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0> 유신 쿠데타, 열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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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유신 체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나 시민의 양식(good sense)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 추종 세력으로서도 이 사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유신 체제를 대놓고 옹호하기보다는 억압, 고문, 그로 인한 억울한 죽음 같은 문제들에서는 고개를 돌리면서 다른 걸 내세우는 방식으로 유신 체제의 문제를 슬쩍 덮으려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서중석 : 박정희 유신 체제 복무자와 그것에 협력한 수구 냉전 세력, 뉴라이트는 박정희 유신 체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 이처럼 박정희 1인 체제를 비호하는 데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주장이 ‘독재는 문제가 있지만 그 시기에 경제 발전을 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줘야 한다’, 이것이다. 그런 논리의 바탕에는 상당 부분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독재가 필요했다’는 주장이나 ‘박정희 독재가 경제 발전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사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걸 일부 진보 학자가 더 주장해버렸다. 그런데 박정희 유신 체제가 경제 발전에 유용했는지 여부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1980년대 초까지 이어진 심각한 경기 침체 불러온 유신 정권
프레시안 : ‘박정희 독재가 경제 발전을 가져왔다’는 논리대로라면 유신 쿠데타 이후 경제 성장률이 눈에 띄게 높아지거나 경제 구조가 질적으로 개선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림이다. 실제로 어떠했나.
서중석 : 박정희가 1972년 10.17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제3공화국 헌법대로 재임했다면 1975년에 임기가 만료됐을 것이다. 1973년에서 1975년까지 3년간의 경제 성장률을 한 번 살펴보자. 물론 본격적으로 다루려면 정책과 여러 가지 국내외 상황을 포함해 논의를 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경제 성장률로만 보면 1973년에 14.1퍼센트, 1974년에 7.7퍼센트, 1975년에 6.9퍼센트였다. 박정희가 체육관 대통령에 취임한 때가 1972년 12월 27일 아닌가. 1973년의 경제 성장률 14.1퍼센트는 유신 체제였기 때문에 이렇게 나왔다고 보기만은 어려운 점이 있다. 그 이전의 경제적 여건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1974년과 1975년은 별로 좋지 않았다. 7.7퍼센트, 6.9퍼센트는 당시 상황에서 너무 낮은 성장률이었다.
이건 중국이 한 해 10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다가 8∼9퍼센트로 낮아지자 ‘굉장히 낮아졌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와 관련해 혼란을 일으키는데, 1980년대 초반 어떤 경제 전문가가 나한테 그러더라. “한국은 한 해에 최소한 8퍼센트 내지 9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하지 못하면 큰일 난다.” 그게 당시 최소한이었다. 그 시기 한국 경제 여건을 감안하면 이러한 성장률은 박정희가 체육관 대통령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달성했을 것이라고 난 본다.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1975년에 직선제를 해서 김종필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즉 체육관 대통령 박정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1979년까지 대통령을 맡았다면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경제 성장률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1976년에 14.1퍼센트, 1977년에 12.7퍼센트였는데 1978년에 9.7퍼센트로 많이 떨어졌다. 1979년에는 6.5퍼센트로 더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1980년에 가면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다.
1976년, 1977년의 경제 성장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중동 경기와 그것의 후속으로 일어난 재벌들의 중화학 공업 과다 중복 투자였다고 볼 수 있다. 중복 투자를 막 하니까 경제 성장률 수치 자체는 높아질 것 아닌가. 그런데 이와 관련해 많은 연구자가 이중 잣대로 자신한테 편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어떠한 이중 잣대를 말하는 건가.
서중석 : 무슨 말이냐 하면 전두환 정권 말기, 노태우 정권 초기인 1986년에서 1988년까지 우리 역사상 최고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지 않았나. 그래서 당시 ‘단군 이래 최고 경기’라고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전두환의 공로가 아니라고 다들 말한다. 그건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효과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그런데도 1976년, 1977년의 높은 경제 성장률은 마치 박정희의 공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1986년에서 1988년까지의 호경기가 3저 현상에서 비롯했다고 하면, 물론 전두환은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1976년과 1977년의 고도성장에서 중동 건설 경기와 중화학 공업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경제가 1978년부터 하강 곡선을 그려 1979년에는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만큼 경기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 여파로 1952년 이후 처음으로 1980년에 -5.2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통계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나오는 것도 있긴 한데, 이해에 마이너스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1980년의 심각한 경기 침체는 1970년대 후반 경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으로 유신 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관련이 깊다.
