 서울시 경찰청에 따르면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36번지에 사는 남파간첩 이창용이 시위 군중 속에 들어가 살인·방화 등을 조장할 목적으로 남파되었으며, 순천에 도착해 광주 잠입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자 서울로 상경했다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광주항쟁 막바지이던 5월26일 경향신문은 1면에 ‘이성과 감정’이란 칼럼을 실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알아 진실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진실을 모르거나 진실에 입각하지 못한 판단은 반드시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객관적 가치란 우리 모두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겠는가를 묻고, 그 확실한 대답을 얻는 일이다.’ 당시 언론은 진실과 객관적 가치를 보도하고 있었다는 듯이. 경제면에는 국제수지 방어를 위해 1981년까지 6억4000만달러의 대기성 차관을 인출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5월27일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하겠다”는 문공부 장관의 담화 보도와 함께 언론에서 광주 관련 기사는 거의 사라졌다. 같은 날 경향신문의 4단만화 청개구리의 주인공은 넋을 잃고 있다가 아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을 듣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31일자 신문에는 광주에서 열흘간 민간인 144명과 군경 26명이 사망했다는 계엄사 발표가 보도됐다.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1980년 5월17일부터 10일간의 신문 기사는 지난 35년간 진행된 모든 논쟁을 담고 있다. 광주민주항쟁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가? 항쟁은 왜 발생했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과잉진압과 많은 인명 살상이 발생한 직접적 원인이 된 발포 책임자는 누구였는가? 미국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척하면서 결국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위기와 관련된 기사가 같은 시기에 왜 그렇게 많이 실렸을까?
▲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홧발로 밟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이 같은 모든 논란의 시작은 광주의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려고 했던 독재정부로부터 비롯됐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광주의 진실 밝히기’에서 시작됐고, 계엄사가 발표한 유언비어는 1980년대 내내 한국 사회를 떠돌아다녔다. 물론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1988년의 5공 청문회와 이후 많은 학술연구,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 등을 통해 광주와 관련된 많은 의혹들이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성의 없는 진술도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연구와 팀 셔록 전 미국 통상신문(Journal of Commerce) 기자의 노력에 의해 ‘체로키 파일’ 공개 등으로 그 진상이 밝혀졌다. 미국은 한국에서 또 다른 이란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논란이 해명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광주에서 발포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광주민주항쟁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잡힌 남파간첩 이창용에 대해선 민주화 이후에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지 그를 신고한 의문의 두 여인이 당시로서는 거금인 502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1969년과 1997년, 2008년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됐던 ‘경제위기’라는 단어가 광주민주항쟁이 진행되던 1980년에 왜 이슈로 떠올랐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에 의해 광주민주항쟁의 진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사회적 이슈가 됐던 점을 감안한다면,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미, 신군부 손 들어주는 대가로 다국적기업·자본에 문호 개방 요구”
1983년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이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개최국이던 멕시코를 누르고 4강에 올랐다. 아쉽게 브라질에 패해 4강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4강에 오른 한국을 포함한 4개국이 세계 4대 채무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특수, 중화학공업을 통한 고도성장,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와 100억달러 수출 등을 이룩했는데도 한국은 왜 세계 4대 채무국이 됐을까.
경제위기의 징후는 1978년부터 본격화됐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성장 모델이 그 효력을 다한 것이었다. 청와대는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과학심의위원회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 자문을 했던 경제과학심의위원회와 KDI 간의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그 결과 나온 보고서가 ‘안정화 대책’이었다.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비판을 골자로 하는 경제위기 극복안은 1979년초 논의됐지만, 10·26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채택됐다. 1980년대 초 한미은행과 신한은행의 설립 허가는 그 결실 중 하나다.
최근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는 1980년 미국이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미국이 도와주는 대가로 신군부가 박정희 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해체하도록 결정했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즉, 미국 정부는 다국적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려 했다는 주장이다. 실제 광주민주항쟁 직후 미국의 다국적기업 관계자들이 대거 방한해 한국에 대한 투자를 타진했다. 당시 수입 장벽뿐만 아니라 해외자본에 대한 장벽의 완화를 주장했던 국내 경제전문가들의 안정화대책 보고서를 감안한다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일련의 사건은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 경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박태균>
<2015-09-02>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