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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 철저히 머리 숙여 북조선을 장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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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23]외세에 편승해 수상에 오른 30대 청년


▲ 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고 한 달이 지난 1945년 9월 19일 오전, 소련 군함 한 척이 원산항 앞바다에 조용히 들어와 닻을 내렸다. 전날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항을 출발한 푸카조프 호였다.

이 배에서 소련 군복에 대위 계급장을 단 30대 청년을 선두로 80여 명의 조선인 군인들이 내렸다. 바로 김일성 대위가 이끄는 소련군 ’88정찰여단’ 병사들이다. 이들은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을 벌이다 관동군의 토벌에 쫒겨 연해주로 피신한 후 소련군에 입대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북한에 돌아와 정권을 장악한 과정을 언론인 김국후가 치밀하게 추적해 <평양의 소련군정>(한울 간)이란 저서에서 자세히 서술했다.


이 작업이 주목을 받은 것은 필자가 소련이 해체된 후 모스크바의 고문서 보관소에 보관돼 있는 자료를 찾고, 김일성 정권의 창출을 주도한 소련군 장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서술됐기 때문이다.


이 저서를 중심으로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추적해보자.


▲ 소련군 제88정찰여단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주보중이 부인 왕일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는 김일성을 발탁해 소련군에게 지도자로 추천했다.


소련군 산하의 제88정찰여단의 지도자 주보중은 김일성이 귀국하기 직전인 8월 24일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제88정찰여단의 창설 목적에 대해 “중국과 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해 이들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군사·정치 전문가를 양성한다”고 밝혔다.


이어 “1945년 6월에 이 과업이 완성됐다”고 보고했다. 소련이 동유럽에서처럼 위성 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사·정치 지도자를 양성했다는 뜻이다.


소련은 이와 별도로 극비리에 장래 북한의 지도자로 지목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보낸다. 바로 최고 지도자 스탈린이 김일성을 직접 만나 면접을 보겠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부관을 지낸 코바렌코는 김국후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이 입북하기 보름 전인 1945년 9월 초순, 스탈린이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크레믈린궁과 별장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모스크바에서 우리 사령부에 보낸 ‘크레믈린궁 동향’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과 4시간 대좌하면서 ‘스탈린주의’를 설파하고 여러 질문을 통해 지도자가 될 수 있는지를 탐색했다. 스탈린은 면담 직후 ‘이 사람이 좋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이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련군은 물론, 정보계통의 모든 조직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면 스탈린은 왜 다른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소련군 대위 출신인 33살의 청년 김일성의 손을 들어줬을까?


소련군정 정치사령관을 지낸 레베데프 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 중앙 스탈린 원수는 동유럽의 공산권 지도자를 선택할 때도 이론가보다 군인 출신을 선호했다. 김일성은 소련군에서 복무할 때도 소련의 명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군인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 김일성이라는 그의 이름은 북한 인민들에게 ‘항일 투쟁의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했던 점도 큰 영향을 줬다. 김일성이 비록 학식과 공산주의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정치적 소질과 신념이 강한 항일 빨치산 출신이고,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점령군이 추대했다고 하지만 김일성에게는 큰 벽이 있었다. 당시 북한 주민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조만식 선생이다.


▲ 북한 주민들의 추앙을 받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군이 북한 전역을 장악한 직후인 1945년 8월 29일 평양의 철도호텔. 이곳으로 고당 조만식이 레데베프 장군을 찾아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조만식과 레데베프의 대화



 ◆ 조만식 : 소련군대가 조선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 레베데프 : 소련군대는 조선 해방을 위해서 왔다. 영토 확장 등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 조만식 : …


 ◇ 레베데프 : 지금 평양의 정세는 어떤가?


 ◆ 조만식 : 친일파가 준동하고 있는 가운데 공장들이 가동이 중단돼 노동자들은 떠돌고 있으며,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밖에 토지제도 미비나 문맹자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 레베데프 : 그렇다면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 조만식 : 기본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택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 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종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돼야 한다.


 ◇ 레데베프 : 앞으로 서로 협력해서 그런 사업들을 해나가자.
 

그러나 소련군정 그리고 김일성의 인민위원회와 조만식 선생의 협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된 해의 마지막 시기에 발표된 신탁통치 파동을 둘러싸고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소련군정은 신탁통치를 끝내 반대한 조만식 선생을 연금해버린다.


▲ 명망 높던 조만식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소련군정이 베푼 평양요정 식사 광경. 이런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레베데프 장군은 김국후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엄지손가락을 가리키며 ‘조만식’, 새끼손가락을 가리키며 ‘김일센’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왼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오른손으로 허리 부분을 가리키며 조만식이 왼손의 위치라면 김일성은 오른손 위치라고 비유했다. 두 사람의 그릇이 그렇게 차이가 컸다는 얘기이다.

김일성도 귀국하자마자 조만식 선생을 자주 찾아와 의견도 구하고 원로 대접을 톡톡히 했다. 그당시 김일성의 모습을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던 백선엽 장군은 이렇게 회고했다.


“조만식 선생의 사무실에서 김일성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별로 뚱뚱하지 않았다. 말수가 많았고 아주 활달한 기운을 자랑했다. 그가 들어올 때 일행 몇 명인가를 데리고 왔는데, 행동거지나 말수라는 면에서 다른 이들을 압도했다. 아무래도 그가 지녔던 정치적 위상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젊은데다 활기가 넘치고 말수도 적지 않았다. 제스처가 제법 컸다. 말을 할 때마다 손짓을 크게 하는 점이 눈에 자주 띄었다. 분위기로 볼 때 조만식 선생을 자신의 진영에 포섭하기 위해 공을 들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성과 없이 돌아가면서도 풀이 죽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만식 선생을 제거한 후, 남한에서 도망쳐온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중국에서 귀국한 연안파를 수하에 거느린 김일성은 분단국가를 세울 방안에 골몰했다.


미군정이 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자 김일성은 승부수를 던진다. 바로 김구와 김규식이란 남한의 거물 정치인을 북한으로 초대한 것이다.


▲ 1948년 4월 말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선생을 안내하는 김일성


이렇게 해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회의에서 남북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에 합의했다.


1. 미소 양군 즉시 철수
2. 전 조선 정치위원회 주도로 남북총선거 실시
3. 남한 단독선거 반대
4. 외국군 철수 후 내전 발생 부인
5. 북측의 남쪽에 대한 송전 계속
6. 연백수리조합 개방
7. 조만식의 월남


중요한 회의이고 역사적인 합의였지만 너무 늦었다. 1948년 8월 15일 남쪽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소련군정과 김일성도 서둘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다.


▲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스탈린 체제를 본따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광범위하고 오랜 기간 벌어진다.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공화국의 ‘수상’에 오른 김일성에게 다음 과제가 떠오른다.


“무력으로 남한을 침공해 통일된 조선의 지도자로 군림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한민족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이 시작된다.


(계속)

<2015-09-11> 노컷뉴스

☞기사원문: “소련에 철저히 머리 숙여 북조선을 장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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