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4> 유신 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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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유신 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
[유신 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북한보다 야당이 더 못됐다? 박정희의 위험한 선동
프레시안 :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걸쳐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데탕트로 불리는 일련의 긴장 완화 흐름이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를 그러한 데탕트와 연결해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데탕트라는 국제 정세 변화가 한반도 안보 환경을 바꿨고 그로 인한 위기의식이 1971년 말에는 국가 비상사태 선언, 이듬해에는 유신 쿠데타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 아니냐,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주장으로 파악된다.
서중석 : ‘데탕트라는 위기를 만났기 때문에 10.17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정치학자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데탕트라는 위기가 유신 체제로 가는 데 중요했다든가, 데탕트라는 위기와 유신 체제를 연관시켜 연구하는 것은 유신 체제의 성립 과정에 대해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들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데탕트라는 위기와 정면으로 대립되고 있는 1972년 10.17 특별 선언에서 데탕트 문제를 제기하고는 있다. “지금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기존 세력 균형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우리의 안전 보장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데탕트가 한국에 위험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특별 선언에서 박정희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을 사람들이 조금 잘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데탕트 위기론의 문제점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우리 운명을 스스로 지키고 개척해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박정희는 그것에 이어 “전화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로운 조국 통일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27년간의 기나긴 불신과 단절의 장벽을 헤치고 이제 하나의 민족으로서 남북 간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데탕트 분위기에 맞춰가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데탕트 상황을 정면으로, 주체적 힘으로 돌파해 평화로운 조국 통일의 길을 열겠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1970년 8.15선언을 다루면서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27년간의 기나긴 불신과 단절의 장벽을 헤치고”라고 한 건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뭐냐 하면 27년은 1945년부터 계산한 것이지만, 적어도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우리 스스로 평화로운 조국 통일의 길을 모색하자. 남북 대화를 하자’, 이런 주장을 정부 차원에서 한 건 처음이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이건 1950∼1960년대에는 전혀 볼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면 이런 주장이 왜 나왔는가를 데탕트 위기론과 결부해 설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데탕트 위기론과 결부해 유신 체제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통일 문제와 관련해 박정희가 계속 강조한 ‘우리 스스로 평화 통일을 이룩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유신 체제라는 대결단을 내리게 됐다’는 이 부분을 연관해서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 점이 난 중요한 약점이라고 할까, 문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건 그 이후를 보면 더 그렇다. 1972년 10월 27일 헌법 개정안 제안 이유서에서 평화 통일을 어떤 식으로 강조했는지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런데 거기서도 데탕트 문제는 핵심이 아니었다. 물론 데탕트가 우리한테 시련과 도전을 안겨준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했지만, 헌법 개정안의 주요한 특징으로 제시한 첫 번째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명 완수를 지향”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민주주의의 한국적 토착화”였다. 헌법 개정안의 주요 특징으로 제시한 부분에 데탕트 위기 이야기는 안 나온다.
그 이후에 나온 주요 담화를 봐도 데탕트 위기론이 빠져 있다. 그게 특색이다. 그해 12월 23일 박정희 의장의 ‘통대’ 개회사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일동 이름으로 나온 결의문에는 그에 관한 이야기가 한마디도 안 나온다. 그리고 12월 27일 유신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한 번 보면, 여기서 박정희는 데탕트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했다. “이제 우리는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전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조응하겠다는 걸 이것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한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데탕트 위기론의 논지에 불리한 부분은 그런 연구들에서 별로 중시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프레시안 : 당시 데탕트 흐름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나.
서중석 : 이 시기에 주한 미군 일부 철수,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 미국과 중국 간의 데탕트 및 유럽에서 해빙 현상이 있었다. 먼저 유럽 쪽을 보면, 1969년 서독 수상이 된 빌리 브란트는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폈다. 빌리 브란트는 1970년 12월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쪽과 정치 회담을 하고 나서, 나치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독일의 침략 행위를 사과했다. 이 사진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대표하는 사진 중 하나로 참 많은 시사 잡지나 역사책에 실려 있지 않나. 1970년 3월에는 동독에서 동서독 수상이 첫 회담을 했고, 1972년에는 동서독 일반 통행 협정이 조인되고 그해 연말에는 동서독 관계 정상화 기본 조약이 조인됐다.
