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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핵 개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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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9> 유신 쿠데타, 열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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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지난 번에 개발 독재론의 문제점을 짚었다. 이제 유신 쿠데타와 중화학 공업화 문제를 살폈으면 한다.

서중석 : 전에 이야기한 오원철처럼 박정희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 수구 냉전 세력, 뉴라이트 일부 그리고 몇몇 연구자는 극단적인 권위주의 체제, 즉 유신 체제가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신 체제였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이 발전했다는 식의 주장은 외국에서도 근거를 찾기가 어렵고, 국내에서도 그 점은 비슷하다. 어째서 유신 체제가 돼야만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유신 체제가 아니었으면 정말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킬 수 없었던 것인지 등에 대해 저들이 그 근거를 충실히 찾아서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예컨대 “중화학 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 공업화”라고 주장한 오원철의 글을 잘 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온다. 유신 체제가 아니었으면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신 체제 때 무지하게 발전했다’, 이렇게 얘기한다. 그 표현이 애매하다. 그 사람들 글을 보면 빠져나갈 구멍이 마련돼 있다는 게 보인다.


박정희와 다른 방식으로 중화학 공업 발전시킨 대만


프레시안 : 주요 경쟁 상대이던 대만과 비교하는 것은 이 시기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대만은 이 무렵 어땠나.

서중석 : 이 시기에 한국만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킨 것이 아니다. 대만도 중화학 공업을 한국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발전시켰다. 그런데 내가 항상 얘기하듯이 발전시킨 방법도 달랐고, 이 시기에는 대만이 상당히 개방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대만은 1961년에서 1988년까지 연평균 9.3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해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가운데 1961년에서 1988년까지를 기준으로 하면 성장률이 가장 높다고 대만에서 나온 책들에 쓰여 있다. 그런데도 장개석(장제스)이 개발 독재를 해서 그렇게 경제가 발전했다는 이야기를 난 접한 적이 없다. 대만에서 장개석은 무지무지하게 비판을 받는 대상이다. 특히 1950년대 공포 정치에 대해서는 국민당과 대립하는 민진당뿐만 아니라 다른 진보 세력도 비판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대만의 경우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5.6퍼센트였다. 이와 달리 한국은 1960년대에도 물가 상승률이 항상 높았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 1∼2년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였고, 20퍼센트를 넘은 때도 몇 년 있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대만은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한국은 굉장한 물가 등귀를 수반한, 특히 1970년대에는 그게 아주 심각했던 경제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강조해 마지않고 그 당시 많은 사람이 지적한 것처럼, 박정희와 달리 대만은 재벌 중시 정책을 쓰지 않았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데탕트로 국제 환경이 너무나 심각하게 변화해서 대만이 살아남느냐, 망하느냐 하는 위기에 처해 있던 1972년에 장경국(장징궈) 행정원장은 정치적 개방성을 점차 확대하면서 민주화의 토대를 만들어나갔다. 장경국은 경제 면에서 10대 건설 계획을 내걸고, 1973년에서 1978년에 걸쳐 50억 달러에 달하는 대투자 계획을 실시했다. 우리나라에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킨 시기하고 똑같다. 신기하더라. 수출입국(輸出立國) 방침을 세운 것도 양쪽이 거의 똑같다. 10대 건설 계획은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사회 간접 자본 투자와 중화학 공업 투자로 나뉘었는데, 첫해에 국제 석유 파동이 터져 계획이 일부 변경됐다. 그러나 일관 제철 공업, 석유 화학 공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공항, 철도, 도로, 항만 시설 등 6개의 대규모 사회 간접 부문 투자도 1979년에서 1980년 사이에 완성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대만은 1980년에서 1989년에 걸친 10개년 계획을 세워 기계, 정보, 전자, 자동화 설비 산업을 육성했다. 그 시기에 대만에 다녀온 사람들도 많이 이야기한 것인데, 대만과 한국은 여러 면에서 대비됐다.


▲ 1970년대에 대만도 한국처럼 중화학 공업화에 힘을 쏟았다. 사진은 이 시기 대만을 이끌었던 장징궈(1940년대 초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스


중화학 공업화 위해 유신 쿠데타? 박정희도 그런 얘기는 안 했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 쿠데타와 중화학 공업화 문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나.


