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지 인터뷰] 약산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 박사
▲ 영화 <암살> 중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 ⓒ 케이퍼필름 |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개봉한 지 한 달이 채 안 돼 누적 관객수 1000만을 훌쩍 넘긴 영화 <암살>에 나오는 약산 김원봉 선생(조승우 분)의 등장 장면 대사다.
이 영화를 통해 김원봉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고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보수적인 시각도 한편으로 존재한다. 약산에 대한 국민훈장 서훈 추진 움직임에 보수언론은 반대하고 있다. 현 정부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고, 새로운 국사교과서 지침에 따르면 약산이나 의열단 활동 자체가 교과서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처럼 약산에 대한 상반된 두 시각이 공존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분단된 한반도의 역사가 녹아있기 때문이다.
약산에게는 두 가지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하나는 일제에 치열하게 대항한 민족주의 독립투사의 이미지다. 실제 그는 일제시대 폭렬(爆烈)투쟁의 중심에 있던 의열단을 이끈 ‘의백'(단장)이었고,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항일무장투쟁 인재를 키워냈다. 또,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일제에 맞서 싸웠고, 민족혁명당을 이끌며 임시정부의 큰 축을 담당하였던 독립투사였다.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자 이미지다. 그가 이끌었던 의열단은 흔히 아나키스트 계열로 평가된다. 창립 당시 의열단의 ‘최고의 이상 4항목’이나 ‘의열단 선언’을 보면 사회주의적 요소가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약산이 의열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수준의 항일투쟁을 위해 결성한 조선혁명사회당의 당헌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포함돼 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에 경도돼 있었던 해방공간에서의 활동과 월북 이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것 등이 약산의 사회주의자 이미지를 강하게 채색했다.
“현재 이념 잣대로 보니 약산에 대한 논쟁 있는 것”
▲ 약산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 박사 ⓒ 이철호 |
“현재 이념의 잣대로 과거의 일을 재단하니까 약산이 사회주의자냐 아니냐 논쟁하는 것이다.”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의 말이다. 지난 9월 초 LA에 거주하는 김태영씨를 만나 약산과 약산의 가족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태영씨는 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의 자제다. 약산은 9남 2녀 중 장남이었고, 막내 여동생과는 34살 차이가 났다.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로 분단된 상황이 아니라면 약산이 항일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였든, 사회주의자였든 아무런 논쟁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현 분단체제가 이 논쟁거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봉건제도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일제시대에 평등한 토지분배와 같은 주장은 당시로 봐서 꼭 사회주의라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 1919년 의열단 창단시 의열단의 ‘최고의 이상 4항목’은 구축왜노,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일제와 친일파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여 계급을 타파하며 토지소유를 평등하게 한다)이었다. 즉 약산에게 항일투쟁과 사회적 평등은 같은 무게를 지녔던 것이다.
약산은 1925년, 편지 인터뷰 형식을 빌려 <동아일보>에 장문의 글을 게재한다. 그는 “조선에서 종족투쟁과 계급투쟁은 하나다”라고 선언한다. 일제에 대한 독립투쟁이 곧 조선민중의 계급투쟁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약산은 민중을 강조한 민족주의자 혹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약산은 항상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서서 모든 항일단체를 아우르는 통일전선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배척당했고, 때로는 우파에 의해 백안시당했다. 특히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 계열은 약산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해 그의 임시정부 참여조차 반대했다.
좌파에 의한 배척은 주로 중국 공산당과 연관이 있다. 중국 공산당 2인자였던 저우언라이 (주은래)의 도움으로 약산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지만 후에 실제 병력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수모를 겼었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어·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한 데다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항일의식이 투철한 용맹한 조선의용대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정작 조선의용대의 수장이었던 약산을 소부르주아며 기회주의자이고 개인 영웅주의자로 평가했다. 조선의용대가 1940년 화북 최전선으로 이동할 당시 국민당과 관계가 있었던 약산은 이에 합류할 수 없었다.
해방 후 귀국한 약산은 친일세력이 판치는 남한에서 좌절감을 맛보며 월북한다.
“극우테러 세력, 여운형 이어 김원봉 노렸다”
▲ 약산 김원봉(1898~1958). ⓒ wiki commons |
– 약산의 월북의 이유는 무엇인가?
“약산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겪은 현실 중의 하나가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돼 온갖 수모를 당한 일이다.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미 군정이나 극우세력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미 군정은 약산을 요주의 인물로 보고 검거에 총력을 다했으며, 극우테러 세력은 여운형 선생 암살에 이어 약산을 노리고 있었다. 약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1946년 12월,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 등 서울의 공산주의 단체들이 합당해 남조선 노동당을 창당했다. 그런데 약산이 이끌던 민족혁명당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1945년 8월 15일,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상해의 임시정부는 물론, 조선의 어떤 정부도 통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행정편의를 위해 일제에 부역하던 친일세력을 수족으로 부렸고, 특히 동포를 탄압하던 친일 경찰세력을 그대로 잔존시켰다. 노덕술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 약산은 김구·김규식 선생의 제안으로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1948년 4월 19일)에 참가했다가 남으로 오지 않고 북에 남은 것으로 돼 있다.
