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上]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약속이라도 한 것일까. 여권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역사를 한 가지로 가르쳐야 한다”는 ‘소신 발언’이 쏟아져 나온다. ‘좌편향’ 역사 교과서가 문제라 국정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들에게,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일침을 놓았다.
“북한 학생들은 나라님을 칭송하는 앵무새들과 같다. 그게 획일적 역사 교육의 결과다. 본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종북’이라며 때려대는데, 바로 그들이 하는 짓이 종북 아닌가.”
따끔한 지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교수는 국정 교과서를 통해 ‘자학사관’을 바로잡자는 주장 속에 든 모순들을 하나하나 파고들었다. 이승만 추종자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지만, 정작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 것은 이승만이었음을, 국정론자들이 쓰는 자학사관이라는 말이 사실은 그들이 지금 비판하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쓰던 용어임을 지적했다. 그는 묻는다. ‘정말 알고도 그러는 것이냐’고.
한국 사학사도 연구해 온 이 교수는 역사 교과서 발행 체제가 민족의 역량과도 관계 깊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검인정 교과서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했으며, 그 가운데 길러진 국민 개개인의 창의성과 자율성이 훗날 민주화의 자양분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전환하는 것은 개별 주체성을 억누르고 나아가 민족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음은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용이다.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김대중-김정일 사진은 있는데 이승만은 없으니 친북 교과서?”
프레시안 :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역사가 깊다. 차근차근 짚어보자. 역사 교과서 논쟁,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건가.
이만열 :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처음은 검인정(檢認定) 체제였다. 해방 이후 많은 혼란 속에서도 국정이 아닌 검인정을 택하면서 다양성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 이후 왜곡된 사관을 바로잡고 일관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정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다가 다시 역사 교과서 검정제 전환에 대한 고시를 내린 게 문민정부였다. 그때는 이미 1987년 6월 혁명의 여파로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다. 우리 교육에서, 교과서 발행 또한 검인정 체제로 바뀌는 것이 민주화의 방법이라고 봤다. 찬성 반대할 것 없이 그걸 하나의 추세로 받아들였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7차 교육과정에서 역사 교과서가 국정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뀌었다. 교과서 전체는 아니고 근·현대사 부분이 먼저 검정 체제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뀌게 된 배경이 있었다. 국사와 근·현대사까지 일관되게 공부한다는 게 교육 일정상 어려운 때가 많았다.. 그래서 국사와 근·현대사를 분리하고, 국사는 필수,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하되 검인정 교과서로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국사 과목에서는 근·현대사가 아예 빠지게 됨으로 근·현대사를 아예 못 배우는 학생이 생기기 때문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근·현대사를 조금 붙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독립된 근·현대사 교과목에 7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잘 팔린 교과서가 금성출판사 판이었다.(당시 채택률이 54.4%로 가장 높았다.)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그 책이 학습 단위에 맞게 잘 짜인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2004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뒷날 주일대사를 지낸 당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이 교과서 좌편향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때 제가 마침 국사편찬위원장이라 회의에 참석했다. 당시 권 의원이 흥분을 하면서 교과서가 친북 시각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관련기사 : “‘친북 교과서’ 논란, 교육위 국감 이틀째 파행”)
다음 날 마치 짠 것처럼 보수 언론에서도 근·현대사 교과서가 친북 좌편향이라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사와 사설을 쏟아냈다. 학부형들도 불만을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하고 악수하는 장면은 보이는데, 이승만의 사진은 안 보인다든지 그런 식으로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좌편향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헌법 전문을 보면,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한다는 내용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이 악수하는 그 장면만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지향을 보여주는 데 좋은 시각적 효과가 어디 있나.
그런데도 여론이 그런 식으로 가니까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심의위원회에 심의를 다시 맡겼다. 그런데 검토해 보니, 딱히 큰 문제가 없어 몇 부분만 손질하면 괜찮다고 하고 내놨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다시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 서점에 꽂혀있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합뉴스 |
“‘김일성 금기’ 깨고 업적 알린 뉴라이트 교과서”
프레시안 : ‘좌편향 교과서’에 대한 공격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본격화됐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기존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작업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교과서 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대안 교과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만열 : <대안 교과서>를 보면 재밌는 부분이 많다. 이 책이 나올 즈음 전국역사교사모임 초청을 받아 한홍구, 서중석 교수 등과 함께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 근·현대사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맡은 부분이 독립운동사였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대안 교과서>에서는 뭐라고 적었는지를 봤다. 금성출판사나 다른 검정 교과서보다 훨씬 더 비판적이고 시각이 굉장히 앞서 가 있었다.
