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무성 대표 부친, 식산은행 사원으로 시작
– 이후 10여개 업체 경영자이자 도의원으로 활동
– 민선 도의원 재직하면서 친일발언 많이해
– 일제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 광고 비롯
– 지속적, 자발적인 친일행위 했었다
– 민문연이 동명이인과 착각? 근거 없는 주장
– 친일행적을 애국행위로 미화한 책을
– 최근 광복절에 출간해 문제의식 느꼈다
– 삼일상회 상호 사용은 사실이지만
–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진 않아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5년 9월 18일 (금) 오후 7시 5분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 민족문제연구소는 9월 1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김용주의 새로운 친일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
◇ 정관용> 민족문제연구소가 어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이죠. 김용주 씨의 친일행적을 상세하게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그동안 논란이 많이 있었어요. 일각에서는 ‘오히려 일제의 총살 대상이 될 정도로 애국자였다’ 이런 평가가 있기도 했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왜 이 시점에서 김무성 대표 부친의 친일행적을 발표한 것인지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을 직접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박한용> 네, 안녕하세요.
◇ 정관용> 먼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니까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씨 간략한 약력을 좀 소개해 주시면요?
◆ 박한용> 정확하게 말하면 사업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육가라고 할 수 있는데 각종 학교를 설립하셨죠. 그런데 일제시대 행적만 말씀을 드리자면 1923년 식산은행, 오늘날 산업은행의 전신이 됩니다. 조선총독부 관리 은행이죠. 사원으로 시작해서 26년까지 근무하고 26년 말부터 그 이후에는 일제 패망 때까지는 전문적인 사업가이자 그다음에 도의회 의원이셨어요.
◇ 정관용> 그러니까 은행원으로 몇 년 일하다가 사업을 했고 도의회 의원까지.
◆ 박한용> 그런데 이 사업이 철도운송, 양조업, 운수업, 무역업, 수산업, 제재업 등 각종 사업체를 가진 대표였고.
◇ 정관용> 어이구, 참 여러 가지를 하셨네.
◆ 박한용> 10여 개 이상의 사업체 감사까지 했습니다.
◇ 정관용> 그 전남방직 회장으로 소개가 되던데.
◆ 박한용> 그건 해방 이후에.
◇ 정관용> 해방 이후. 해방 이후도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 박한용> 해방 이후에는 무엇보다 전남방직 대표이사죠. 책임자였고, 유수의 또 한일관계에서도 일정한 외교적 역할도 했었고요. 그다음에 서울에 있는 모 고등학교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나온 학교인데.
◇ 정관용> 어느 학교인데요?
◆ 박한용> 용문 고등학교.
◇ 정관용> 설립자이시고.
◆ 박한용> 네, 인수해서 설립하죠.
◇ 정관용> 그리고 아까 한일관계에서는 주일공사를 지내신 바 있죠?
◆ 박한용> 네, 그렇습니다. 일종의 정치인 역할도 했다고 봐야죠. 외교관이나.
◇ 정관용> 그렇죠. 기본은 사업이고 그것과 함께 교육사업 즉, 학교설립도 하셨고 그리고 정치 및 외교활동까지.
◆ 박한용> 네.
◇ 정관용> 대략 그림은 그려졌어요. 그런데 일제시대 행적이 친일적 행적이 확실합니까?
◆ 박한용> 좀 충격적일 정도로 많았어요.
◇ 정관용> 그래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대표적인 걸 좀 소개해 주시면?
◆ 박한용> 저희가 조사를 해보니까 작은 책자 한 권 분량이에요. 소책자 한 권 분량인데, 자료집을 만든다면. 일단 뭐냐 하면 1937년 중일전쟁 발발하기 직전이죠. 일제 폐막 때까지 도회, 지방도의회죠. 의원을 무려 3년 8개월 동안 했습니다. 적잖은 시기죠. 민선 의원으로 재직했었고 이때 수많은 친일발언들이나 친일 여러 가지 정책들을 제안하게 됩니다.
◇ 정관용> 발언록 같은 것들도 남아 있습니까?