“연석회의에 참석해서 사회를 본 것도 맞고 김구 선생과는 달리 남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도 맞다. 하지만 월북은 백범 일행보다 조금 더 일렀던 것 같다. 1947년 여름, 어머니(약산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는 바로 위 오빠와 함께 서울에 있던 약산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날 올케(최동선)가 전화를 받더니 짐도 제대로 못 챙기고 급하게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머니도 종로경찰서로 연행돼 모진 심문을 받았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 이후 약산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7~8개월 정도 남한에 숨어 살다가 이듬해 초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약산과 가족이 월북한 이후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가 있지 않았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외삼촌 중 4명(약산의 형제 4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했다. 외당숙(약산의 사촌) 5명도 이때 총살당했다. 외할아버지는 연금당한 채 돌아가셨다. 외가 쪽만이 아니라 친가 쪽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가 아버지 대신 처형당했고, 아버지는 거름더미에 숨어지내시다 병을 얻어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 인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초기엔 주로 남로당원 등이 대상이었으나 가입을 지나치게 독려하는 과정에서 일반인은 물론 미성년자까지 억지로 가입시켰다. 1950년 초의 집계에 따르면 회원 수가 30만 명이 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들의 인민군 가담이나 기타 부역행위를 우려한 이승만 정권이, 전국에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살은 지역에 따라 군인, 경찰 혹은 서북청년단이 실행했다.
4.19 혁명 직후 제2공화국은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해 실태조사를 벌였지만, 이듬해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 쿠데타로 진상조사는 무산됐다. 유족들을 연좌제로 묶어 입을 막았고, 학살과 관련한 정부 기록을 모두 소각해 진상파악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참여정부 때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공식 확인한 사망자는 4934명이지만, 민간단체들은 피해자가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도의원하던 외삼촌도 빨갱이로 몰려”
▲ 약산이 국외에서 독립투쟁을 할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가족.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부친이며 그 옆이 계모다. 앞줄 중앙이 약산의 막내 동생 김학봉씨.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약산이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하여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과 같이 찍은 사진. ⓒ 김태영 |
– 한국전쟁 기간 중 외가·친가 모두 풍비박산돼 남은 가족들의 생활이 어려웠을 것 같다.
“모두 어렵게 살았다. 그래도 봉철 외삼촌이 한국전쟁 직후 사업을 해서 다른 가족들을 도왔고, 우리 가족도 이 외삼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봉철 외삼촌은 제2공화국 때 도의원도 지냈다. 4.19 이후 보도연맹에 대한 진상조사가 국회 차원에서 시작되고 유족들이 말을 할 수 있었을 때 봉철 외삼촌이 형제들이 몰살당한 계곡에서 시신을 수습해 합동장례식을 치러줬다.
그런데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 봉철 외삼촌도 빨갱이로 몰렸다. 형제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인간의 기본행위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봉철 외삼촌은 ‘군사혁명재판’에 회부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상소심에서 10년으로 감형됐고, 4년 정도 옥살이를 한 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셨다.”
–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희생된 형제의 시신을 수습한 것 때문에 처벌을 받았다니 이해하기 힘들다. 이후에 재심신청은 했었나?
“아주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해서도 입을 열기 어려웠다. 참여정부 시절, 어머니가 중심이 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를 신청했다. 위원회가 조사를 진행한 후 재심의 절차를 권고해서 재심을 신청했다.
2010년에 재심사건에서 봉철 외삼촌은 무죄를 선고받았고,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승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국가기록원에 보관돼 있던 외삼촌의 혁명재판소 기록을 발견했다.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박정희가 직접 서명 날인했더라.
봉철 외삼촌은 이미 1986년 돌아가셨고, 사후에야 명예회복을 한 셈이 됐다. 그것도 최근의 일이다. 5.16 쿠데타로 집안이 다시 한 번 극히 어려워졌다. 그나마 우리 가족을 포함해 약산의 가족을 챙기던 봉철 외삼촌이 잡혀 들어가고 나서는 모두 숨어 살다시피 했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남자 3형제는 모두 고아원으로 갔다. 나는 7세에 고아원에 맡겨져서 6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김원봉과 이승만 그리고 친일세력
– 이후 생활은 어떠했나?
“1980년 제5공화국 헌법에 연좌제 금지를 명분화해서 그래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군 제대 후 유학비자를 받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왔다. 벌써 30년이 돼 간다. 15년 동안 일하면서 공부했다. 한국 쪽은 돌아도 보지 않고 살았다. 다시 한국 나들이를 한 지는 5년 정도 됐다.”
김태영씨는 LA에서 오랫동안 여성의류사업을 해왔다. 2000년부터 약산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 약산은 월북 이후 국가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1950년대 후반 연안파와 함께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약산이나 이북에 있는 약산의 가족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은 있나?
“어머니가 2001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적이 있고, 2005년에는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었다. 모두 좌절됐다. 북한을 다녀온 분들 말씀으로는 약산의 묘소는 애국열사릉에 없다고 들었다. 약산은 다른 곳에 잘 모셔져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들은 적은 있는데 사실관계는 모르겠다.”
영화 <암살>의 흥행으로 친일청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된 반면, 정부나 집권여당은 끊임없이 건국절을 내세우면서 이승만 세력을 영웅화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포를 일제의 총알받이로, 성노예로 만든 친일세력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 친일세력을 비호하며 독재의 칼날을 휘둘렀던 이승만과 그 후계세력은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일제에 항거해 누구보다 처절하게 싸웠던 약산은 잊혔다.
<2015-09-2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형제 4명은 총살… 김원봉 집안 풍비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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