이를테면, 일제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사실을 두고 <대안 교과서>는 “1926~1935년에 1만8000명가량의 한국인이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자였다. 일제는 공산주의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했으며, 그로 인해 민족독립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평판을 얻었다”고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상당히 공헌이 있는 것처럼 쓴 것이다. 공산주의자들한테 이런 칭찬이 어디 있나.
이승만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서술이 있다. 이승만은 뉴라이트 쪽에서 떠받드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이승만에 대해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갈등의 중심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노선으로서 외교노선이 있었다”고 썼다. 외교 노선에 대한 설명이나 중간에 있는 삽입구를 빼면 처음부터 끝까지 결론이 이승만은 가는 곳마다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였다는 식이었다. 얼마나 웃긴가.
그다음 중요한 게 김일성에 관한 부분이다. 뉴라이트나 우파 진영에서 좌편향 교과서라 부르는 금성출판사 판에서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본문 속에는 안 나온다.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으니본문과 분리된 예제 등에서 잠깐 언급이 되는 정도인데, <대안 교과서>에서는 본문 속에서 김일성을 두 번 정도 언급한다. 김일성이 승리로 이끌었다고 알려진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도 무척 자세히 쓰면서 김일성이 항일 운동에서 아주 큰 두각을 나타낸 것처럼 묘사했다. 제가 한 번 비교를 해봤다.
<대안 교과서>는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이 이끄는 소규모 유격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에 침투하여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민족의 사기를 높였으며, 김일성이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썼고,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항일 유격대는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의 지원을 받아 국내 진공 작전을 여러 차례 단행하였다.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유격대는 소부대로 나누어 지하로 들어가거나 소련령으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군사 훈련을 하였다”고 했다.
만약 금성츨판사 교과서 본문에 김일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항일 운동에 큰 공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으면, 우파 인사들이 얼마나 난리를 쳤을까.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 수구 언론들이 얼마나 물고 늘어졌을까. 그런데 누구도 <대안 교과서> 기술에 대해선 토 달지 않았다. 좌편향 교과서라느니, 친북 교과서라느니 하는 공격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승만은 임시정부 법통 계승한다는데 이승만 추종자들은 왜…”
프레시안 : 교과서 논쟁은 왜 일어나는 건가.
이만열 :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저마다 다르다.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건국절 논란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건국 67주년’이라고 해서 또 논란이 되지 않았나. 물론 상해 임시정부 가서는 대한민국의 법통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시작됐다고 한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개념이 애초에 제대로 잡힌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어쨌든 박근혜나 이명박을 떠받치는 세력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 역사를 바라본다.
건국절 논란은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을 세웠는데, 그것을 운용하는 정부는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한반도 안에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해외에 세운 게 임시정부였다. 원래 임시정부는 한성(한성정부)과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대한 국민의회) 세 곳에 있다가 나중에 통합했다. 사람들은 세 곳 중 한성정부가 전국 각 도 대표자로 조직돼 있어 더 정통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되, 위치를 상하이에 두는 형태로 임시 정부를 통합하면서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후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한 건 해방 이후인 1948년이었다. 당시 총선거에서 이긴 이승만이 제헌 국회가 개원될 때, 앞으로 만들 대한민국은 한성정부를 통한 상해 임시정부의 후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 수립 선포식 때도 현수막에 대한민국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해 9월 1일 관보 1호를 내는데, 연호가 ‘민국 30년’이었다. 1919년이 대한민국 첫해인 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1919년에 건국되었고. 1948년에 세워진 정부는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의식이 굉장히 강했던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해선 안 된다. 이승만은, 우리가 만약에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한다면, 이건 정말 창피한 짓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대한민국은 연합국이 해방시켜 주어서 그 덕분에 세워진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남의 덕분에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창피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그렇게 세워진 것이 아니고 일제의 포악한 식민 정책 아래서 그들과 싸워 나라를 세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건국이 떳떳하다고 했던 것이다. 이승만을 떠 받드는 사람들은 이같은 이승만의 역사의식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게 바로 독립운동의 전통에서 우리 역사를 보는 방식이다.
