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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생 화대와 애국기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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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현동 기생 일동은 매달 하루의 공휴일을 반납하고 그날 영업한 화대 전부를 국방헌금으로 낼 것을 결의하고….”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9월23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막힌 기사이다. 기생들은 휴일까지 반납하고 번 한달치 화대 2350원을 헌납했다는 것이다. 2년 전인 1937년 8월21일에도 기가 찬 기사가 실린다. 황해도 기생양성소가 애국기 ‘황해호’ 헌납을 위한 연주대회를 열어 순익금 122원66전을 헌금했다는 내용이다. 예비 기생들의 연주회에 동아·조선일보 지국이 후원까지 했다고 한다.




일제가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애국기(군용기) 헌납을 중심으로 벌인 국방헌납운동의 광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코흘리개 아동들까지 동원, 학용품이나 일본된장을 판 수익금까지 헌납했다니까…. 심지어 1937년 건립된 대구 측후소 건물은 쌍엽 전투기를 형상화했을 정도다. 친일 재력가들은 ‘통 큰 기부’로 일제의 예쁨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야만기(野蠻琦)’라는 악명을 들었던 문명기(창씨명 文明琦一郞)는 1935년 애국기 두 대 값인 10만원을 쾌척했다. 1930년대 농가 및 봉급생활자의 1년 수입이 800~900원 정도였으니 120배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요즘 봉급 생활자의 연봉(약 4000만원)으로 따진다면 무려 50억원에 이르는 돈을 낸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가 기증한 비행기 두 대의 이름을 ‘문명기호’(사진)로 하고 대대적인 명명식을 열어 격려했다. 일제의 부추김에 한껏 ‘오버’한 문명기는 “이 비행기를 타고 적중에 들어가 육탄이 되어 적의 심장을 서늘하게 하고 싶다”는 소감까지 밝힌다. 훗날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연상시키는 발언이었다. 그는 애국기 100대 기부와 1군(郡)1기 운동도 모자라 군함헌납(獻艦)운동까지 펼치면서 동광(銅鑛) 3곳을 기부했다. 금광으로 떼돈을 번 최창학은 애국기 값으로 40만원을 기탁했고, 방의석·박흥식·신용욱·김연수·고원훈 등도 합류했다. 각계는 진주호·전북호·강원호·평남호·경북호 등과 애부(愛婦)조선호·불교호·감리호·라사호·잠사호 등의 이름을 얻은 애국기를 헌납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김용주씨)이 참여한 애국기 헌납운동 자료 등을 공개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아사히신문에 ‘결전은 하늘이다! 비행기를 보내자!’는 제목으로 애국기 헌납을 부추기는 광고를, 그것도 기명으로 게재했다고 한다(1944년 7월9일).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15-09-22> 경향신문

☞기사원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생 화대와 애국기 헌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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