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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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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2> 유신 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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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프레시안 : 5.16쿠데타 이후 남북 교류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통일 논의 자체를 억제했던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나타났나.


서중석 : 그런 대단한 변화가 첫 번째로 나타난 것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명한 8.15선언이다. 그해 8.15를 맞이해 박 대통령은 그전에 볼 수 없던 성명을 냈다. 여기서 박 대통령은 “북괴가 무장 공비 남파 등 모든 전쟁 도발 행위의 즉각 중지와 이른바 무력 적화 통일 및 폭력 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 기도의 포기를 내외에 명백히 선언, 행동으로 실증”할 것을 촉구하고 “이 같은 우리의 요구를 북괴가 수락, 실천함을 우리가 확실히 인정하고 유엔에 의해 확인되면 나는 인도적 견지와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게 유명한 8.15선언이다. 그야말로 데탕트라는 세계 분위기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물론 북한으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단서가 앞에 달려 있었다. 예컨대 북한을 괴뢰로 규정한 것도 북한으로서는 ‘이건 도무지 있을 수 없다’고 여기며 화만 잔뜩 나게 만들 주장이긴 했다. 그렇지만 어쨌든 휴전 협정 체결 17년 만에, 분단 정부가 들어선 지 22년 만에 나온 획기적인 선언이라고 봐도 괜찮은 것이 처음으로 정부 쪽에서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고 한 대목이다. 이때까지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 박정희 정부는 북한을 있을 수 없는 정권으로만 규정하지 않았나. 지난번에 말한 민사당 당수 서민호 사건 등에서도 잘 드러난 것처럼, 그런 북한과 접촉하자는 주장을 하면 다 잡아넣었다. 그랬는데 박 대통령 스스로 이런 주장을 했다는 건 대단한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북한이 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단서로 붙여놨다고 하더라도 그건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선언에서 어느 쪽이 국민을 더 잘살게 할 수 있는 체제인지 선의의 경쟁을 할 용의는 없느냐고 물어본 대목도 눈길을 끌었다. 멸해야 할 대상으로만 간주하던 북한을 경쟁 대상으로 언급했다는 점 때문이다. 한편 8.15선언 초안에는 서신 교환과 언론, 문화, 교역 등 비정치적 분야의 교류를 제안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나 법무부 쪽에서 공안 논리를 내세워 강하게 반발해 최종안에는 담기지 않았다고 한다. <편집자>)


8.15선언 2년 후 7.4남북공동성명 발표…한국인은 덩실덩실 춤췄다


프레시안 : 8.15선언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인가.


서중석 : 이런 놀라운 주장이 나온 배경으로 우선 국제 정세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8.15선언은 국제적 해빙 무드, 데탕트 현상에 한국도 부응한다는 면을 보여준 것이다. 그와 함께 ‘유엔이 엄청난 변화를 하고 있다. 옛날식으로 할 수 없게 됐다’, 이런 것도 작용했다. 1971년이 되면 중국이 압도적인 다수결에 의해 유엔에 들어가고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 되지 않나. 그것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이 중요한 이슈로 틀림없이 통일 방안을 들고나올 것이다. 그것에 대해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제적으로 차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1970년 9월 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김대중은 4대국의 전쟁 억제 보장을 통한 민족 안보를 주장한다. 4대국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네 강대국(미국, 소련, 중국, 일본)을 말한다. 그리고 전쟁을 포기하고, 기자와 서신 및 운동선수 등의 교류를 하면서 경제적, 정치적 접촉을 통해 통일하자는 3단계 통일론을 내세운다. 8.15선언은 이런 것들에 대한 선제적 고지 점령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건 1년 후인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북한 적십자사에 ‘남북으로 흩어진 1000만 이산가족들의 실태를 확인하고 소식을 알려주며 재회를 알선하는 가족 찾기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바로 이틀 후인 14일 북한 적십자사는 ‘좋다. 환영한다’고 하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북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남북 간에 흩어져 있는 가족, 친지들의 자유 왕래와 서신 교환을 논의하자. 판문점에서 바로 예비 회담을 하자’고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드디어 9월 20일 역사적인 판문점 회의가 열렸다. 판문점에 있는 중립국감시위원회 회의실에서 양측 대표 5명씩, 총 10명이 만나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논의했다. 휴전 협정 체결 후 남북 대표가 이렇게 공식적으로 만난 건 이게 처음이다. 물론 적십자사니까 민간인 대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 놀라운 일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이 시기 남북 교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7.4남북공동성명이다. 이 성명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이 말 그대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들었다.