◆ 박한용> 그중 하나를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왜냐하면 라디오다 보니까 자료를 직접 보여드릴 수 없으니까. 1944년도에 징병제 시행 감사하면서 적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기 위한 결의선양, 전조선공직자대회가 열립니다. 이때 아주 긴 연설을 해요. 그 한 대목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징병제 실시해서 징병제 44년부터 실시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조선인들의 각오입니다. ‘앞으로 징병을 보낼 방도’ 조선이죠. ‘부모로서 자식을 나라의 창조신에게 기뻐하며 바치는 마음가짐과 귀여운 자식이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받들어 모셔질 그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여’ 죽어서 야스쿠니신사에 모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신께 귀의하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이로 국민은 굳게 단결하여 죽어서라도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할 것이다’ 이런 발언들이 있고요. 그다음에 임전보국단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 쉽게 말하면 1940년대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이고 정신총동원 최고기구입니다. 여기에 핵심간부로서 내선일체, 국체명징, 동조동근, 조상의 뿌리가 같다 하면서 징병제 실시뿐만 아니라 국방헌납, 특히 군비행기 헌납운동을 주도합니다. 그렇게 해서 좀 놀라웠던 게 이분이 바로 경북도의회 의원 하시고 임전보국단의 간부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경북연맹 간부로 계실 때 유독 경상북도의 국방 비행기 헌납이 높아요. 특히 그중에서도 영일군이 매우 높습니다.
◇ 정관용> 이분이 영일군 출신이에요?
◆ 박한용> 네. 고향은 영일이 아니지만 그쪽으로 옮겨서 계속 활동을 했습니다.
◇ 정관용> 그러니까 도의회인데 지역구가 영일이군요?
◆ 박한용> 그렇죠.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1940년대 초에 임전보국단 시절에는 이 영일군이 비행기, 해군기까지 포함해서 육군비행기하고 해군비행기 포함해서 8대를 헌납하는 실적을 올립니다. 또 국민총력조선연맹 경북연맹의 간부로 재직할 당시에 44년도 자료를 보게 되면 영일군이 130만원을 모금해요.
◇ 정관용> 그 당시 130만원이면 지금 얼마나 되는 거예요?
◆ 박한용> 최소 130억원이고요. 그다음에 기준에 따라서는 한 250억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경북만 해도 95기를 헌납하는. 이렇게 해서 경북과 영일이 가장 돋보였다는 것. 실제로 또 문제는 본인이 기명해서 광고도 냈었어요. 일본 아사히신문 같은데다가.
◇ 정관용> 일본신문에.
◆ 박한용> 네. 물론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다 폐간된 이후이긴 합니다만.
◇ 정관용> 뭐라고 광고를 했습니까?
◆ 박한용> 크게 두 가지를 저희 연구소가 발견했어요. 첫번째는 1943년 9월 8일자에 아사히신문에 ‘징병제실시 감사결의선양운동’이라는 제목 하에 우리가 징병제를 감사하고 전쟁터에 나가자라는 광고를 하는데 보통은 단체이름만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체와 함께 본인의 개인이름도 또 따로 냈어요, 그 안에다가. 그다음에 44년 7월 9일에도 애국기 헌납 광고를 낼 때 단체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단체만 내면 되는데 그 옆에 자기 이름을 별도로 금전용주라는 창씨명을 또 냈어요. 이런 것들을 보면 한마디로 지속적이고 자발적이고 또 하나는 그 결과에 영향력까지 있는 상당히 심각한 친일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반론이 많고 논란이 그동안 이어왔어요, 몇 년 동안. 첫번째 반론이 이건 동명이인으로 진짜 친일파 김용주라는 사람이 따로 있다. 아닌가요?
◆ 박한용> 저희들 발표한 이유도 그 보도가 나온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동명이인이 있긴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그 김용주는 한자가 같지만 우리가 말하는 포항, 영일이죠, 그 당시는. 김용주 씨는 1905년생입니다. 간도특설대라고 했어요. 즉, 만주에서 조선인독립항일세력들을 이른바 토벌하러 다니던.
◇ 정관용> 토벌대.
◆ 박한용> 네, 그 일반병사 가운데 김용주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1920년생이고 만주에서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착오가 있을 수가 없죠.
