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3일 교육부 장관 이름으로 ‘2015 역사교육과정 개정’이 고시됐다. 2015 교육과정은 시안이 공개된 지난 5월부터 교육철학의 부재, 교육과정·교과서에 대한 몰이해, 정치사의 반복으로 인한 역사교육의 심각한 후퇴, 근현대사 비중 축소와 독립운동사 홀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지적돼 왔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2015 교육과정 개악의 결정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꾼 데 있다. “1948년은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라는 반헌법적인 ‘건국절’론을 2015 교육과정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을 간파한 언론이 “뉴라이트 진영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하자, 교육부는 부랴부랴 설명자료를 배포해, “‘대한민국 수립’은 공청회, 행정예고 기간 중 수렴된 수정요구 의견, 역사 전문 연구기관의 검토, 역사과 교육과정 개발 연구진의 의견을 반영해, 역사과 교육과정심의회의 최종 심의를 거쳐 결정된 것으로 특정 단체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이라고 반박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다.
2015 교육과정과 교과서 집필기준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뉴라이트 계열의 위원들이 이미 국민 다수에 의해 거부된 뉴라이트의 ‘건국’ 주장을 호도하기 위해 일종의 우회 전술로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을 주장했다고 한다. 따라서 2015 교육과정에 명기된 ‘대한민국 수립’은 사실상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을 박근혜 정부가 전격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 그 조짐은 올 광복절 경축사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광복절 경축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건국’이라는 단어가 이례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기준으로 한다면 67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광복 70주년 경축사에서 굳이 ‘건국 67주년’을 강조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건국’이라는 단어를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 사용한 이는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고 하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2008년 8·15 경축사에서 그는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년”이라 선언하고,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를 발족시켜 기념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수구세력이 이에 장단을 맞춰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책동을 벌였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8월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을 필두로 하는 수구세력의 ‘건국절 총공세’는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역사학계 그리고 시민사회의 반발로 좌절됐다. 하지만 수구세력은 당초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건국절 불씨를 되살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2013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사태의 본질도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채택률이 0%에 가깝자 이들은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여당인 새누리당 대표와 교육부 장관이 국정화 찬성 여론몰이를 주도해 왔다. 교과서 발행제도를 바꿔서라도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역사인 광복절을 지워버리고 친일파의 복권을 기념하는 ‘건국절’을 주입시키겠다는 게 수구세력의 생각인 것이다. 이번 ‘건국절’ 파동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한상권 | 덕성여대 교수
<2015-09-30> 경향신문
☞기사원문: [기고]‘건국절’ 망령의 부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