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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무시’, 박정희 ‘인정’? 자가당착 개발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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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5> 유신 쿠데타, 열한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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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기 경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개발 독재론이다.

서중석 : 유신 체제와 관련해 경제 문제에서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 게 개발 독재다. 지금도 너나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참 많아서 듣기에 딱하고 듣기도 참 괴롭다. 왜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 건지 납득이 안 간다. 그냥 별 생각 없이 개발 독재, 개발 독재 그러는 경우도 정말 많더라. 그런데 그중에서 이 얘기를 처음에 꺼낸 사람들은 일종의 개발 독재론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일정하게 이론적인 구사를 했다. 여기서 내가 주로 거론하는 건 개발 독재론을 제기한 그 사람들의 주장이다.

개발 독재는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 발전과 관련해 학자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는 용어다. 그러나 이 용어를 편의적으로 또는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난 본다. 엄격하고 신중하게, 적확한 개념을 구사해 제한적으로 사용할 때에만 학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적용 범위 등에서 엄밀성이 떨어지는 개발 독재론


프레시안 : 개발 독재론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보나.

서중석 : 우선 적용 범위에 엄격성을 부여해야 한다.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개 한국과 대만을 대표적인 국가로 꼽고 군정 치하에 있었던 남미 국가들 즉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를 포함하기도 한다. 칠레의 경우 여러 각도에서 논쟁이 붙기 때문에 일단 논의에서 제외한다면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그 밖의 남미의 군사 정권은 전부 경제를 망쳤다.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그 부분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런 점을 인정은 한다. 내 말은 개발 독재 사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개념화하는 작업이 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대만, 군정 치하에 있었던 남미를 보면 국가의 성격에서 다른 면이 있다. 한국의 경우 제3공화국 시기에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존재했다. 비판적 야당이 존재했다. 사법부와 언론도, 말기에는 달랐다고 하더라도 그전에는 일정하게 자율성이 있었다. 학생 운동이 외부의 통제나 감시를 받기도 했으나 강력하게 존재했던 것도 대만이나 남미와 다른 점이다.

정리하면 한국의 경우 이승만 집권 시기에는 권위주의 성격이 강했으나 제2공화국 시기에는 그것이 완화됐고, 5.16쿠데타 후 군정기를 지나 제3공화국에 와서도 권위주의가 제2공화국보다는 강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건 대체로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1969년 3선 개헌도 어쨌든 절차를 밟아서 한 것이다, 이 말이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 체제는 그것하고 다른 것이었다. 초강경 권위주의 체제였다. 전두환 신군부 체제도 강도 높은 권위주의 체제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대만의 경우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전두환 정권 후반에 이를 때까지 비판적 야당을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박정희 정권과는 대조적으로 1972년경부터 대만 권력의 성격이 점차 개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만큼 민주화를 향해 가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장제스·장징궈 부자를 정점으로 한 국민당이 여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야당인 민진당이 출현한다든가 계엄령이 해제된다든가 하는 것 등은 상당히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1986년 민진당이 발족하고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대만은 일당 독재 국가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권을 비판하는 다른 당이 존재할 수 없지 않았나. 유신 체제에서도 복수 정당제 또는 야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 박정희 1인 체제와 모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이런 점에서도 대만과 한국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었다.