동아시아 쪽에서도 큰 변화가 이뤄졌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69년 7월 아시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에 일정하게 한계를 그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1971년 3월에는 주한 미군 7사단이 철수했다. 바로 그해 미국과 중국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가 왔다. 4월에 미국 탁구팀이 베이징에 도착했고,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헨리 키신저가 대통령 특사로서 베이징 방문길에 올랐다. 10월에는 압도적인 표차로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 됐다. 자유중국(대만)은 유엔에서 탈퇴했다. 1972년 2월 17일 닉슨은 역사적인 중국 방문길에 나섰고, 2월 27일 미국-중국 공동 성명을 냈다. (2월 17일 워싱턴을 떠난 닉슨은 괌, 상하이를 거쳐 21일 베이징에 도착해 마오쩌둥을 만났다. <편집자>) 9월 29일에는 중일 수교가 발표됐고 일본과 자유중국은 단교했다.
한마디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국가와 정권의 운명을 냉전과 진영 논리에 맡긴 정권이라면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 그 점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신 체제 성립 과정에서 박정희가 발표한 여러 문건 등을 볼 때 박정희는 그런 것에 대해 자신 있는 태도를 보여줬다. 이 점은 뒤에 가서 다른 문제와 결부해 다시 논의하자.
▲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역사적인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사진은 그해 2월 25일 축배를 나누고 있는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위키미디어커먼스 |
휴전 후 최대의 전쟁 위기 부른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
프레시안 : 데탕트라는 조류가 국제 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 한반도에서는 그와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특히 1968년을 전후해 북한의 무력 공세가 늘어나고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됐다. 1968년은 북핵 위기가 있었던 1994년과 더불어 휴전 협정 체결 후 전쟁 위기가 가장 고조됐던 때로 꼽힌다. 유신 쿠데타가 1968년을 전후한 전쟁 위기 고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 어떻게 평가하나.
서중석 : 남북 관계에 최대의 위기가 있었다면 1968년, 1969년의 그 상황이 맞다. 그때의 위기라는 것은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최대 위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 집권 전 기간 중 안보상의 이유로 정치 체제를 바꾼다면 1968년이나 1969년에 하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1966년 10월 조선노동당 제2차 당 대표자 대회 이후 북한은 대남 무력 공세를 강화하면서 남한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제2의 전선을 펴고자 했다. 그런 것의 일환으로 1968년에 엄청난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게 된다.
1968년 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효율적인 대간첩 작전을 마련하기 위한 비상 치안 회의가 제1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여기에는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모든 국무위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임충식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 사단장급 이상의 각 군 일선 지휘관, 전국 도지사, 지방 검사장, 경찰국장 등 160여 명이 참석했다. 박 대통령은 “북괴는 작년도의 10배에 달하는 무장 간첩을 밀파하여 전면적인 유격전을 시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큰 회의가 열린 후 1월 15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북괴 김일성이가 간첩을 많이 보내 가능하면 게릴라전을 벌이려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의 기본 전략을 다 알고 있었다, 이 말이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따라서 정부는 휴전선, 해안선, 내륙 지방, 국가 중요 시설의 경비 등 만반의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고 나서 불과 일주일도 안 지난 1월 21일 일요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과 그 부근에 31명의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 군경 합동 수색대는 교전 끝에 22일 그중 한 명(김신조)을 생포하고 일부를 사살했다. 나머지는 계속 교전하면서 이 문제가 마무리되는 데 여러 날 걸린다.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전사했고 민간인도 여러 명 희생됐다. (1968년 1월 26일 대간첩 대책 본부는 작전 과정에서 군인 22명, 경찰 2명, 민간인 8명 등 총 3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편집자>)
문제는 무장 게릴라들이 1월 19일 파주 삼봉산을 지나갈 때 이를 발견한 나무꾼들이 당국에 신고했는데도, 이틀이나 지난 21일 밤 10시경 청와대 근처인 청운동 입구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나무꾼들, 그러니까 민간인 4명한테 들켰을 때 무장 게릴라들은 ‘신고하지 말라’고 협박만 하고 민간인들을 놔줬다. 그렇지만 나무꾼들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신고했다. 그런데도 청와대 부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청와대까지 노린 건 참 심각한 문제이고, 북한이 그렇게까지 도발적으로 나왔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 대비했기에 이렇게까지 됐느냐 하는 점도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당시 언론이 이걸 상당히 두려워했고 야당도 이런 문제에 대해 강하게 나서기가 어려웠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가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게 드러났는데, 청와대를 불과 수백 미터 남겨놓고 청운동 고갯길에서 종로경찰서장한테 저지될 때까지 단 한 번의 검문이나 검색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신조가 속했던 이 부대는 북한에서 1967년에 창설한 특수 부대인 124군 부대로 나중에 알려진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1.21사태 직후 푸에블로호 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전면전이 재발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치닫지 않나.