서중석 : 7.4남북공동성명은 1972년에 발표되는데, 한반도 주민들로 하여금 그야말로 열렬히 환영하게 하고 뛸 듯이 기뻐하게 만들었다. 이건 워낙 중요한 것이기에 이에 관한 역사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조국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봤다면서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이 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는데, 주요 내용은 이렇다.


“1. 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 통일 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 쌍방은 남북 사이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 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 쌍방은 (…) 다방면적인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 쌍방은 (…) 남북 적십자 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 데 합의하였다.

5. 쌍방은 (…)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 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 쌍방은 (…)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남쪽에서는 김일성의 동생이자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라는 요직에 있던 김영주를 북한의 실력자로 보고 있었다. 그런 김영주와 남쪽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양쪽의 실력자들이 이와 같이 합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한국 역사상 파천황적인 일이었다. 정말 모든 게 놀라워도 보통 놀라운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해방 후 최고로 들뜬 분위기였다. 당시 나도 그렇게 느꼈다. 물론 아주 엄격하게 얘기하면, 양쪽의 실력자들끼리 합의하긴 봤지만 이게 양쪽에서 법적인 효력을 갖게끔 하는 합의를 본 것인가 하는 게 논란이 될 수는 있었다. (이 성명의 서명자 부분은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 이후락 김영주”, 이렇게 돼 있다. 정식 국호도, 서명자들의 직책도 넣지 않았고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는 문구 역시 일반적인 공식 문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문서인지 사문서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모호하게 표현한 건, 그간 북한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했던 한국 정부가 갑자기 북한의 공식 국호 및 그 직함을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성명서 문안 조정 작업에 참여한 정홍진은 이 성명을 공식 문서로 만들면 남북 관계가 급선회하고 통일 정책이 크게 바뀌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줄 우려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편집자>)


이것에 대해서는 미국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데탕트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7월 4일 당일 미국 국무부 브레이 공보관은 “우리는 남북한의 정부 대표가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금후의 접촉을 위한 합의에 도달한 것을 환영한다. 남북한의 지도자들에 의한 이니셔티브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더할 수 없는 격려이고 유익한 자극이 될 것이다”, 이렇게 환영·격려했다.


어쨌건 이렇게 한국인들이 뛸 듯이 기뻐하며 열렬히 환영하고 해방 후 가장 들뜬 분위기였다. 그런데 과연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야당 수뇌부, 이 사람들이 이것을 좋아했겠는가. 난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이 서울을 답방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7.4남북공동성명을 한국인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사진은 1972년 12월 1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공동 위원장 대리 자격으로 청와대를 찾은 박성철(왼쪽)과 박정희 대통령이 악수하는 모습.ⓒ연합뉴스



10.17쿠데타와 연결돼 있었던 7.4남북공동성명


프레시안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그때 이미 야당 쪽에서는 ‘이건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면서 ‘우선 이후락이 무슨 자격으로 갔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건 옳은 지적이기도 하다. 중앙정보부장이 갔으니까 문제가 충분히 될 만했다. 그런 것과 동시에 상당한 의아심, ‘이런 식으로 해서 되겠는가’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난 일부 야당 측 인사가 쓴 글 등에서 봤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0.17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혁신계 중 일부 인사가 그걸 지지했다는 것이다. 당시 혁신계에 속했던 인사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난 7.4남북공동성명에서 비롯된 대단한 분위기 때문에 일부 혁신계가 10.17 특별 선언을 지지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다. 혁신계에는 ‘통일 아니면 죽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았나. 절대적인 통일주의자들이 혁신계엔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작용했다고 본다.