하여튼 박정희 집권기와 장제스 집권기를 동렬에 놓고, 또 박정희 집권기에서도 유신 쿠데타 전과 후를 동렬에 놓고, 거기에다가 군정 치하에 있던 남미를 포함해 모두 개발 독재라고 부른다면 개념상 혼란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기업 등 경제에 대한 국가의 높은 수준의 자율성과 연관을 지어 개발 독재를 논의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우리 현대사를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본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이승만 정권은 인허가, 귀속 재산 처분과 외국 원조 물자 분배, 그리고 금융 분배를 무기로 해서 굉장히 높은 자율성을 가졌던 정권이다. 어떤 점에서는 박정희 정권은 그 유(類)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인허가나 금융 분배도 컸지만 특히 귀속 재산 처분이라는 것, 그리고 주로 미국에서 온 외국 원조 물자를 분배하는 것은 당시 굉장한 힘이었다. 그랬는데, 국가의 자율성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면 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개발 독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인허가, 차관 도입, 금융 분배를 무기로 강력한 자율성을 가졌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개발 독재의 전형으로 여러 개발 독재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유신 체제의 경우 그 말기를 보면 그와는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이 시기에 중화학 기업을 중심으로 한 재벌들의 사활을 건 몸 불리기 경쟁이 나타나지 않았나. 그것도 과잉 중복 투자로 구체화됐는데, 유신 정권이 이것을 통제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가 재벌들끼리 벌이는 과잉 경쟁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할까, 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 경제를 연구한 김대환 씨가 이번(2015년 8월)에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으로 다시 등장하던데, 20년 전쯤 나한테 그러더라. “유신 말기에는 박정희 정권이 힘을 못 쓰더라.” 그런데 그건 그전에 기자들이 이미 다 써놓은 내용이었다. 도대체가 그 시기에 박정희 정권이 과잉 경쟁을 벌이는 재벌들을 잡고 확실히 통제하지 못하더라, 이 말이다. 국가의 자율성이 그만큼 약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생산 기관의 소유 또는 국유·국영 기업과 사기업의 비중을 살펴보면, 귀속 재산을 국가가 소유하고 있었던 이승만 정권 초기를 제외하면 어느 시기에나 사기업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승만 정권 중기와 후기에도 귀속 재산이 남아 있었고 박정희 정권 초기에도 있었지만, 그때쯤 되면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개발 독재론에서는 한국의 경우 기업에 대한 국가의 자율성이 컸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사기업 국가였다는 점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고 있다. 하여튼 국가와 기업, 이 양자의 관계를 더 잘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 유신 체제 후반기에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 공업에 대한 재벌들의 과잉 중복 투자 문제를 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진은 박 대통령이 포항종합제철을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유신 체제 닮은꼴 전두환 집권기, 그런데 개발 독재는 아니다?

프레시안 : 개발 독재가 이뤄졌다고 보는 기간도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서중석 : 개념이 애매해서 그렇겠지만 개발 독재 시기를 어느 때로 규정할 것인가, 이게 또 문제다. 학자에 따라 애매하게 쓴 사람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규정한 사람도 있는데, 조금씩 다르다.

박정희 집권기 18년을 일률적으로 개발 독재로 설명하는 건 난 납득되지 않는다. 전두환 신군부 집권기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도 보이는데, 왜 이건 포함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행정부가 경제 개발에 관심이 높았던 때를 가리킨다면, 부흥부(1955년 출범)가 설립된 후 경제 회복기로 접어드는 1956∼1957년 시기부터 해당한다고 난 본다. 특히 장면 정권은 1960년 출범할 때부터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하고 경제 건설에 모든 행정력을 쏟겠다고 천명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경제 건설이 그때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이용희 교수 같은 사람이 그런 주장을 하더라. 그때부터 경제 개발 시기였다고 파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와 달리 우리 공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건설되는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건 1965∼1966년경부터다.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데,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연관시켜서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학자가 개발 독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박정희 유신 독재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개발 독재는 독재 권력 주도로 ‘경제 개발=산업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을 억압·통제하는 국가주의적 근대화 수동혁명 체제”, 아주 어려운 말인데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게 해당되는 시기는 유신 체제와 신군부 시기, 이 두 시기밖에 없다. 이런 식의 설명은 제3공화국 시기 박정희 정부에는 맞지 않는다고 난 본다. 하여튼 이렇게 설명하거나, 또는 ‘냉전·분단 상황을 국민 동원과 독재 권력 쪽에 뛰어나게 활용한 준전시 개발 독재 모델이자 고도의 중앙 집중형의 파행적 특성’으로 박정희 집권기를 파악한다. 이것도 참 어려운 말인데, 이런 규정이 정확히 뭘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이것도 제일 가까운 건 새마을운동도 일어난 유신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또 ‘개발 독재란 정치적 안정, 참여 제한을 통해 경제 개발에 국가를 총동원한다는 것’,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건 유신 체제, 신군부 체제를 빼놓고는 다른 데서는 맞지 않는다.

이런 식의 주장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은 유신 체제 시기하고 전두환 신군부 시기라고 봐야 할 텐데, 이렇게 논의를 전개하는 사람들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제로는 꼭 그렇게 보기가 어렵게 돼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돼 있나.