◇ 정관용> 그러니까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와 있는 김용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그냥 동명이인 친일파다, 이렇게 그냥 한건가요?
◆ 박한용> 네, 떠돌던 얘기들이고, 카더라는 얘기들이 재생산되는데.
◇ 정관용> 출처가 분명치 않다?
◆ 박한용> 그러나 명백하게 친일인명사전 뒤져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김용주회고록도 나와 있고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그 김무성 대표 부친인 김용주 씨는 친일인명사전에 지금 올라와 있지는 않죠?
◆ 박한용> 네.
◇ 정관용> 그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여쭤보고요. ‘강을 건너는 산’이라고 하는 제목의 김용주 평전이 있다면서요?
◆ 박한용> 네. 회고록과 평전은 다르죠. 옛날에 본인 회고록에 나온 게 있습니다. 오래 전에. 그것을 다시 평전으로 써서 평전이라고 할 때는 뭐냐 하면 전문적으로 다시 한 번 객관적으로 쓴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 정관용> 그게 평전이죠. 보니까 이성춘, 김현진 편저 이렇게 돼 있는데요.
◆ 박한용> 그런데 저희가 보기에는 전혀 회고록의 내용이 축약되거나 약간 풀어쓴 정도이지 내용적 검토가 전혀 없습니다.
◇ 정관용> 평전이 아니라 그냥 회고록…
◆ 박한용> 그것을 조금 더 … 우아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이 두 개의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 정관용> 거기에 들어있는 내용이 20대 초반에 이미 3.1운동 계승을 위해서 삼일상회라는 상호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맞습니까?
◆ 박한용> 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삼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상호가 무척 많아요. 그렇게 많은데 삼일상회가 그러면 독립운동 했느냐? 이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아는 안백산, 안희재 선생님 있지 않습니까? 이분이 백산상회를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백산선생님이 명백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댔잖아요. 그것과 다르다는 거죠, 삼일상회는.
◇ 정관용> 어쨌든 아까 1905년생이라고 했으니까 20대 초반이면 25년, 26년 그때니까 1900. 지금 아까 박 실장께서 쭉 언급해 주신 1937년 이후에 징병운동, 비행기헌납운동 등등보다는 한 10여 년 전이네요.
◆ 박한용> 그렇죠.
◇ 정관용> 그때는 또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 박한용> 그러나 저희들이 그때 당시에 청년회활동을 하고 신간회 지역 임원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1927년까지입니다.
◇ 정관용> 27년까지.
◆ 박한용> 그 이후엔 전혀 없습니다.
◇ 정관용> 그래도 그때까지는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는 있겠네요.
◆ 박한용> 그렇죠. 그런데 그 이후에 그 민족의식보다는 사업을 하면서.
◇ 정관용> 그래요. 그다음에 그 강을 건너는 산이라는 평전에 중요한 건 이 대목인데 1945년 일본의 패색이 짙을 무렵에, 일제 말입니다. 일제가 주요 민족주의자로 인식해서 포항 지역 총살대상 1호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게 사실인가요?
◆ 박한용> 한마디로 본인 주장과 작문으로 보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 정관용> 근거는 없다?
◆ 박한용> 네. 일단 거기서 나왔던 수많은 자료들이 다 틀려요. 예를 들면 지구사령부가 있었다든지 또는 뭐냐 하면 80연대가 거기에 있었다든지 이런 것들이 사실하고 전혀 안 맞습니다. 예를 들자면 군사조직 편저도 회고록에 나온 군사주의 편저는 없고요. 그다음에 계엄령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계엄령이 내려진 적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80연대가 있었다, 관리했다는데 80연대는 1943년부터 동부 뉴기니에 있었습니다. 경산에 1945년 3월 달에 보병121사단에 옵니다. 다시 말하면 본인의 행적을 증명하는 입증자료 모든 것이 단 한 개도 사실이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도대체 가장 왕성하게 친일할 때 왜.
◇ 정관용> 총살대상에 오르느냐.
◆ 박한용> 네. 그 자체가 저는 납득이 안 간다는 거죠.