사실 3.1 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더 이전으로 따지자면 홍경래의 난 이후 일어난 각지의 농민운동과 연결된다. 민중이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 과정이었다. 1919년까지 전에 일어난 독립운동의 대부분이 왕조회복운동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거대한 물결이 바로 3.1 운동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3.1 운동 지도자들이 독립 선언 후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을 때 일제 재판관들이 이들에게 너희들이 독립을 선언했으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무슨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고 물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답했다. 바로 이게 1919년 3.1운동 후 바로 그해 4월 11일에 상해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이다.
나는 역사란 인간의 주체성이 확대돼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내 개인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1960년대 이후 국사학이 발전하면서 역사의 발전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모인 답변도 바로 이것이었다. 만약 동학 운동이 발전해 독립협회 운동이라든지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했다면 나라를 안 뺏겼을 것이다. 그러니 일본이 보기에 이 나라는 핵심 인물 몇 명만 조종하면 다 넘어오겠단 걸 알았던 거다. 그렇게 대한제국이 망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깨닫고 개개인이 주체적 역량을 기를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승만도 이런 역사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임시정부를 계승한 건데, 이승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왜 이승만의 이런 역사 인식을 따르지 않고 식민지 근대화론만 찾는 건지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좌편향이라는 공격 전에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최형락) |
“‘자학사관’ 일본 우파 용어… 김무성, 알고도 쓰는 건가”
프레시안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검인정 제도는 국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라고 했다. 김 대표를 비롯해 여당에서는 교과서 논쟁이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걸 막고 국민 통합을 위해서 역사를 한 가지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만열 : 지금까지 분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그들 아닌가. 국민들로 하여금 교과서 논쟁에 대해 진저리나도록 유도해왔다. 사람들이 ‘차라리 그럴 바에야 국정으로 하자’라고 생각하게끔 말이다.
이 사람들이 국민 통합이란 말은 분단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 해방 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검인정을 통해 다양성을 추구해왔다. 그게 바로 민주화고, 나는 그러한 민주화의 역량이 4.19혁명으로 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요새 많은 이들이 민주화와 산업화가 동시 발전했다고 하는데, 나는 꼭 ‘민주화와 산업화’라고 한다. 민주화가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얘기다. 민주화는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인정한다. 산업이 발전한 것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덕분이다. 산업화가 있고 난 뒤 민주화됐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1960년대 말까지는 북한 경제가 우리보다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나올 때가 경제 수준이 비슷한 시점이라고 한다. 분단 초기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좋았던 이유는 혁명적 열정으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1972년 전후로 일당 독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때 북한 역사 연구 책을 보면, 무슨 내용이든 앞에 김일성 동지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교시하셨다는 얘기를 쓴 다음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더라. 지금 국정 교과서를 쓰는 몇 안 되는 곳 중 또 필리핀이 있다. 필리핀도 1950년대에는 우리보다 생활 수준이 나았다. 그러나 독재 정권 몇 번을 거치고 푹 가라앉았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일 아닌가.
프레시안 : 김 대표는 현재 검인정 교과서가 이른바 ‘자학사관’에 입각해 쓰였다고 말한다.
이만열 : 자학사관이라는 말은 그리 써선 안 된다. 자학사관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극우세력에게서 나온 말이다. 김무성 대표가 그걸 알고나 쓰는 건지 모르겠다.
1990년대 일본에서는 사회당이 집권했다. 당시 무라야마 수상은 국가 안의 평등을 강조하고, 국가가 잘못이 있으면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1995년에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서 정권을 뺏긴 자민당 계통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의 앞길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그 중심에 지금의 아베 총리가 있었다. 국회에서는 아베가 중심이 되고, 국회 바깥에서는 교수 몇몇이 모였다. 그런 모임을 하면서 사회당 등의 과거사 반성을 두고 ‘자학사관’이라고 했다. 그래서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후쇼사> 교과서를 만든다.
우리 역사에서 처절했던 과거를 알리는 걸 두고 역사를 학대하는 사관이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리고 설령 비판을 하더라도 어떻게 일본의 우파가 쓴 용어를 가져다 쓸 수 있나 싶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서 아베의 역사관이나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지 않나. 참 서글픈 일이다.
“유신 시대식 획일적 교육, 창조 경제 가능할까”
프레시안 : 국정 교과서로 전환됐을 때 가장 우려되는 게 무엇인가.