서중석 : 1월 23일 미군의 정보함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돼 끌려갔다. 1.21사태가 일어난 지 48시간도 안 지난 때였다. 미국으로서는 당시까지 이런 일이 아주 드물었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의 핵 추진 항공모함인 엔터프라이즈호가 기동 함대를 이끌고 동해 현장으로 항진했고, 극동 주둔 제5공군에 전투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일종의 전쟁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25일 공군과 해군에 대한 부분적인 동원령도 내렸다. 그런데 이 사건이 났을 때 미국 소식통에서는 ‘한미 양국이 한국 전선에서 더 이상 병력을 빼내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북베트남을 간접 지원하고, 이미 베트남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군 5만 명에 더해 병력을 증파하는 문제가 제기됐는데 이를 더 논의할 여지가 없게 만들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봤다.
공교롭게도 1월 30일에는 베트남에서 그 유명한 구정 대공세가 전개된다. 나트랑, 다낭 등 10개 시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무려 7개의 성도가 일시적으로 점령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이 한때 점거되기도 했다. 사이공의 대통령 관저 피격에 이어 한때는 ‘응웬 반 티에우 대통령은 어디로 갔느냐’고 하는, 즉 대통령 소재 불명 상황도 발생했다. 그리고 월맹(북베트남)이 미국 해병대와 월남 특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케산 기지를 공격하면서 도처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베트남전쟁과 어느 정도는 연관성이 있어 보이면서도 북한 내부의 과격 모험주의 노선이 1.21 청와대 기습 작전과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많은 사람이 판단하고 있다.
▲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었다. 사진은 평양의 대동강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앞에서 반미 성토대회를 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2004년 6월 24일). ⓒ연합뉴스 |
한반도 긴장 고조 상황을 활용해 권력을 강화한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이러한 일련의 위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과 미국은 엇박자 행보를 보이지 않나.
서중석 : 홍석률 교수도 자기 책에 상세히 썼는데, 박 대통령은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에 미국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에 굉장한 배신감을 느끼고 미국에 강경히 항의했다. 그와 함께 궐기 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1월말경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김일성 화형식을 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궐기 대회를 했다. 30일에는 서울 시내 중·고등학교 및 지방 일부에서 궐기 대회가 열렸고, 31일에도 시민, 학생 10만 명이 서울운동장에 모여 ‘북괴 만행 범시민 궐기 대회’를 열었다. 이런 궐기 대회를 2월 5일경까지 대대적으로 열었다.
다른 한편으로 박 대통령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북한에 보복해야 한다’고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 박 대통령을 달래기 위해 2월 8일 존슨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1억 달러 추가 군사 원조를 특별히 하겠다며 의회에 이를 요청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라도 보복해야 한다. 경고 조치로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러자 2월 중순에 사이러스 밴스 특사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면 미국이 즉각 행동을 취하겠다’는 양국 간의 방위 조약 약속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러면서 4월 17일 한미 정상 회담이 열린다. 원래 그전에 예정돼 있었던 것인데 미국에서 흑인 투쟁, 흑인 폭동이 발생하면서 잠시 연기됐다가 이때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다. 5월 27일과 28일에는 워싱턴에서 양국 국방부 장관이 한미 국방 각료 회담을 열고 안보 문제를 논의한다.
(1.21사태 직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곧바로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와 한국의 군부 등은 분개했다. 푸에블로호 선원 송환 등의 문제를 풀고자 1968년 2월 2일부터 미국이 판문점에서 북한과 비밀 협상을 한 것도 박정희 정권을 자극했다. 다른 곳도 아닌 청와대를 습격하려 한 사건이고, 더욱이 베트남에 5만 대군을 보내 미국을 돕고 있는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박정희 정권 측의 이런 심정은 밴스 특사 방한 때 그대로 표출됐다. 2월 11일 밴스 특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 쪽에서는 차관만 마중을 나갔을 뿐 장관 이상 인사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공항에 가지 않았다. 2월 13일 국회를 방문한 밴스 특사는 한국 측 인사들의 항의에 시달렸다. 박 대통령의 심복으로 꼽히던 이효상 국회의장은 “쿠바의 무장 공비가 백악관을 습격했다면 미국 국민들은 얼마나 격분했겠느냐. 북괴 공비의 청와대 습격이 우리 국민들을 분격케 한 심정을 왜 모르느냐”고 따졌다. 또한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다며 밴스 특사를 압박했다. 박준규 국회 외무위원장은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 8군에 비상경계를 내렸는데 공비 사건 때는 왜 안 내렸는가”라고 항의했다. <편집자>)
그런데 나는 이러한 큰 사태가 일어나면 박 대통령이 ‘국가 안보가 굉장한 위기에 처한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중요한 정치적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 박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의 통제 능력, 전쟁 대비 능력을 계속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 이런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이 강화된다고 여길 수 있는 면을 보여준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고조됐던 1964∼1965년에 박 대통령은 오히려 계속 권력을 강화했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1960년대 후반을 살펴봐도, 1967년부터 징병제를 강화하고 주민 등록을 일제히 정립해 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66년부터 빈번하게 일어나던 휴전선 부근 충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1968년 1.21사태 같은 것이 발생하자 이제는 더 강력한 국가 동원 체제로 가서 향토 예비군을 설치하고 주민등록증을 발급했다. 이건 울진·삼척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생긴 현상이다.