사실 박정희 유신 체제는 국민에게 줄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할 의지도 없었고, 부동산 투기는 정부에 의해 묵인, 조장되는 형편 아니었나. 이런 상태에서 1970년대 내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됐다. 이 때문에도 경제 성장이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그것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위적으로라도 수출액을 늘려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야 하는 것이었고, 성장률도 높여야 했다. 이 때문에 무리한 경제 정책이 뒤따랐다. 중화학 공업의 과다 중복 투자는 그러한 정책의 대표적 예였다.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지 않나. 야당인 신민당이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유신 체제인데도 여당이 패배하고 그리하여 유신 붕괴의 서곡이 울려 퍼지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경제가 큰 역할을 했다. 그중 하나가 노풍(통일벼 계열 신품종) 피해였는데, 이 노풍 피해도 무리한 의욕의 소산이었다.
재벌 공화국 탄생으로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정책
프레시안 : 노풍 피해는 전염병 피해인데 그것까지 정부에 책임을 묻는 건 야박한 것 아니냐고 반론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서중석 : 노풍 피해는 자연재해 때문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유신 체제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그러한 큰 피해가 발생했을까? 바로 그걸 물어봐야 한다. 박정희는 식량 증산을 직접 독려했다. 이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어쨌건 노풍이라는 새로운 다수확 볍씨가 나왔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 정부는 시험 단계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1978년에 여러 가지 장려 정책까지 써가면서 이걸 심도록 했다. 농민들은 그전에 정부가 권장하는 통일벼를 심어 수지를 맞춘 적이 있지 않았나. 그러니 노풍도 막 심어버린 것이다. 사실 통일벼가 나오고 나서 처음 몇 년 동안 농민들은 통일벼를 잘 심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시간을 두고 통일벼를 심었던 것이다. 그런데 노풍의 경우 나오자마자 1978년에 그렇게 많이 심어버렸는데, 바로 그해에 도열병으로 피해 농민이 속출했다. 그게 선거 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재벌 중심으로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킨 것도 그렇고 이러한 노풍 피해도 과도한 성과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조급한 경제 성장률 달성, 조급한 식량 증산 같은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제일 중요한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외국 사람들이 한국 경제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하는 것이다. 뭐냐 하면, 가장 손쉽게 경제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재벌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박정희가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편이 정경유착을 하기도 편하고 정권이 재계를 통제하기도 좋지 않나. 그래서 중화학 공업화를 계기로 재벌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중화학 공업화 이후의 재벌은 그 이전의 재벌과 규모가 다르다. 이러한 재벌 공화국 탄생, 부동산 투기 조장 같은 건 다 경기를 띄워 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유신 정권의 정책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점들을 많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은 재벌 중심의 경제 정책이나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과감한 수술이 필요한 때였다. 물론 중화학 공업 육성, 그건 난 맞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중화학 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면서도, 대만 사례 같은 것도 참작해 건실한 방향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도한 성과주의, 장기 집권의 타성과 관료주의, 그에 더해 이를테면 특정 지역 출신들끼리 다 해먹는 식의 패거리주의, 과욕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이 시기에 경제가 많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경제팀도 이 점은 마찬가지더라. 비서실장이자 경제통이던 김정렴도 ‘우린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고 ‘서강파'(서강대 경제학과 출신들을 중심으로 1970년대 경제 정책을 주도한 세력)도 그렇다.
기민성을 상실해 실기한 박정희와 달리, 기민성을 상실했다는 게 난 아주 중요했다고 보는데, 1975년에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상황이 어떠했을까. 난 당시 수출 위주 정책이나 중화학 공업 정책은 계속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데, 1975년에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면 그러한 기존의 경제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도 경제 현실을 직시해 새로운 추진력을 가지고 개혁이나 구조 조정을 더 빠르고 과감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것이긴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1980년에 대규모 중화학 공업 구조 조정을 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더라도, 유신 체제가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고 제3공화국과 유사 파시즘 체제 또는 한국형 파시즘 체제인 박정희 1인 체제는 전혀 다른 정치 체제이지만, 1960년대 전반기의 경제하고 1970년대 말의 경제가 비슷한 점이 있다. 발전이라는 면으로만 본다면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점도 유심히 짚어봐야 한다.