이만열 :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다. 역사에 대한 비판의식이 사라지게 되는 그런 상황이 올까 봐 두렵다.
누차 강조하듯, 민주주의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국정 교과서는 자율성,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이 사라진 교육을 낳을 것이다. 북한 학생들은 나라님을 칭송하는 앵무새들과 같다. 그게 획일적 역사 교육의 결과다. 한국 극우세력들은 걸핏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종북’이라며 때려대는데, 바로 그들이 하는 짓이 종북 아닌가.
아랫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윗사람 비판하는 건 어렵다. 유신 시대 국정 교과서도 결국 정권에 대한 비판이 없었다. 오류가 나오더라도 시정이 안 됐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5.16 혁명 공약 6조를 바꿔치기했다. 원래는 ‘쿠데타가 성공하면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복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국가의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고 써놨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비판의식을 키워야 하는데, 오히려 사고를 폐쇄적으로 막아버린다면, 역사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과거 사실만을 달달 외우면서 ‘우리 수령님이 어쨌다’는 식의 북한식 공부는 역사 공부가 아니다. 결국 국정화로 하겠다는 것은 어떤 좋은 미끼를 던지더라도, 결국 유신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비판 없던 그런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율성과 창의성이 사라지면 그만큼 우리 민족의 역량도 줄어들 것이다. 대통령은 아직도 ‘창조 경제’를 말한다. 그런데 창조 경제를 하려고 해도 국민이 창의성이 없을 테니, 과연 창조 경제가 가능할까 싶다.
<2015-09-14> 프레시안
☞기사원문: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종북’ 아닌가”
[인터뷰·下] 인성 교육 법제화에서부터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시도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의 교육 정책을 지켜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일제 시대의 교육이었다. 예절 교육과 교과서 통제. 이를 통해 일제가 구현하고자 한 조선인의 인간상은 ‘순응적 식민(植民)’이었다.
이 교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해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비판했다. 학계와 학교 현장의 여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서 일제히 “국정화 반대”를 외친다. 그러나 정부는 별말이 없다. 국정 전환, 검정제 유지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정부의 모호한 태도는 논란만 가중시키는 형국이다.
정부의 진짜 속내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정부로선 논란을 반길 것”이라고 했다. 정부의 국정화 시도에는 국민을 순응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교과서 논쟁은 결국 이념 대결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분단 상황 속에서 이데올로기 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보수 진영이었다.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도 마찬가지다. 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진보 세력은 종북 프레임 속에 갇히기 쉽다. 또 현 정부로선 교과서를 둘러싼 잡음이 커진 덕에 상대적으로 다른 여러 실정이 묻히고 있으니, 일석이조 효과를 얻는 셈이다. 정치권이 학계 의견 수렴도 하지 않은 채 국정화 이슈를 들고 나온 배경엔 이런 셈법이 숨어있을 거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정부가 과연 계획대로 국정화 작업을 강행할 것인가. 교육부는 이달 말께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여부를 발표할 예정이다.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국사편찬위, MB때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국정 역사 교과서가 발행되면, 이념 편향 문제는 차치하고 단순 오류도 더러 있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 공개된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서 오류가 상당수 발견됐다.
이만열 : 보수 진영에서는 늘 시장 원리를 이야기하는데, 기본적으로 국정 체제는 시장 원리를 따르지 않는 독과점 체제다. 검인정 체제는 경쟁을 하기 때문에 최대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또 오류가 발견이 되어도 바로바로 수정하려고 한다. 국정 체제가 되면 그런 노력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다. 결과물에 대해서 검정제 하에서만큼 책임지지 않는다. 오류들이 걸러지지 않을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프레시안 :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사편찬위)도 감수를 하기 때문에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검정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비롯해 국사편찬위가 초기 위상을 잃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위원장으로서 어떻게 느끼나.