사실 그해 5월 2일 이후락을 평양으로 보낼 때 박정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긍정적인 걸 얻어오기를 바라고, 이후락이 그걸 얻어오니까 바로 궁정동 밀실에서 유신 쿠데타를 위한 특별 작업에 돌입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면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임을 난 박정희, 이후락 이분들은 충분히 예상했다고 생각한다.


이건 국토통일원의 여론 조사 결과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1969년 3월 1일 국토통일원이 개원했는데, 이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통일 문제를 다루는 국가 기구였다. 그러면서 여론 조사를 했다. 그런데 이 여론 조사 결과에 박정희 정부는 물론이고 야당 의원 상당수를 포함한 반공주의자들이 볼 때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 많았다.


예컨대 ‘통일이 꼭 이뤄져야 한다’, 그러니까 그냥 이뤄져야 한다가 아니라 ‘꼭 이뤄져야 한다’는 응답이 90.6퍼센트나 나왔다. 통일을 꼭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라는 응답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통일 성취 시기에 대해 ’10년 이내’라는 응답이 39.5퍼센트나 나왔다는 것이다. ’10년 내에는 불가능하다’는 19.5퍼센트였고, 나머지는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39.5퍼센트나 되는 이 사람들은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혁신계와 비슷한 사람들인 셈이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그게 ’10년 이내’라는 응답으로 나온 것 아니겠나.


그리고 ‘전쟁 없이 통일이 가능할까’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 게 21.7퍼센트나 된다. ‘불가능하다’는 응답이 37.9퍼센트로 ‘그렇다’보다 높긴 했지만, 어쨌건 반공주의자들이나 박 대통령으로선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울러 남북한 간 서신 교환에 찬성하는 의견이 24.8퍼센트 나왔다. 물론 ‘통일이 될 때까지 불가’는 38.1퍼센트로 그보다 높게 나오긴 했다. 그렇지만 이런 여론 조사의 경우 응답자들이 이런저런 걸 계산하면서 답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이것과 다르다고 봐야 한다.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유엔 감시 아래 남북 총선’, 이게 정부가 계속 주장한 것인데 31.9퍼센트가 이렇게 응답했다. 반공 통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흡수 통일에 해당하는 ‘북한 지역에서만 선거해야 한다’, 이건 1.4퍼센트밖에 안 나왔다. 그런데 ‘중립국 감시 아래 총선’, 이게 8.3퍼센트나 나왔다. 박정희 정권이 5.16쿠데타 후 이걸로 많은 사람을 잡아넣었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다. 다시 말해 이 주장이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보다 더 강한 주장인 ‘남북 협상’도 9.5퍼센트나 나왔다.


조사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정부는 반공 교육을 전면 개편해 반공 의식을 고취하겠다고 발표했다. 어쨌건 이런 여론 조사 결과는 이 당시 분위기를 말해준다. 그러니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리라는 걸 박 대통령이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잘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프레시안 : 7.4남북공동성명 이전 남북 관계를 돌아보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 3원칙에 북한과 합의한다는 건 당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서중석 : 문제는 7.4남북공동성명이 휴전 협정 체결 이후 남쪽 분위기를 보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합의를 할 수 있느냐, 이것이었다. 3원칙 중 두 번째(평화적 방법으로 통일 실현)는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첫 번째(통일은 자주적으로 해결)와 세 번째(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적 대단결)의 경우 남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전에는 다 잡혀갔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간주됐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합의까지 하게 됐느냐 하는 걸 여러 연구자가 논의했지만, 이런저런 현실적 문제도 있고 해서 결론이 애매한 경우가 많더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두 달 후인 그해 9월 김일성은 <마이니치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남조선 당국자들은 (…) 적십자 예비 회담과 별도로 남북 고위급 비밀 회담을 열자고 요청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제시한 조국 통일의 대원칙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이건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3원칙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북쪽이 주장해왔던 것과 부분적으로는 일치하는 게 있고 남쪽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담고 있는 면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뭔가 이면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당시 이성적인 분위기였다면 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10.17쿠데타를 맞이했다.