서중석 :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만들면서 ‘유신 체제라야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런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972년 10.17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발표한 대통령 특별 선언 중 경제와 관련된 건 뒷부분에서 “경제 활동의 자유 또한 확고히 보장할 것”, 이건 사기업의 활동을 확고히 보장하겠다는 이야기였는데, 이렇게 말한 게 전부다. 헌법 개정안 제안 이유서에서 박정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안정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정변이 일어나면 예컨대 물가가 막 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쨌건 그 정도만 이야기했다. 1972년 12월 27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박정희는 농공 병진 정책으로 모든 국민에게 일터가 보장되는 정치를 펴나가고 사회 보장 제도를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이게 취임사에 담긴 경제 정책의 전부였다. 좋은 소리만 써놓은 것이다. 여기에 중화학 공업 같은 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유신 체제에 진입할 무렵에는 이렇다 할 노동자 파업도 거의 없었다. 중화학 공업에서 큰 규모의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는 건 6월 항쟁 직후인 19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 때 아닌가. 어쨌건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만들 때 ‘유신 체제라야 경제 또는 중화학 공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 사람은 선거 때마다 경제 발전을 약속하지 않았나. 그런데 또다시 경제 발전을 내세우면서 그것 때문에 유신 체제로 가야 한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기도 하고 식상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경제 발전과 유신 체제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하고,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유신 체제에서 국민들에게 유일하게 선물을 줄 수 있었던 게 경제였다는 건 구별해야 한다.


‘경제 때문에 유신 체제로 간다’고 하면 야당이나 언론,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았을 것이다. 총통제 문제가 논란이 됐던 1971년 선거를 봐도 이런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1950년대부터 경제 자립을 이루려면 중공업이 발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도 중화학 공업 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박정희 정권은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67∼1971년)에 섬유, 합판, 가발, 신발류 등의 수출과 연관된 경공업 발전에 치중하면서도 중화학 공업에도 눈을 돌려 석유 화학, 기계, 전자, 자동차 산업을 육성했다. 유신 쿠데타 이전에 이미 그랬다. 중화학 공업화를 상징하던 포항종합제철은 1970년에 기공식을 했다(완공 시기는 1973년). 또 중화학 공업의 대표적 기업으로 당시 이야기되던 곳 중 하나인 한국비료를 비롯한 비료 공장들도 이미 건설됐거나 건설 중이었다.


중화학 공업화는 일본, 미국, EC(유럽공동체, EU의 전신)에서 공해 문제, 임금 상승, 유가 폭등 등으로 사양화된 일부 중화학 산업이 한국과 같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는 국제 환경도 계기가 됐다. 그와 함께 이 시기에 와서 차관 등 국제 자본의 이동이라든가 기술 이동, 이건 포항종합제철 같은 경우를 단적인 사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어쨌건 그런 기술 이동이 전에 비해 훨씬 용이해진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것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대만이건 한국이건 노동 집약적 산업으로는 수출 증대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었다. 수출을 이제 더 큰 규모로 해야겠는데 노동 집약적 산업 가지고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런 것만큼 중요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 덧붙인다면, 이 무렵 미국이 한국에서 들어오는 섬유류 수입을 제한했는데 이것도 약간은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그러한 변화의 필요성과 추세 등이 작용해서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 박정희는 취임사에서 “나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 시대의 막을 올리고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건 그 기간이 1972년에서 1976년까지니까 당연히 1972년 이전, 그러니까 유신 체제 이전에 작성된 것 아닌가. 제철, 비철 금속, 전자, 기계, 조선, 화학 등의 중화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산업 고도화 정책이 이때 채택됐다. 유신 쿠데타 이전에 이미 이렇게 다 해버렸다, 이 말이다.


그리고 김정렴 회고록을 보면, 중화학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한 건 1971년 미군 1개 사단이 철수한 후 박정희가 야심에 찬 방위 산업 건설 의지를 가졌던 것과 관련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려면 중화학 공업화를 해야 했다는 것인데, 학자들 중에는 ‘이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중화학 공업화와 방위 산업 건설이 꼭 같은 건 아니다’, 이렇게 쓰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경제통이던 김정렴은 박정희의 야심에 찬 방위 산업 건설 의지가 중화학 공업화에 크게 작용했다고 이야기한다.

