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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가면 미국은 개입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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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124] 대참사로 끝난 ’38살’ 김일성의 헛된 망상


▲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가 된 평양시내. 달의 분화구처럼 군데 군데 큰 구멍이 파여져 있다.


“도시는 현재 완벽한 폐허의 상태이다. 예전의 것들이 완전히 파괴되어 평지화되었다. 다만 재와 돌더미를 배경으로 부서진 집의 벽들만이 여기저기에 서있을 뿐이다. 몇 개의 근대식 건물들은 골격만 남아있고, 지붕과 안쪽 벽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타 건물들도 예전에 그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부서진 벽돌만 남아있을 뿐이다.”

1951년 5월 국제민주여성연맹이 미 공군의 폭격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평양을 찾았을 때 목격한 장면이다. 북한 전역의 도시가 이렇게 완전 파괴되었다.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후 2년이 넘게 북한은 연일 미 공군의 폭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 절정은 휴전협상이 포로문제에 막혀 질질 끌던 1952년 여름이었다. 미 공군은 6월 23일 압록강 수풍댐에 대해 연속적으로 폭탄을 쏟아부었다. 북한은 전력의 90%를 잃어 암흑의 세계로 들어갔다.


7월 11일에는 이미 폐허가 된 평양을 대상으로 한 사상 최대의 공습이 이루어졌다. 이날 하루에만 1,254회의 폭격이 진행돼 2만 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투하되었다. 북한의 평양방송은 사상자가 7천명에 달한다고 발생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비극이 벌어진 것인가?


◇ 기고만장한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호소하다


▲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소련 인민위원회를 방문했다. 연설문을 낭독하는 인물이 김일성이고,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명희 부수상, 그 오른쪽이 박헌영 부수상이다.


1950년 1월 17일 평양에서 북경으로 가는 중국주재 이주연 북한대사의 송별오찬회가 열렸다. 얼큰하게 취한 김일성이 북한주재 슈티코프 소련대사에게 열변을 토했다.


“조선 남부의 인민은 나를 신뢰하며 우리의 무장력에 기대하고 있다. 최근 나는 전 국토의 통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통일사업이 지연되면 나는 조선 인민의 신뢰를 잃어버린다. 나는 다시 스탈린 동지를 방문하여 남조선 인민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군의 공격에 대한 지시와 허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의논하고 싶다는 전문을 보냈다. 뛸듯이 기뻐한 김일성은 3월 30일 박헌영 부수상 겸 외무상을 데리고 특별기 편으로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소련과 북한 수뇌부는 쉽게 남침계획에 동의했다. 이들의 발언을 정리해보자


스탈린: 국제환경이 바뀌었다. 중국공산당이 승리함에 따라 중국의 에너지를 북한 지원에 돌릴 수 있게 됐다. 소련이 원자폭탄을 갖게 된 것도 큰 변수다. 그러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중국 지도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중국이 지지하지 않으면 작전은 시작할 수 없다.

김일성: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공산화될 때도 팔짱만 끼고 구경만 했는데 이 조그만 조선 땅에 들어오겠는가? 마오쩌둥은 평소에도 한반도 전역을 해방하려는 나의 희망을 지지했다. 이번 전쟁은 사흘이면 결판이 난다.

박헌영: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에 있는 20만 남로당원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김일성 일행은 이번에는 중국으로 달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승인을 받고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 공산권 지도자들의 판단은 2가지 측면에서 큰 오류를 범했다.


먼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중국의 공산화를 계기로 바뀐 것을 몰랐다. 미국은 ‘봉쇄’라는 소극적 전략에서 벗어나 ‘크레믈린의 지배와 영향력 축소를 재촉해 소비에트 내부를 파괴할 씨앗을 키운다’는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20만 남로당원’은 이미 신기루로 변했다. 당수인 박헌영이 북한으로 달아나고 새로 지도부를 형성한 김삼룡. 이주하가 1950년 3월 27일 체포되면서 남로당은 궤멸됐다. 고작 지리산 언저리에 100여 명의 빨치산만 남아 겨우 연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세월이 지나 1968년 2월 8일 인민군 창군 15주년 기념식에서 김일성은 전쟁 당시를 회고하면서 장교들에게 “박헌영은 거짓말쟁이였다. 그 당시 남한에는 20만명은 고사하고 단 1천명의 봉기자도 없었다”고 토로했다. 대구에서 가까운 낙동강까지 밀고 들어갔는데도 박헌영이 말한 봉기를 일으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38선 전 지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감행했다. 이 사진은 6.25 침공 당시 38선 철조망을 자르는 인민군 병사의 모습이다. (사진=정성길 계명대 명예박물관장 제공)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침공한 인민군은 10개 저격병사단, 1개 전차사단, 1개 오토바이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이 군대는 1,600문의 포와 박격포, 전차 258량, 군용기 172기를 동원해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소련군이 작성한 작전계획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나흘간 머물며 남쪽에서 남로당이 폭동을 일으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미국의 거대한 군사력이었다.


