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
MB정부 국편위원장 지낸 노학자의 일갈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 침묵깨고 비판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주입식 강요하나
국정화 취소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던 정옥자(73·사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22일 “국정교과서를 만들더라도 (박근혜 정부의 남은 기간인) 2년짜리밖에 안 된다. 애들한테만 큰 피해를 주게 될 것”이라며 “국정화를 취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1981년 서울대 국사학과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임용됐던 그는 조선 후기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이며, 대표적인 중도적 역사학자로 평가된다. 정 명예교수는 이날 <한겨레>와의 전화 통화에서 또 “역사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을 학생들한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길인데 지금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한가지 해석만 강요하려 드는 것은 시대 역행”이라고 말했다.
정 명예교수는 국사편찬위원장(2008.3 ~2010.9)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 내려가 그동안 언론 인터뷰나 글쓰기 등 공적인 활동을 스스로 삼가왔다. 그는 이날도 “인생에서 만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은퇴 후에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너무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정 명예교수는 현재의 역사교과서를 부실투성이라고 몰아붙이는 것부터 문제라고 지적했다. “교육부에서 그때그때 검정위원회를 만들어 하던 검정 작업을 국편에서 (2011년) 맡으면서 준비 부족 등으로 오탈자나 사실 오류, 역사관 문제 등을 초기에 제대로 못 걸러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정 과정을 거쳐 지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극우세력들은 수정되기 전의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문제를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잘못된 주장에 편승해서 정부가 이른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국정으로 가면 무슨 지고지순한 교과서가 나오는가. 대부분의 필자들이 다 안 쓰겠다고 하고, 역사학계가 반대하는데 잘될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현 정권 집권 동안인) 2년짜리밖에 안 된다. 결국 아이들한테 굉장한 피해를 주게 될 것이다. 애들을 상대로 정치권이나 어른들이 뭐하는 짓거리인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고 질타했다.
“역사학계를 좌파로 몰아붙이는 건
스스로 못된 우파라 말해주는 것”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과 과가 반이다. 먹고사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그 구심점이 됐던 것은 공이다. 과는 독재뿐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만들어놓은 점이다”라며 “딸로서 아버지를 높이 평가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공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화 너머 들려오는 노학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정부의 국정화 조처는 한마디로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라는 건 기본적으로 사실을 얘기해야 하고, 그 사실에 입각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얘기해주면 아이들도 알아듣고 판단하는 것이 교육의 길이다”라며 “지금이 도대체 어떤 시대인데 애들에게 주입식으로 하나의 해석만 강요하고 강박하려고 드나.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 같아서 참 딱하다”고 밝혔다.
사관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제 평화사관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와서 민족주의 사관만 고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유물사관에 동조할 수 있겠는가.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똑같은 힘의 논리다. 우리가 언제까지 강대국의 논리를 좇으면서 부국강병이 최고라는 식으로 할 것이냐. 이젠 둘 다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족 이기주의가 아니라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평화사관, 문화사관으로 가야 한다. 그런 것들을 다양하게 학생들한테 가르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국정화 추진 중단을 강하게 촉구했다. “국정으로 하면 올바른 교과서가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절대로 보장이 안 된다. 오히려 국민들이 국정으로 가는 정부의 의도를 불순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니냐”며 “국정을 취소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정 말고 검정으로 가되 명확하면서도 여러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검정기준을 만들어서 국편에 그 일을 맡기면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역사학자 90%가 좌파”라는 여당의 주장에 대해서도 정 명예교수는 “국민들의 생각이나 상식, 교양이 정치인보다 앞서가고 있는 마당에 정치인들이 색깔론을 칠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유치하다”며 “역사학계를 좌파로 몰아붙이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가짜 우파에다가 못된 우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파도 양질의 우파, 보수도 양심 보수가 있어야 국가가 잘된다. 누구보고 좌파라고 하는지 너무나 가소롭고 한심하다”고 비판했다.
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2015-10-23>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