향토 예비군 문제는 1971년 대선에서도 크게 논란이 된다. 원래 1961년 12월에 향토 예비군 설치법을 마련했지만, 시행령이 없어서 일종의 죽은 법과 다름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걸 꺼내서 1968년 2월 20일, 1.21사태 한 달 후인 이때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것에 대해 유진오 신민당 당수는 영구 집권 태세로 가기 위해 1.21사태를 역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향토 방위법, 향군 무장 같은 것을 반대했다. 5월 10일에는 신민당 의원이 전원 불참한 가운데 향토 예비군 설치법 개정안,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향토 예비군 편성은 야당 반대와 상관없이 계속 진행돼 그해 4월 1일 대전에서 창설식을 하게 된다. 8월 15일까지 예비역 192만 명 중에서 187만 명이 편성 완료됐다.
이 시기에 박정희 정권이 계속 강화되는 현상은 월남 파병 속에서 이뤄진 미국의 지원과 연결해서도 볼 수 있지만 북한이 모험주의, 급진 좌경주의 방식으로 나온 것도 오히려 박정희 정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1968년 11월 5일 대간첩 대책 본부는 11월 2일 밤 동해안인 경북 울진에 30명 내외로 추산되는 무장 ‘공비’가 불법 침입해 주민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민을 대검으로 찌르고 돌로 무참히 살해한 예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것에 이어서 삼척 지구에도 상당수의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발표가 났다. 이걸 울진·삼척 공비 사건 또는 무장 게릴라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휴전 협정 이후 최대의 남북 군사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베트남전과 긴밀히 연결해 제2 전선을 형성하려는, 게릴라를 보내 남쪽과 미국의 군대를 묶어두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여튼 1968년 남북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속에서 1968년 12월 5일, 울진·삼척 사건이 아직 진행 중일 때인데, 그간 오랫동안 준비해온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했다. 국가 동원 체제의 이념 체계라고 이야기되기도 하는 국민교육헌장을 학생, 공무원 등에게 말 그대로 달달 외우게 했다.
1969년 4월 15일에는 승무원 31명을 태운 미국 해군의 네 발 EC-121 프로펠러 정찰기 1대를 북한 측에서 격추했다. 그 잔해가 동해상에서 발견됐는데, 미국에선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그랬다. 한편 북한의 모험주의 세력들은 1969년에 들어와 숙청된다.
어쨌건 이런 북한의 무력 침투에 대해 박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보복 공격을 해야 한다’고 미국에 강력히 역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향토 예비군 설치, 주민등록증 발급, 그리고 조금 있으면 교련 실시 같은 걸 통해 대민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금단의 영역이던 일본과 군사 교류도 활발하게 했다. 1969년 일본 육상 자위대 장군 야마다 마사오가 한국군을 시찰한 후 대통령을 만났고, 1970년 자위대 정무 차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1971년에는 국방부 차관 유근창이 일본 자위대와 국방대학을 시찰했다.
유신 쿠데타와 1968년 전쟁 위기를 바로 연결하는 건 무리
프레시안 : 1968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1969년에도 EC-121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을 강행하는데, 그때 이런 사안들을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나?
서중석 : 1972년 10.17 특별 선언 등에서는 데탕트 위기가 그래도 조금 언급은 되고 있는데, 1969년 3선 개헌 때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3선 개헌을 하는 주요 이유로 이런 문제가 대두되지 않았다. 1969년 7월 25일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에 관한 특별 담화를 발표하는데 ‘북한의 무력 공세 때문에 우리 정치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런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야당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런 여러 모습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이 시기에 자신감을 갖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위기감보다는 자신감이 더 드러나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만일 굉장한 국가적 위기감을 느꼈다면 1968년이나 1969년에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비상사태를 선포한다든가 하는 게 있었을 법한데, 그런 게 없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휴전 협정 이후 1980년대 말까지 남북 간에 1968년 무렵의 이런 사건들보다 더 큰 건 없었는데도 이를 계기로 국가 비상사태 같은 것을 선언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68년 무렵의 한반도 긴장 고조 분위기를 가지고 유신 쿠데타를 설명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열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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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09-30> 프레시안
☞기사원문: “쿠바가 백악관 습격했다면”…분노한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