중화학 공업화 뒷받침한 중동 건설 붐은 유신 체제와 무관

유신 체제가 없었으면 경제 발전도 없었다? 위험한 논리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공업화 추진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많이 거론되는 게 1973년 이른바 중화학 공업화 선언인데, 1971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미 그에 관한 방침을 천명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아울러 유신 쿠데타 이후 중화학 공업화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동 건설 문제다. 유신 체제와 중동 건설의 관계, 어떻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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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 박정희는 1973년 1월, 모든 사람이 잘 아는 연두 기자 회견에서 유명한 선언을 한다. “우리나라 공업은 이제 바야흐로 중화학 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 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1971년 취임사에 이어 중화학 공업 시대 이야기를 이때 다시 한 것이다. 어쨌건 많은 사람이 연두 기자 회견의 이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정희 정권은 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신설하고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출범시켰다. 1974년에는 국민투자기금법을 마련해 중화학 공업 분야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그와 함께 각종 감면 혜택의 특혜를 줘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1973년 오일 쇼크로 전 세계가 불황을 맞고 한국도 그 영향을 받게 되지 않나. 그런 속에서 악성 인플레이션이 또 작용해 1974년부터 2년간 중화학 공업 건설 계획이 동면 상태에 들어가고 말았다.


예전에 설명한 것처럼 중화학 공업화는 1976년에 들어서서 수출과 내수 경기 회복세가 뚜렷해진 것과 함께 중동 건설 붐과 맞물리면서 본격적으로 불붙게 된다. 여기서 중동 건설이 제일 중요했다. 이 시기에 엄청나게 경제가 좋아진 건 1974년에 시작되고 1975년부터 거세게 바람이 분 중동 건설 호조로 외환 사정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오일 머니로 중동 건설 붐이 엄청나게 일어나는데 한국이 여기에 아주 적절하게 편승한 것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74년 그해에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이었는데 이때 건설 수주액이 8900만 달러였다. 이것이 1975년에 7억5100만 달러로 급증했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76.1퍼센트씩 성장해 1980년에는 무려 82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에 전체 수출액에서 중동 건설 수주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에서 60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면서 무역 적자도 대폭 줄어들고, 중동 건설 경기가 바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걸 보면 유신 체제 때문에 중화학 공업이 발전한 게 아니다. 중동 건설은 유신 체제하고는 상관이 없었다고 본다. 박정희 정권이 중동 건설을 지원한 것, 그건 김종필 정권 또는 김대중 정권이 등장했더라도, 즉 다른 누가 정권을 맡았더라도 그 정도는 지원했을 것이라고 본다. 중동 건설 경기를 이끌어간 건 정부가 아니었다. 현대를 비롯한 기업들이 이끈 것이다. 유신 체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중동 건설에 대한 그 정도의 정부 지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동 건설 경기는 중동 국가들의 건설 정책과 한국 건설 기업들의 임기응변 능력을 비롯한 체질, 성격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면서 이뤄진 것이다. ‘빨리빨리’가 양쪽에 모두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말이다.


그러면서 1976년경부터 중동 건설 진출로 들뜬 상황에서, 그리고 중동 건설로 기업의 재무 구조가 크게 개선된 상태에서 재벌들이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었다. 그전에는 정부가 독려해도 중화학 공업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던 재벌들이 이때는 재벌 판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화학 공업 부문에 일제히, 너나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중화학 공업이 큰 활황을 맞이한다. 이러한 중화학 공업 활황은 중동 건설 붐과 양대 축을 형성하는데 그게 또 1976년, 1977년의 경제 성장률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핵 개발’ 박정희는 자주의 화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정책 