미국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쟁이 터지고 일주일만인 7월 1일 일본에 주둔한 제24사단 1만 6천 명이 한국으로 출발했다.


그 후의 전쟁과정은 우리가 알다피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9월 28일 서울 수복, 10월 1일 한국군을 시작으로 유엔군의 38선 돌파. 김일성 정권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 김일성 정권, 소련과 중공에 SOS를 치다


▲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시내로 진격하는 미군 탱크, 그 아래 긴급히 피신하는 서울 시민들이 보인다. 탱크가 진격하고 있는 방향 건너편에서 북한군이 총격을 가하고 있다.

서울을 뺏기고 유엔군이 38선 돌파를 준비하자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연명으로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


만일 적이 북한에 대한 공격작전을 감행하면, 우리는 자력으로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에게 특별한 지원을 부탁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적군이 38도선을 넘을 때에는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매우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떤 이유로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투쟁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중국이나 그 밖의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국제의용군 부대를 조직하는 것을 원조해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경의로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우여곡절 끝에 소련과 중공은 북한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이 참전하는 대신 소련은 전쟁물자와 공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전쟁 지휘부에서 밀려나 중공군의 뒤에서 조연 역할을 한다.


국군 1사단장으로 평양을 가장 먼저 점령한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김일성을 평가했다.


“김일성은 단순히 국군과 급히 부산에 상륙한 미군을 밀어붙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전쟁 계획은 단순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그는 개전 초기 한강까지의 종심 90km를 5일만에 뚫고, 다음 2주 동안은 140km, 다시 이후의 10일 동안 80km를 돌파해 남해안의 모든 항구를 접수한다는 구상을 세웠다고 한다. 종심이 깊어져 보급에 문제가 생기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9월 19일 낙동강 전선을 넘어 인민군의 한 진지에 들어섰더니 포로로 잡힌 기관총 사수들은 순순히 항복하고 고분고분했다. 그들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상황을 알려주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놓고 도망친 것이 김일성 부대의 진면목이었다.”


▲ 김일성이 6.25 전쟁에 참전 했던 중공군 1차 귀국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전쟁의 주도권은 김일성에서 펑더화이(彭德懷) 장군이 이끄는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김일성이 하는 일은 중공군 뒤를 쫒아다니며 빨리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라고 다그치는 일 뿐이었다.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오산까지 내려왔을 때 모두가 지쳤다. 여기서 진군은 멈췄다. 이 소식을 듣고 김일성이 전방지휘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다.


김일성: 이처럼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38도선 부근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부대를 철수시키려고 하는가?


펑더화이: 전투원들이 매우 지쳐있다. 마땅히 부대를 쉬게 하고 다음 공세를 위해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중점은 다음 봄 공세이다.


김일성: 소련의 슈티코프 대사도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고 승승장구로 남조선을 해방시키라고 말씀하셨다.


펑더화이: 슈티코프? 그가 싸워봤나요?”


▲ 1950년 11월 1일 서울 중앙청 앞의 모습이다. 주민들이 폐허더미에서 땔감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외세의 힘을 빌어 외세를 다그치는 모습이 안쓰럽다.


김일성의 바람과는 달리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수복하고 전선을 38선으로 밀어붙였다. 이때부터 2년간 지루한 휴전협상이 진행된다.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미 공군은 마지막 타깃을 찾았다. 이미 도시와 농촌, 철도, 공장지대는 폐허가 된 지 오래되었다. 최후의 목표는 바로 ‘저수지 폭격작전’이었다. 저수지가 폭파되면 방대한 양의 물이 흘러나와 인근의 도로망을 마비시킬 수 있다. 물론 벼농사 자체도 불가능해진다.


1953년 5월 13일 평양 북쪽에 있는 견룡저수지를 시작으로 북한 전역의 주요 저수지가 폭격을 받았다. 무너진 저수지의 방대한 물이 인근의 교량·철도·도로·전답·촌락을 순식간에 덮쳤다. 북한은 결국 손을 들고 휴전에 동의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20분 정전협상이 조인됐다. 밤 10시가 되자 한반도 전역에서 포성이 멈췄다.


전쟁이 끝나기가 바쁘게 김일성은 전쟁을 잘못 수행한 당 간부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 명단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이름은 쏙 빠졌다.

소련파의 대표 허가이를 시작으로 당내 숙청이 시작되었다. 박헌영 등 월북한 남로당 간부들에 이어 중국에서 무장항일투쟁을 벌인 연안파(延安派)까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당내 반대파를 싹쓸이한 김일성은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자식과 손자로 이어지는 세습체제를 구축한다.

[참고문헌] <한국전쟁> 와다 하루키 저 / 창작과비평 외

<2015-09-15> 노컷뉴스

☞기사원문: 김일성 “속전속결로 부산까지 가면 미국은 개입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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