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봉군 화백 만평 삭제 논란…한겨레 “게이트키핑 차원”
<한겨레>의 인기 만평 ‘한겨레 그림판’이 내부 검열로 수정되거나 발행되지 못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해당 만평 작가는 만평의 풍자라는 본래 역할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측은 작가와의 신뢰 관계를 훼손할 압박은 없다고 반박했다.
8일 ‘한겨레 그림판’을 담당하는 장봉군 화백에 따르면, 이날 조간 신문 인쇄 직전 만평이 최종 삭제됐다. 여성 비하적 내용이 실렸다는 이유다.
“내부 검열에 압력 느껴”
해당 만평은 최근 논란이 된 <맥심코리아>의 ‘나쁜 남자’ 이미지를 패러디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려는 국정 교과서 개정 움직임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주주의’는 여성에 빗대 자동차 트렁크 안에 실려 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쁜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경제 발전 했으면 됐지”라고 기록돼 있다. 누가 봐도 전형적인 풍자다.
그러나 해당 만평은 최종판 인쇄 직전인 지난 7일 밤 10시경 ‘여성 비하물을 패러디해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내부 의견을 데스크가 받아들여 최종 삭제 결정이 내려졌다. 수정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삭제가 결정됐다.
장봉군 화백은 “1997년 <한겨레>에서 만평을 그린 이후 삭제 조처된 건 처음”이라며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데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삭제된 9월 8일자 <한겨레> ‘한겨레 그림판’. ⓒ장봉군 |
<한겨레> 내부에서 만평이 문제가 돼 내용이 수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6월 25일자 ‘한겨레 그림판’은 수정된 채 발행됐다.
해당 만평은 신경숙 표절 의혹 논란과 이재명 성남 시장을 왜곡 보도로 비판한 대형 보수 언론사를 동시에 나열했다. 문학 권력 못잖게 언론 권력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문학 권력의 핵심으로 해당 만평의 초판은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얼굴을 실었고, 언론 권력으로는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을 거론했다. 그러나 최종판은 백 교수의 얼굴이 삭제된 채 발행됐다.
장봉군 화백은 “데스크에서 ‘백 교수를 조-중-동과 동급으로 묘사하는 건 곤란하다’는 입장을 전해 급히 수정했다”며 “데스크의 지시에 압박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사실상 <한겨레>가 백낙청 교수와 창비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얼굴 뒤로 ‘삼성 군함도’를 묘사하며 삼성그룹이 관계된 사회적 문제를 나열한 5월 28일자는 핵심 문구가 변경된 채 발행됐다. 장봉군 화백은 강경한 어조였던 원판에 대해 광고국이 수정을 요청했고, 그에 따라 ‘변화를 기대하며…’라는 완화된 어조의 문구를 실었다고 주장했다.
장봉군 화백은 “내부의 압박으로 창작의 자유에 한계를 느낄 경우가 많다”며 “작가의 상상력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작가의 창작물은 (데스크가 아니라) 독자가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당 논란을 지켜본 <프레시안>의 손문상 화백은 “<한겨레>가 낡은 진보의 도그마에 갇힌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의 김용민 화백도 “한 장의 그림을 그려내기까지 작가가 얼마나 좌고우면하고 심사숙고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다”고 <한겨레>에 실망감을 표했다.
<한겨레> “강제적인 압력 없다”
이에 대해 <한겨레> 측은 “과거나 지금이나 <한겨레>는 만평 작가가 누려야 할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며 “장 화백과 높은 신뢰 관계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 <한겨레> 측은 “‘반드시 바꾸라’고 작가에게 강제하는 경우는 없다”며 “<한겨레>에 만평 내부 검열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겨레> 측은 다만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보도할 경우 게이트키핑이 필요하다”며 장 화백이 신문의 자체 게이트키핑마저 부당한 압력으로 느껴서는 곤란하다”고 전했다. 이번 만평 삭제 건에 대해 <한겨레> 측은 “수정할 시간이 부족해 ‘빼고 가는 게 좋겠다’는 데 의견이 모였을 뿐, 강제로 삭제 지시를 내린 건 아니”라고 밝혔다.
6월 28일자 만평에 백낙청 교수의 얼굴이 삭제 조처된 이유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에 신경숙 작가를 옹호하는 입장을 게시해 논란이 되기 전에는) 백 교수를 딱 집어 ‘문학 권력’으로 거론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내부 의견이 있었다. 그분을 ‘조-중-동’과 동급으로 규정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다수였다”며 “해당 의견을 장 화백에게 전했을 뿐, 삭제를 강제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광고국의 만평 간섭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광고국에서 의견을 제시할 순 있지만, ‘삼성을 비판하지 마라’는 뜻은 아닐 것”이라며 “광고국이 작가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가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
▲ ‘문학 권력’과 ‘언론 권력’을 빗대어 비판한 6월 25일자 ‘한겨레 그림판’. 초판본(위)에 들어 있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얼굴이 최종본(아래)에는 빠져 있다. ⓒ장봉군 |
이대희 기자
<2015-09-09> 프레시안
☞기사원문: “나는 창비도 삼성도 그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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