▲ 박정희 집권기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1995년 작품). ⓒ우진필름

프레시안 : 더 짚었으면 하는 문제가 있다. 중화학 공업화, 방위 산업 건설과 자주 국방 문제, 핵 개발 같은 것을 한 묶음으로 제시하면서 유신 체제의 문제점을 희석하는 주장을 여러 차례 접한 적이 있다. ‘자주 국방이라는 건 필요한 것 아니었나. 핵 개발 역시 자주성 확보를 위해 필요했다. 그러한 것들의 밑바탕에는 중화학 공업화와 방위 산업 건설이 있었다. 이 모든 걸 주도한 유신 체제 시기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는 자주성 측면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 큰 틀에서 보면 이런 주장이다. 시중에서 많이 팔린 소설 중 일부에서도 이런 논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자주성을 지키고자 핵 개발을 시도한 박정희는 미국이라는 골리앗에 맞선 다윗 같은 존재였고, 그러다가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식이다. 이런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자주 국방을 해야 한다는 논리 자체를 부인할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수반해 일종의 전체주의적인 병영 체제, 학생 사회에서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감시하는 체제, 빈틈없이 옥죄는 체제를 만들지 않았나. 그렇게 가게 하는 데 그게 기여했다는 점을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 시기에 이순신 동상을 아주 많이 세운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다. 이순신 장군이 훌륭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다만 박정희는 이광수의 책을 읽은 것을 계기로 이순신 장군이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광수의 책은 우리나라가 만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이순신 장군 같은 위대한 분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에, 그러니까 시쳇말로 우리 민족성이 글러 먹었다는 점에 상당히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중에 식민 사관 이야기를 내가 많이 할 텐데, 어쨌건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책은 박정희가 식민 사관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것에 또 하나의 터전을 마련해줬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우리가 존경해야 하는 인물이고 유비무환도 중요한 것이지만, 도대체가 유비무환을 내세워 그렇게 지독한 병영 체제를 만들면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그렇게까지 많이 세운 건 유비무환을 잘못 사용한 것 아닌가.


북한에 대해 적절하게 국방 정책, 안보 정책을 쓰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건 김영삼 정권이건 김대중 정권이건 노무현 정권이건, 즉 어떤 정권이건 다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수준을 넘어서서 다른 정치적 목적으로 그걸 이용하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런데 1970년대에, 특히 1975년 이후에는 그런 면이 너무 심하게 노정됐다.


핵무기 문제의 경우 오늘날 북핵에 대해 남쪽 사람들의 감정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난 이 문제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감정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나하고는 원천적으로 맞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전에 북한 관리들하고 이야기하면서 느낀 것이기도 한데 한반도에서는 비핵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일본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고 한반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 남한도 북한도 절대로 핵 무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핵의 경우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한국이 북한에 적절한 보장을 해주는 것을 통해 북한이 핵무장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고, 그걸 통해 북한의 핵무장을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적절한 정책을 미국, 일본이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썼느냐고 하면 난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박정희의 핵 추진 정책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정책이었다고 난 본다. 그건 당시 미국의 핵 감시 체제를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핵무기를 확보한 다음에 그걸 어디에다가 쓰려고 한 것이냐, 이 말이다. 박정희가 이런 여러 문제를 깊이 고려하면서 핵무장을 추진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고 본다. 핵무기 개발 문제에는 박정희 개인의 성격이 많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일부에서는 박정희의 핵무기 개발을 과대하게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핵 개발이 그렇게 상당한 수준으로 갔다고도 난 안 본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북핵 문제와 관련해 나타나는 이상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통일되면 그거 어차피 우리 것 아니냐’는 논리로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암암리에 긍정하는 경우도 그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직한 이야기인가 하는 판단과 별개로, 강대국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북핵을 주시하는 한반도에서 ‘통일 후 북핵 접수’라는 구상이 실현 가능한 그림인가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주변국들이 많이 갖고 있으니 우리도 하나쯤 갖고 있어야 덜 불안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서중석 : 런 주장들은 이성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다른 문제들도 그렇지만 특히 이 문제에서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게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핵을 쓸 수가 없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자. 미국이 한반도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고, 미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핵을 많이 가진 나라인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한반도와 맞닿아 있다. 또 일본은 많은 핵무기를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나라다. 이런 상황인데, 핵무기를 만들어서 어디하고 핵전쟁을 하자는 것인지 난 그것도 도무지 모르겠다. 한반도는 핵을 갖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지역이다. 핵무기를 보유하면 주변 여러 나라의 경각심만 강하게 불러일으키게 된다.


한국은 핵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평화로 주변 강국들을 통제해야 한다. 거기서 헤게모니를 발휘해야 한다..

김덕련 전 기자
<2015-10-14>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핵 개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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