◇ 정관용> 이건 아무튼 작문으로 보인다, 이 말씀이고. 그리고 또 경영난에 처한 영흥학교를 새롭게 설립했다. 이건 맞나요?
◆ 박한용> 결과적으로는 맞는데 그게 회고록 내용하고는 또 다릅니다. 왜냐하면 회고록에 따르자면 영흥학교는 기독교 학교입니다. 1933년에 자진 폐교했는데 자진 폐교한 이유가 신사참배 거부 때문이었어요. 신사참배 강요하니까. 그래서 1933년에 김용주 자신이 인수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실제 뭐냐 하면 신사참배 때문에 폐교되는 첫 케이스는 1935년에 평양의 숭실학교 있지 않습니까? 숭의학교, 숭의여학교 이른바 3숭이라고 그래요. 숭실, 숭의, 숭의여학교 이 세 학교가 폐교되면서 그 이후에 신사참배 문제나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정책적으로 나온 게 37년이고. 일단 그래서 신사참배하고 안 맞고요, 사실이. 두번째로 동아일보, 33년도에 6월 8일자 신문을 보게 되면 33년도에 영흥학교가 어려웠는데 교회 장로들이나 신도들이 돈을 모아서 1만원, 지금의 1억원 이상이죠. 모아서 기금을 모금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얘기해요. 그리고 나서는 36년도에 이르러서 경영이 악화되었고 그러면 정확하게 얘기하면 김용주 씨가 인수한다면 1936년 이후여야 됩니다.
◇ 정관용> 조금 앞뒤가 안 맞는 대목들이네요.
◆ 박한용>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고 또 하나 우리가…
◇ 정관용> 그러나 나중에 영흥학교를 계속 운영한 건 맞습니까?
◆ 박한용> 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학교 설립은 무조건 민족운동으로 얘기하면 안 됩니다. 지금도 국회의원 가운데 학교설립자 많죠. 그럼 다 민주주의 운동 하셨습니까?
◇ 정관용> 그렇죠.
◆ 박한용> 그다음에 참고로 그 당시 풍조에서는 지역유력자들은 학교를 설립하고 빈민 구제하는 것을 한국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기본적인 상식이었고.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학교 설립할 때 정작 본인은 함양 심상소학교에다가 구스노키라는 사람의 동상을 세워요. 이 구스노키는 일곱 번 죽더라도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던 일본의 충절의 상징이고 이것 때문에 이 시기에 칠생보국이라는 구호가 학교에 나올 때입니다. 그러면 내선일체, 국체명징, 그다음에 인고단련이라는 교육이념을 철저하게 본인이 실천하는 상황에서 교육학교를 설립하고 다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 정관용> 그러네요. 이거는 일제 이후의 일입니다마는 6.25 이후 인천상륙작전 당시에 주일공사 신분으로 맥아더장군을 찾아가서 주요 문화재 보호를 요청했다. 이건 맞습니까?
◆ 박한용> 네. 그건 본인이 얘기한 것이니까 저희들이 일단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시기 행적까지만 제대로 검증을 했습니다만.
◇ 정관용> 그 이후니까.
◆ 박한용> 일단 믿는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일제시대 행적에 대한 미화입니다. 왜곡이고.
◇ 정관용> 알겠습니다.
◆ 박한용> 6.25를 얘기하는 자체가 좀 엇나가겠죠.
◇ 정관용> 지금까지 말씀을 쭉 요약하면 친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자료들은 무수히 많다.
◆ 박한용> 네.
◇ 정관용>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반론은 회고록에 기초한 평전. 거기에 있을 뿐이다.
◆ 박한용> 그것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 정관용> 그리고 또 출처도 불분명한 동명이인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이 얘기군요. 그런데 친일인명사전도 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주도해서 만드셨지 않습니까?
◆ 박한용> 네.
◇ 정관용> 왜 이분은 안 올라갔나요?
◆ 박한용> 그 당시 저희들이 자료를 좀 보강하려고 했었어요. 왜냐하면.
◇ 정관용> 원래는 알고 있었는데?