서중석 : 제3공화국 시기와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는 권위주의 또는 독재라는 면에서 엄연히 다른데도, 박정희 집권기 전체를 가리켜서 개발 독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제3공화국 시기와 유신 체제 시기는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도 이들은 몇 가지 불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그 두 가지가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심각한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박정희 집권기 전체를 가리켜 개발 독재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제3공화국 시기와 박정희 유신 체제 시기가 비슷하다고 보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유신 체제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건 논리적으로 참 문제가 있다고 난 본다. 그래서 내가 이 지적을 하는 것이다. 뉴라이트 정치학자라면 유신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3공화국이나 유신 체제나 비슷한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고 볼 수 있지만, 진보적 학자들의 경우 그것도 아닐 터인데 왜 그렇게 현실과 거리가 먼 주장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구태여 개발 독재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유신 체제와 가장 비슷한 권력이라고 볼 수 있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해서는 왜 개발 독재라는 언급을 안 하는 것인지를 지적하고 싶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경우 유신 체제의 잘못된 경제 정책, 즉 경제적인 실책에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유가 폭등이 겹치고 농업 문제도 있고 해서 1980년에 한국전쟁 시기였던 1952년 이후 경제가 최악의 상태에 빠진다. 이건 많은 부분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잘못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기를 제외하고 설명한다면,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1983년에서 1987년까지 5년간 연평균 9.5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건 1967년에서 1971년까지 5년간 연평균 9.7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것에는 못 미치지만, 유신 전기에 해당하는 1972년에서 1976년까지 5년간 경제 성장률이 연평균 9.2퍼센트였던 것보다는 높다. 유신 말기의 경우 그보다 더 떨어졌으니 비교할 것도 못 된다. 더군다나 전두환 정권 말기에서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1986∼1988년에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할 만큼 유사 이래 최고의 호경기를 누리며 경제 성장률이 제일 높았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만일 개발 독재론으로 설명하려면 전두환 집권기가 정말 좋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지 참 이상하다.

한국인은 정치가이건 학자이건 일반 시민이건 제3공화국과 유신 체제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 유신 체제와 그 서자 격인 전두환 신군부 체제를 문제 삼으면서 ‘이걸 없애야 한다. 타도해야 한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제3공화국 헌법과 유신 헌법은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 전두환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3공화국 시기와 유신 체제 시기는 엄연히 다르다

프레시안 : 제3공화국 시기와 유신 체제 시기가 다르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연속성도 많지 않았나. 예컨대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커지자 1964년 계엄을 선포한 것처럼, 제3공화국 때에도 정부 비판 세력의 목소리를 누르기 위해 계엄령을 활용했다. 군인들이 대학에 난입해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잡아가는 일 역시 제3공화국 시기에도 일어났다(예를 들면 1965년 8월 고려대).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반대 세력의 숨통을 죄는 일도 제3공화국 시기에 비일비재했다. 물론 유신 쿠데타 이후 훨씬 극단적인 체제가 만들어진 건 분명하지만 계엄령과 군인들, 그리고 중앙정보부를 내세워 정권을 유지한 점 등은 제3공화국 시기나 유신 체제나 마찬가지 아닌가?

서중석 : 박정희 집권 전 시기에 걸쳐 계엄이나 중앙정보부를 통해 통치한 것 아니냐는 건데, 개발 독재를 주장하는 학자들 중에도 그 점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계엄이라고 하더라도 1964년에 내린 계엄하고 1972년 10월 17일에 내린 계엄은 판연히 다르다. 전자의 경우 언론, 출판의 자유가 크게 제한을 받지는 않았고 의회를 중심으로 한 야당의 활동도 그다지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1972년에는 이게 전면 부정되지 않았나. 야당도 활동을 못하게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계엄을 해제한 후 새로 선거를 한 다음에 활동하게 했다. 계엄을 선포한 건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을 보면 양자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을 가장 크게 특징짓는 것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도 유신 쿠데타 이전과 이후, 활동 면에서 차이가 크다. 내가 왜 이런 걸 일일이 지적하느냐 하면 저들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과 달리, 그 부분도 그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제3공화국 시기는 감시나 연행, 연금, 고문이 부분적, 선택적이었다면 유신 쿠데타 이후엔 그 범위가 훨씬 넓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의 유신 반대 시위를 도화선으로 해서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일어나는데, 그해 학생 시위에서 가장 많이 나온 요구가 “중앙정보부 폐지”였다. 중앙정보부는 유신 체제를 보위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그래서 학원을 물샐틈없이 감시했다. 그런데도 1973년 10.2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계기가 된 건 그해 8월 중앙정보부에서 일으킨 김대중 납치 사건 아닌가.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는 게 1960년대에 상상할 수 있었던 일인가, 이 말이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나지 않나. 박정희 정권은 이걸 빨갱이 사건으로 치밀하게 조작했다. 1975년에 가서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 물론 이 중 한 명인 여정남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판을 받긴 했지만, 어쨌건 이 8명은 법에 의한 살인을 당하지 않나. 학살당한 사람들이다. 이건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할 때하고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또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 이건 학생 운동을 한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 1960년대에 3차에 걸쳐 조작한 정치적 사건이다. 그런데 민청학련 조작 사건은 그러한 민비연 사건하고도 그 유가 다르다. 고문을 받은 정도, 재판 과정 등 여러 가지를 보면 그렇다.