이만열 : 교학사 교과서는 명백한 오류들이 많았고, 내용도 부실했다. 집필 기준에 따르면 떨어졌어야 하는 교과서였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에 책임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의 검정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국사편찬위에서 직접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위원회를 따로 두지만 통과 여부는 국사편찬위 이름을 내걸고 밝힌다. 과거 국사편찬위에 있었던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국사편찬위는 교과서 검정에 관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사편찬위는 중립적 입장에서 국사 연구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해나가야 하는 작업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2003년 내가 위원장에 취임했을 당시 교과서에 관한 업무는 교육부 산하 기관이 담당했고, 국사편찬위는 종래 해 오던 국정교과서 업무만 맡고 있었다. 국사편찬위가 교과서 검정과 관련된 일을 부탁받은 적이 없었다. 정부가 국사편찬위 위원 인선 문제 등에서 관여하려고 했지만, 국사학계가 성장했고 그런 인선은 학회들과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를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관장이 해야 할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기관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지고 부당한 외압을 막아야만 조직이 제대로 돌아간다. 상부 기관의 압력을 막아내지 못하면 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고 공동체를 이끌어가기도 힘들다.
국사편찬위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그 몇 년 후 MB정권 때부터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크게 문제가 됐던 게 바로 ‘건국절’ 논란이다. 정부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 하면서 당시 위원장으로 하여금 건국절준비위원들 앞에서 건국절과 관련된 강연을 하도록 했다. 아마 그 무렵부터 정부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 협조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사편찬위이 그렇게 된 데 대해서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국정 교과서 집필, 교학사 집필진 말고 누가 나설까”
프레시안 : 교과서 발행 체제에 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부터 비롯된 데 대한 비판이 적잖다. 여권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한 ‘탈이념’ 내지 ‘탈정치’를 강조하지만, 정작 국정화 움직임은 정치권에서부터 시작됐다. 학계에서는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나.
이만열 : 내가 아는 한 역사학계에서는 국정화에 대한 의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지난번 교과서 검정 때 교학사 집필자 몇몇에게서 들은 것 말고는, 학계에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들은 적이 없다. 최근 서울대 교수들도 공동 성명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 ‘저희 주변의 역사학자 중에서 역사(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데 찬성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내 주변 또한 그렇다.
교과서는 학계의 보편적 이론을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고 본다. 그 시대 학문 결과로서의 ‘보편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식민지 근대화론이 과연 보편적인 이론인가. 이 이론에 동조하는 이들이 일부 있지만 학계에서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만약 식민지 근대화론이 학계의 주류 이론이고, 그래서 이를 근거로 정치인들이 지금의 교과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정화 주장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니다.
먼저 학계에서 논의가 돼야 한다. 교과서가 당시 학계의 보편적 학문 결과를 집약하여 묶는 것이어야 한다면, 정치권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먼저 자극적으로 이념으로 편 가르기하고 선동해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학사 교과서가 배척받을 때, 교학사 교과서 집필 책임자 중 한 사람은 교학사 교과서 외의 검정 통과된 교과서에 대해 ‘좌편향’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국정화하는 게 낫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학계는 물론 국민들에게서도 크게 신뢰를 받는다고 볼 수 없는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가 한 말이 마치 예언처럼 맞아 들어가는 데 대해 나는 아주 모멸감을 느낀다.
프레시안 : 국정교과서 집필에 학자들이 순순히 나설지도 의문이다.
이만열 : 정부는 공정하고 해박한 분들을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런 분들이 과연 집필에 나설지는 의문이다. 우선 학자들 대부분이 국정화 자체를 반대한다. 더군다나 집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는데, 이렇게 전국민적인 저항을 받는 상황에서 용기 있게 나설 수 있겠나. 동의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안한 얘기지만, 교학사 교과서 집필에 나섰던 분들이거나 그 아류들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를 국정화한다면 국가에서 뭔가 요구하는 게 있지 않겠는가. 국가가 굳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현 보수 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극우 세력의 입김이 자연히 국정화된 교과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극우 세력이 어떤 존재들인가,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과 독재 부패 세력 그리고 반통일 세력이다. 이들의 입김을 받으면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이 독립운동 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 및 평화통일 세력 중심에서 친일 세력, 독재 부패 세력 및 반통일 세력으로 대치된 상태에서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다시 말하면, 한국 근·현대사의 주체가 독립운동 및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친일파와 독재 정권 세력으로 바꿔치기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적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강조하는 헌법 정신이 교과서 속에 제대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점을 굉장히 우려한다.