◆ 박한용> 네, 그렇죠. 저희들이 그 당시에도 미리 밝혔지만 만주지역하고 해외지역하고 지역의 지방의 친일문제파들은 좀 더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서술 가능한 온전한 형태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정관용> 서울이 주된 활동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 박한용> 네. 전국구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그 당시로서는.
◇ 정관용> 그러면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만한 자격이 없습니까?
◆ 박한용> 자격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들고도 남죠.
◇ 정관용> 남는다.
◆ 박한용> 실제로 참고로 뭐냐 하면 친일인명사전, 저희들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도 만들었어요. 거기에 경제란 분야가 있습니다.
◇ 정관용> 경제 분야.
◆ 박한용> 경제 분야의 김순흥, 김성호 쭉 여러 가지 인물들이 있어요. 그분들의 행적하고 이번에 공개된 김용주 씨의 행적을 비교해 보시면 충분히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 정관용> 이미 올라 있는 분들하고 비교해보면 훨씬 더 하다, 이건가요?
◆ 박한용> 네.
◇ 정관용> 훨씬 더하다 이건가요?
◆ 박한용> 더할 뿐만 아니라 연구소가 말하느니 찾아보시고 스스로 판단하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 정관용> 바로 어제 시점에 이런 기자회견을 하신 이유는 뭡니까?
◆ 박한용> 흔히 말해서 마약이나 또 박근혜 정부의 그런 정치싸움하고 우리는 관계가 없습니다.
◇ 정관용> 사위 마약사건 그런 것.
◆ 박한용> 네. 왜냐하면 우리가 마약사범 단속하는 기관도 아니고 핵심은 뭐냐 하면 광복절을 모독한 행위예요. 이 김무성 여당 대표께서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미화했는데 그 책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어요. 극일을 이겨낸 망국의 한이라고 나와 있어요. 부제의 내용들이.
◇ 정관용> 극일을 이겨낸.
◆ 박한용> 네. 일본을 이겨낸 망국의 한이라고 표현이 됐는데 친일로 점철된 분을 일본을 이겨낸 망국의 애국자로서 그렇게 하고 나서는 광복 70년 8월 15일자로 책을 냅니다. 그러면서 대대적인 신문광고를 하면서 애국적으로 미화를 하신 거예요.
◇ 정관용> 아, 금년에 나온 거예요?
◆ 박한용> 그렇죠. 저희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서 대대적인 역사왜곡을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계시고 여기다가 김무성 씨 당사자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서고 이승만 같은 독재자를 미화하면서 역사왜곡의 선두에 나서면서 자신의 아버지까지 역사 세탁을 하는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것이죠.
◇ 정관용> 우리 정치인 가운데 부친 내지는 할아버지의 친일행적 밝혀진 이후에 대응하는 자세가 몇 유형으로 분류되잖아요.
◆ 박한용> 네.
◇ 정관용> 본인이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도 있고 김무성 대표는 그 반대다, 이 말인가요?
◆ 박한용> 놀라운 것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연좌제를 적용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후손들이 그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대면하느냐. 특히 공인이 되었을 때 헌법을 수호하는 국회의원이. 정답이 있습니다. 아버지 대신해서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집권여당, 권력에 높이 올라갈수록 반성을 안 하고 오히려 미화한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모럴해저드, 도덕적 타락이라는 부분들, 이 현상들이 있고 그런 것이 용납되는 한국사회 자체가 정상 사회가 아닌 것이죠.
◇ 정관용> 그래요. 연좌제는 할 수 없으니 부친이 친일했으니 당신 나쁘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애국자인 것으로 둔갑시키려 하는 것은 문제제기할 수 있다.
◆ 박한용> 네, 그리고 공인이지 않습니까? 개인이 아니라. 당 대표가 국회의원이라면 또 대선 후보자라면 대한민국의 헌법가치를 본인이 어떻게 수호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역사적 평가에 대한 가치관은 검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자체는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책이에요, 사실은. 가치로서 보면.
◇ 정관용>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 박한용> 네, 고맙습니다.
◇ 정관용>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었습니다.
<2015-09-19> 노컷뉴스
☞기사원문: “김무성 대표 부친, 지속적 자발적 친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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