박정희는 경제의 신? 치명적인 오해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1961년에서 1963년까지 군사 정권은 국토 개발 사업, 전력 등 인프라 조성 사업, 장기 경제 개발 계획 추진, 공무원 신규 채용, 환율 정책 등 경제 정책에서 장면 정부의 경제 정책을 거의 다 이어받았다. 그러면서도 농어촌 고리채 정리도 실패했고, 화폐 개혁은 더 크게 실패했고, 거기다가 4대 의혹 사건까지 일으켰다. 4대 의혹 사건, 이건 정권 논리 때문에 생긴 건데 4대 의혹이 상징하는 부패와 구악 뺨치는 신악, 그리고 경제적 실패가 얼마나 심각했나. 또 결정적으로 증권 시장 운용까지 힘들게 만들지 않았나. 이런 것들 때문에 군사 정권은 경제적 치적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다. 대선과 총선이 있었던 선거의 해인 1963년만 가지고 이야기해도 식량 사정 악화, 외환 위기가 3분(설탕, 밀가루, 시멘트) 폭리 등과 겹쳐서 서민 경제가 참 나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경제가 1964∼1965년에 수출 중심 정책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런데 이 경우도 난 생각해볼 게 있다고 본다. 장면 정권은 집권 몇 개월 만에 수출 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환율 문제에서 결단을 내렸다. 장면 정권 하면 우유부단했다고들 하지만 이때는 결단을 내렸다. 환-달러 환율을 두 배로 올려 1300 대 1로 만들었다. 이게 1961년 2월 1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환율에 대한 결단을 내리는 데 여러 해 걸렸다. 1964년 5월 3일에 가서야 원-달러 환율을 255 대 1로 조정한다. 이런 걸 보더라도, 박정희 정권이 군사 정부 시절부터 경제 문제를 잘 풀어갔다고 그 당시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를 망친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까 1963년 선거에서 그런 표가 나온 것 아니겠느냐, 이 말이다. 1963년 선거에서 확실히 이겼다고 하기 어렵지 않나.
어쨌건 1964∼1965년에 수출 중심으로 가닥이 잡혀서 수출 산업에 여러 가지 지원을 해주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고 일본, 미국, 베트남 등에서 자본이나 차관, 현금 등이 들어오면서 경제가 호전돼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기에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기간과 박정희 체육관 대통령 시기를 성장률로만 비교한다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1967년에 6.6퍼센트, 1968년에 11.3퍼센트, 1969년에 13.8퍼센트, 1970년에 7.6퍼센트, 1971년에 8.8퍼센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는데 이건 유신 체제 시기의 성장률과 큰 차이가 안 난다. 거기다가 1966년에 12.7퍼센트의 성장률을 기록한 것까지 집어넣으면 더 그렇다.
내 말은 고도성장은 개발 독재 시기가 아닌 제3공화국 시기에 시작됐고, 그것도 성장률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국내외 경제 여건과 경제 정책의 잘잘못에 따라 해마다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집권한다고 해서 갑자기 성장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경제 논리, 국내외 경제 여건, 거기에다가 경제 정책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 중 마지막 것은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어쨌건 이런 것들이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지금도 그 점은 비슷한데, 어느 한 사람이 집권한다고 해서 경제가 갑자기 좋아지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박정희를 경제에는 아주 귀신이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리고 개발 독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박정희 개발 독재가 한국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런 식의 무조건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 여러 자료를 가지고 계속 설명한 것이다.
유신 체제 붕괴 밑바탕에 있었던 건 다름 아닌 경제 문제
프레시안 : 박정희 집권 18년을 거치는 동안 한국 경제는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들도 안게 됐는데, 특히 유신 체제 후반기 상황은 그러한 박정희식 경제의 귀결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서중석 : 거듭 강조한 것처럼 1978년 이후의 경제 불황은 농작물 피해건 중화학 공업의 과다 중복 투자건 박정희로 상징되는 유신 체제의 잘못된 경제 정책에서 비롯한 면이 많다. 박정희가 유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급속한 성장 정책을 밀어붙인 것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늘날 박정희 신드롬에서도 제일 큰 게 그러한 성장 제일주의 아닌가. 하여튼 재벌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재벌 위주의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 심해졌다. 또 1978년과 1979년에 부동산 투기 과열 현상이 엄청나지 않았나. 이것 역시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이 빚어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당시 정부가 서민을 위한 주택에 대한 투자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부동산 시장을 막 부추기지 않았나. 그러면서 부동산 투기 과열 현상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결국 성장 정책의 일환이 아니었느냐, 이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은 한 해에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던(이승만 정권 -> 허정 과도 정권 -> 장면 정권) 1960년에도 없었던 굉장히 큰 경제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1978년 이후의 경제 불황은 박정희로 상징되는 유신 체제의 잘못된 경제 정책, 기민성을 잃고 계속 성장만 시키려고 했던 것에 큰 잘못이 있었다. 다시 말해 유신 체제였기 때문에 경제가 더 발전했다는 근거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유신 체제였기 때문에 유신 말기에 경제가 악화돼 1978년 12.12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고, 결국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해 1979년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남으로써 유신 체제가 붕괴하는 데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할 따름이다. 유신 체제의 붕괴 과정은 개발 독재론이 갖고 있는 허상, 그 허구성이 아주 잘 드러나는 과정이라고 난 보고 있다.
김덕련 전 기자
<2015-10-21>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는 ‘경제의 신’? 경제 실책으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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