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외 거주 원폭피해자 치료비 확대 기대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정부가 한국에 사는 원폭 피해자에게도 치료비를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확정 판결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제3부(오카베 기요코<岡部喜代子> 재판장)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이홍현 씨 등이 일본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료비를 전액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며 일본 오사카부(大阪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는 판결을 8일 확정했다.
▲ 일본 최고재판소 모습(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
▲ 재판장인 오카베 기요코 최고재판소 판사.(한국의 대법관에 해당)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
이 판결은 일본 외 국가에 사는 원폭 피해자(재외 피폭자)에게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피폭자원호법)에 따라 의료비 전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첫 확정 판결이다.
일본 정부가 이번 판결에 따라 재외 피폭자에 대한 의료비 지원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사건의 항소심 판결에 따라 일본 정부는 약 18만 엔이던 재외 피폭자 의료비 연간 한도를 2014년도부터 약 30만 엔으로 올린 바 있다.
또 현재 계류 증인 비슷한 소송에도 최고재판소 판결이 영향을 줄 전망이다.
피폭자원호법은 원폭 피해자의 의료비 가운데 환자 본인 부담분을 국가가 전액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피폭자가 일본 아닌 거주지에서 치료를 받으면 이를 원호법에 따른 의료비 지급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상한선 이내에서 의료비를 지원했다.
이씨와 다른 한국인 피해자 유족 2명은 이에 반발해 관할 지방자치단체인 오사카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2심은 ‘피폭자원호법은 일본 내에 사는 것을 의료비 지급의 요건으로 하고 있지 않다’며 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재외 피폭자는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약 4천280명이며 이 가운데 한국 거주자는 약 3천 명이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sewonlee@yna.co.kr (끝)
<2015-09-08>연합뉴스
☞기사원문: 日대법 “韓거주 원폭피해자에 치료비 전액 줘야” 첫 판결(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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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국내 원폭 피해자 ’70년 만의 승리’…’치료비 전액 지급’ 승소한 이홍현 씨
☞연합뉴스: 4년 법정투쟁 승리한 韓피폭자 “먼저 떠난 피해자에 보상해야”
☞노컷뉴스: [행간] 70년 동안 경계인으로 살아온 원폭피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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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얼현대사: 원폭피해자 운동의 산증인 곽귀훈 선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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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자운동의 산증인 곽귀훈 선생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죄로 징병1기로 끌려갔고,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까지 입은 이중 피해자이다. “묻지마라 갑자생”이란 서글픈 세대가 이제 구순을 맞이하는 세월이 흘렀지만, 살아남은 자는 여전히 아픈 역사의 상흔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징병 1기생의 수기나 자서전이 매우 드문 가운데 자신이 겪은 피해를 당당히 밝히고 맞서 투쟁해 온 한 원폭피해자의 역정이 이 회고록에 오롯이 담겨있다.
특히 곽귀훈 선생은 한국사회가 원폭피해자를 멸시와 외면의 대상으로 치부하던 1950년대 말 한국일보에 「히로시마 회상기」를 연재해 강제동원과 원폭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후 식민지배와 전후(戰後)처리 과정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힌 일본에 진정한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는 운동을 일본 시민운동가들과의 함께 꾸준히 진행해 왔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무렵이다.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비록 패소하더라도 법정에서 자신의 피해사실을 인정받고, 피해자 스스로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의 하나로 재판투쟁을 벌였다.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내팽개쳐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1972년부터 제기하기 시작한 재판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한 고발을 법정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노력들은 과거청산을 위한 투쟁의 과정이자 성찰의 과정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1998년 곽귀훈 선생 자신이 원고가 되어 제기한 ‘피폭자 지위 확인 소송’은 ‘운동’적 차원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1978년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가 승소한 결과, 한국인 피폭자도 건강수첩과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한국인 피폭자가 일본을 벗어나면 그 권리가 박탈되곤 했다. ‘통달 402호’라는 행정명령 때문에 한국인 피폭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제한받아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매번 일본에 가서 다시 건강수첩을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원폭지원법에 규정한 피폭자의 권리는 ‘국적’을 불문하고 주어지는 것인데 유독 통달 402호를 빌미로 한국인 피폭자에게 차별을 두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기한 것이 곽귀훈 소송이다.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다.’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 소송은 2001년 6월 1일 1심에서 ‘일본국이 곽귀훈의 건강수첩 유효를 인정하고 미지급한 수당 약 116만 엔과 이후에도 수당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2002년 12월 5일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도 승소하여 일본 정부가 상고를 포기한 2002년 12월 18일 원심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한국인 피폭자도 어디에 있던 피폭자로서 자격을 유지하며, 따라서 사망시까지 일본 원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재판결과 재외 피폭자 약 5,000명(한국 2,700명, 북한 1,000명 추산, 미국 약 1,000명, 브라질 200명)이 2003년 3월부터 일본의 원호법에 근거한 혜택을 받게 되었다. 국내 원폭피해자의 경우, 2010년 현재 협회 등록 회원 2,632명 가운데 2,482명이 건강수첩을 발급받았고 건강관리수당도 수령하고 있다.
또한 곽귀훈 선생은 산악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한산악연맹 창립 회원인 선생은 1950년대부터 산악운동을 전개해 등반활동을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원폭피해자가 등반대회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그의 열정적인 이력을 따라 읽다 보면 금방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한 열정이 바탕이 되었는지 곽귀훈 선생은 40여년의 원폭피해자운동을 해 오면서 본인이 발표할 원고를 직접 작성하고, 왕성한 기고활동으로 피폭자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 왔다. 그래서 구순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컴퓨터로 회고록 원고를 완성했다. 기록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해 온 곽귀훈 선생은 원폭피해자 소송의 성과와 원폭피해자 운동 관련 기록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관련 자료 전체를 수집하여 지난 2005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였다.
이 또한 피해자 개인의 노력으로서 결코 작지 않은 업적이라 할 만 하다. 일제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역사에 남기기 위해 이 회고록에 기울인 저자의 마지막 노력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장 김승은
저자소개
저자 곽귀훈 1924년 출생
저자는 전주사범학교 재학중 1944년 9월 징병1기생으로 히로시마 서부 제2부대에 강제 징집되었다.
훈련중에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피폭당했다. 귀국 후 45년 말부터 교육계에 투신, 동국대사범대부속중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했다.
1967년부터 피폭자 운동에 앞장선 그는 한국인 피폭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국내외에 널리 알려, 피폭자 권익을 확보하고 인권을 옹호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98년 10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폭자 자격 확인 소송> (곽귀훈 수첩 재판)에서 승리해 한국인 피폭자 등 재외 피폭자들에게 원호법을 적용시키는 획기적인 성과를 이끌어 냈다.
목차
책을 내며 2
추천사 6
식민지에 태어나 16
일본군 생활 24
피폭 52
전쟁은 끝났지만 70
귀국 83
교육자의 길 98
산에 오르다 119
버려진 한국인 원폭피해자 137
인도적 지원의 허와 실 154
재판투쟁을 결심하다 164
한국인 피폭자와 함께 한 일본인 186
원폭피해자협회와 나 200
부록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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