그러지 않아도 벌써 국사편찬위에서 만들고 있는 국사 과목 기술 가이드라인에는 근·현대사와 독립운동사를 축소하려 하고 있다. 거기에다 학계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MB정권 이래 활개를 치고 있는데 이들이 교과서 서술에 또 얼마나 관여하게 될까.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서술들이 역사 교과서에 주입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교과서 논란? 朴 정권 실정들 묻어 버리려는 꼼수”
프레시안 : 교육부가 사회, 역사 과목에서 전근대사와 근·현대사의 비중이 현행 5대 5에서 6대 4로 조정되고, 학습량 전체는 30% 정도 줄어들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역사 교육에서 근·현대사 비중이 축소된다는 얘기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
이만열 : 모든 역사가 소중하겠지만, 최근 세계적인 추세를 보자면 고대사보다 근·현대사가 좀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편이다. 아무래도 현대 사회 문제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근·현대사를 줄이겠다는 것은, 근·현대사에 대한 치열할 역사의식을 약화시키면서 근·현대사를 통해 과거의 역사를 보려는 시도마저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역사 내용의 비중을 줄인 다음, 자신들이 원하는 역사를 넣어 다시 근·현대사 비중을 늘릴지도 모른다. 국정 교과서로 전환되고 그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교육 과정이 수시로 바뀐다. 예전 7차 교육 과정까지는 예고를 하고도 실제로 바뀔 때까지 시간을 오래 뒀다. 그런데 MB정권 이후로는 아예 몇 차 교육과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졌다. 교육 과정을 수시로 바꿀 수 있게 했다. 이런 작업이 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교육 과정을 손질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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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대통령부터 시작해 국정 교과서에 대한 여권의 의지가 대단한 걸로 보인다. 국정화로 최종 결론 내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학계와 현장의 반발이 거세다.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정부가 국정화를 할까? 만일 그렇다면, 정부가 이렇게 국정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만열 : 우선 국정화 전환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지금까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태도가 늘 그러했다. ‘반대하려면 해라. 우리는 간다’였다. 일단 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알아서 지치기를 기다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거라고 믿는 거다.
역사 교육, 국사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좋다고 본다. 그런데 왜 국정화를 시도해서 분란을 일으켜 왜 점수를 다 까먹으려고 하나. 분명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일부러 갈등이 증폭시키려는 것 같기도 하다. 경제도 자신이 없고 다른 공약들도 줄줄이 실천 불가능한 것이 되니, 그런 문제들을 정면 돌파하지 않고, 교과서 논란 같은 걸 만들어 각종 실정들을 함께 묻어버리려는 그런 정치공학적인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때때로 든다.
특히나 보수 진영은 이념적 편 가르기를 통해 많은 덕을 봐왔다.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런 상황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종북’ 세력이라고 몰아붙여 선거에서 이득을 본다. 이렇게 끌고 가야만 정치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국민 다수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원치 않는 걸 알면서도 국정화 반대 의견을 종북 좌파의 얘기로 치부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편 가르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교과서 통제에 인성 교육, 일제식 발상”
프레시안 :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 시도부터 인성 교육 법제화까지, 정부가 비판적·창의적 사고를 죽이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만열 : 20세기 초,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며 조선 정부를 ‘지도’할 고문을 셋을 뒀다. 외교, 제정, 그리고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다. 학부 고문이 우리나라 교육에 간섭하면서 맨 처음 한 게 교과서를 통제하고, 교육 현장에서 정의 관념과 투쟁적인 걸 가르치지 말라고 강조한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상부에 순응하는 양순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인성 교육, 예절 교육이라는 것도 투쟁하지 않고 순응적인 식민(植民)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이들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학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국자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했으면 그런 말을 썼겠나.
지금 국가가 법으로까지 만들어 인성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은 일제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국정 교과서도 그렇다. 국가가 역사 서술을 독점함으로써 비판적 사고를 위축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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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올바른 역사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만열 :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역사 교육이라면, 역사 교육은 오늘의 삶에 대한 진단으로도 통한다. 그러기에 역사 교육은 과거의 어떤 시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와 연결시키는 교육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을 인과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적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거기에 비판적인 안목을 키우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치는 사람이 확고한 가치관 위에 서서 신념과 열정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교육 지침서라 할 교과서가 좋아야 한다. 열의를 가진 교사가 ‘이 교과서 정도면 내가 아이들에게 나의 역량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겠다’ 하고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외적인 조건이 주어졌을 때에 역사 교육이 바로 된다. 이러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중앙과 지방의 정부, 학부형 교사의 역할이다. 부디 이를 명심했으면 한다.
<2015-09-1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근혜 정부, 일본 식민통치 수법까지 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