그리고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는 국가를 병영화하고 준전시 상태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는 다방에 가더라도 항상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얘기해야 했다. 감시 체제가 워낙 철저하게 잘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과 더불어,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보더라도 제3공화국 시기와 유신 체제 시기, 양자는 구별이 된다.

유신 체제가 없었으면 경제 발전도 없었다? 위험한 논리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식으로 구별되나.

서중석 : 일반적으로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면 유신 체제 시기와 전두환 신군부 체제 시기에 있었던 현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다. 제3공화국 시기의 경우 각각 따로따로 이름을 부르고 있다. 3선 개헌 반대 운동, 교련 반대 운동, 한일 회담 반대 운동, 한일협정 비준 반대 운동, 이런 식으로 이름이 각각 다르다. 따로따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물론 이게 민주화 운동이 아닌 건 아니지만, 이렇게 따로따로 이름을 붙이는 것하고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라고 딱 1970년대를 규정하는 것은 차이가 난다.


더구나 제3공화국 헌법이나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제3공화국 헌법 바꿔라. 체제를 무너뜨리자’, 이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 그건 1987년 6월항쟁 이후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1969년 3선 개헌 과정을 보더라도, 야당 의원들에게 개헌 찬반 투표를 고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법 행위가 있긴 했지만 유신 헌법 제작 과정과는 많이 달랐다. 개인적 권력욕으로 군대를 동원해 계엄을 선포하고 비상국무회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불법 기구에서 수백 개의 법률과 유신 헌법을 만들어낸 것하고 그 이전의 정치 과정은 차이가 많이 난다. 유신 헌법은 헌법을 어기고 개헌한 이승만 정권의 발췌 개헌(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하고도 적잖은 차이가 있다. 유신 헌법은 제헌 헌법, 제2공화국 헌법, 제3공화국 헌법과 전혀 다른 헌법이다. 이걸 구별해야 한다.


박정희가 1979년 10.26에 의해 거세됨으로써 유신 체제가 그와 함께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오지 않나. 그때 국회에서 헌법 개정안을 논의하는데 김종필의 공화당 세력이건,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 세력이건 그다지 큰 논란 없이 큰 테두리에 쉽게 합의를 봤다. 즉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합의를 봤다. ‘유신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게 민주주의 헌법이다’, 이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6월항쟁 때 나온 제일 중요한 구호가 세 가지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였다. 이건 전부 ‘유신 체제 이전 헌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사실 별 차이가 없었다. 유신·신군부 헌법을 철폐하자는 것이 호헌 철폐였고, 독재 타도는 유신·신군부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직선제를 쟁취해 유신 이전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6월항쟁으로 탄생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1987년 헌법은 제3공화국 헌법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면 오늘날 헌법하고 유신 헌법이 같은 건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않나. 마지막으로 개발 독재론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개발 독재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왜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는지를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고 난 본다. 그런데 한마디 설명이 없다. 다시 말해 ‘박정희가 개발 독재를 위해 유신 쿠데타를 했다’든가 ‘경제를 위해서 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뭘 했는지, 뭘 안 했는지를 분석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말이다. 난 그 점이 개발 독재론의 결정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진보적 학자들의 개발 독재론에는 개발 독재가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유신 체제가 없었다면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참 무시무시한 논리로, 뉴라이트조차도 이런 주장을 지금까지 차마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진보적인 학자들 중 일부가 하고 있다. 이 점을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다.

<2015-10-14> 프레시안

기사원문: 전두환 ‘무시’, 박정희 ‘인정’? 자가당착 개발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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