사실 10.17쿠데타를 맞이하고 상당 기간이 지나도록 ‘7.4가 10.17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도 특이한 점인데, 그 두 가지가 연결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한참 후에야 하게 된 것 같다. 우리에겐 이런 게 많다. 예컨대 1945∼1947년의 자료들을 보면, 분단이 된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일반 국민 사이에서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좌우 합작 운동 또는 단정 운동을 하는 쪽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보통의 한국인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미 1945년부터 분단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아니었나. 이것도 비슷할 텐데, 하여튼 7.4남북공동성명에 워낙 고무돼서 통일 세력이 반박도 못했고 그러면서 혁신계 일부에서는 10.17쿠데타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우려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1970년 박 대통령의 8.15선언,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새로운 남북 관계를 열자’는 정책 제안,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그리고 세계적인 데탕트 흐름, 이런 것들이 분위기를 타면서 한국에서 5.16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통일 논의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함석헌, 장준하 같은 사람들이 <씨알의 소리> 같은 것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동아일보> 주필을 하다가 권력에 의해 쫓겨났고 당시 재야의 주요 인물이던 천관우도 복합 국가론을 들고나온다. 그 이전에 천관우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이때는 통일 논의에 적극 가담했다. 복합 국가론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연합 국가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준하는 조금 있으면 통일 운동의 사도 비슷한 모습도 보이게 되는데, 대부분의 글은 정부 통제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7.4남북공동성명의 의의는 살아 있다

프레시안 : 7.4남북공동성명과 10.17쿠데타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그 당시에는 별로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현대사 책 등을 접했는데 ‘10.17쿠데타를 하고자 박정희 세력이 7.4남북공동성명의 경우 철저히 이행할 생각 없이 합의·발표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래서 7.4와 10.17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서중석 : 그건 박정희 집권기의 정치 이면을 다룬 이상우, 이경재 같은 사람들의 책이 나오고 저들이 유신 체제를 만들려는 모의를 언제부터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구체화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작업은 1987년 6월항쟁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6월항쟁 이후에야 그런 것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통일 운동이 1988년부터 굉장히 강렬하게 일어나지 않았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움직임도 생겼는데, 이 사람들은 유신 체제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을 다 갖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결합되면서 상당수가 7.4와 10.17을 바로 연결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당시 분위기를 보면 장준하조차 시간이 좀 지나서야 그걸 연결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참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런 방식으로 합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7.4남북공동성명은 잘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장준하, 함석헌의 기본 생각이었다.


프레시안 : 당시 권력층이 7.4남북공동성명을 제대로 이행할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그 문제와 별개로 이 성명의 통일 3원칙은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기준선으로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그래서 그 당시 함석헌, 장준하 같은 분들도 그런 주장을 강하게 한 것이다. 7.4남북공동성명이 설사 정치적 이용물로 나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표현된 평화, 자주, 민족적 대단결이라는 3가지 통일 원칙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큰길을 제시한 것으로 우리가 평화 통일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난 그 말이 맞다고 본다. 권력 쪽에서 유신 체제 같은 걸 생각하면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고 해서, 이 성명의 의의가 꼭 죽는 건 아니다. 그 의의는 그것대로 계속 살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김덕련 전 기자


<2015-09-23> 프레시안


☞기사원문: 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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