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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발행 교과서에 정부 비판 넣을 수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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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의 역사학자 한영우 교수 작심 인터뷰


스승의 권유로 30대 초반 어쩔 수 없이 집필 참여
어용교수 소리라며 학계서 완전 외톨이 취급 힘들어
“정도전 성리학 좌파로 묘사한 내책 볼온도서로 찍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내가 역사학계에서 ‘정도전 연구’ 1세대야. 지금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급진적인 개혁파의 모습이 내가 연구했던 정도전의 모습이지. 교과서를 한창 집필하던 1973년, 첫 책(<정도전사상의 연구>)이 나왔는데 (내가 국정교과서 집필로 어용학자란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 속에서)어떤 분이 내가 ‘박정희를 존경해서 이 책을 썼다’는 분석을 했어. 이성계가 박정희에 해당하고, 정도전이 김종필에 해당한다는 거지. 이게 말이 돼? 더 웃긴 건 정부에서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했다는 거야. 내가 책에서 ‘정몽주를 성리학 우파라고 한다면, 정도전은 성리학 좌파’라고 비유했거든. ‘좌파적인 시각에서 쓴 책이다. 저자 한아무개가 어떤 사람이냐’ 해서 조사를 해보고 나니 어용교수로 나왔다는 거야. (웃음) 교과서 써놓고 아주 희한한 경험을 한 거지.”


안녕하세요, <한겨레> 24시팀 허승 기자입니다. 지난 19일, 저는 박정희 유신 정권 아래서 발행된 첫번째 국정 역사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정부가 유신 미화 내용을 무단으로 집어넣었다’는 당시 집필자들의 증언을 보도( ▶바로가기 : [단독] 첫 국정교과서 집필자 “난 어용학자로 만들어졌다” )한 바 있습니다. 위의 일화는 한영우(77) 서울대 명예교수가 인터뷰 과정에서 저에게 펼쳐놓은 국정교과서와 얽힌 ‘웃픈’추억의 한 자락입니다. “국정교과서를 만들게 되면 집필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어용학자’란 비판을 받아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어, 생각있는 학자들은 국정교과서 집필에 아무도 참여하지 않으려 할 것”이란 걱정을 하던 중 나온 얘기입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저는 첫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던 분들을 접촉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필진 세 사람 중 김철준 전 서울대 교수(1989년 별세)를 비롯해, 당시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던 20여명의 연구진 중 다수가 이미 세상을 떠났더군요. 당시 집필 과정을 생생히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사’단원을 집필한 한영우 교수와 근·현대사 단원 집필자 윤병석(85) 인하대 명예교수 뿐이었어요. 고령인 윤 교수는 최근 건강이 악화돼 긴 인터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 한 교수는 “현재는 학교를 떠나 홀로 조용히 공부만 하며 살고 있다”며 인터뷰 자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용학자’로 손가락질 당해야 했던 과거의 경험 탓이었을까요. 정치적 갈등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현재의 국정화 논란에 깊이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란 소명 때문이었을까요. 1974년 첫 국정교과서 편찬에 관여한 마지막 ‘증언자’로서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는지, 결국 한 교수는 수차례에 걸쳐 긴 인터뷰에 응해주었습니다. 나중에는 42년 전 오래된 일기장에 적힌 기록을 찾아내 저에게 먼저 연락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하나에서라도 작은 ‘왜곡’도 남기지 않으려는 역사학자의 집념을 엿본 듯 했습니다. 팔순을 앞둔 노학자는 저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우리 교과서에 녹아있던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에 몸을 던졌던 40년 전 30대 초반의 젊은 학자로 돌아간 듯, 치열하게 우리 현대사의 ‘그림자’를 복기해냈습니다. 역사 교육의 반민주적 퇴행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좁은 신문 지면에 다 담지 못 했던 한영우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을 여기에 옮겨 적습니니다.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또다른 ‘사관’, 기자로서의 제 마음가짐도 다잡아봅니다. ^^





-당시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나는 원래 집필자가 아니었다. 당시 교과서 연구진과 집필진에는 학계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모여있었다. 30대 초반에 갓 전임강사가 된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었다. 애초 조선사 부문 집필자로 내정되신 분은 나의 은사님이셨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필에 참여하실 수 없게 되면서 나에게 집필을 권유하셨다. 학자라는 게 대통령이 시키는 건 거부해도 은사님 부탁은 거절을 못 하지 않나.”


-교과서가 국정화될 당시 학계 분위기는 어땠나.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시 분위기와 상황을 알아야 된다. 새 교과서 편찬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정부가 아닌 학계였다. 당시 검·인정 교과서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나도 그 교과서로 배웠는데, 책을 읽고 나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개질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 4학년이던 1960년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4·19 이후 학계에선 기존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맹렬히 일어났다. 연구 성과도 엄청났다. 학계에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이 넘쳐났다. 이것이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5·16 이후 군사정부는 민족주체성과 국가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었다. 문화재 보호 운동도 벌이고, 이순신 장군 등 민족영웅 성역화도 진행하고 있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는 학계의 요구와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박정희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학계의 요구를 문교부가 받아들여 새 교과서 편찬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국정교과서의 원래 취지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뜻인가.
“처음부터 국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학자들은 국정에 반대했다. 학자들은 검·인정 체제 안에서도 국사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유신이 터지고 교과서가 국정으로 전환됐다. 처음에는 민간 주도로 교과서 편찬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문교부는 1969년 이기백·이우성·한우근 선생님 같은 저명한 사학자들에게 국사 교과서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부탁했고, 그 연구보고서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논의와 연구를 거듭해 1972년 5월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출범했다. 여기에는 서울대 김철준·한우근 선생과 연세대 홍이섭·백낙준 선생 등 당시 최고 권위자라고 불린 분들이 참여했다. 그런 쟁쟁한 분들이 모여 있었는데도 의견이 어긋나지 않았다.‘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가르쳐야 된다’ ‘수업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등 국사 교육을 강화하자는 것이 기본적인 방향이었다. 기존 교과서로는 안 되니 교과서 내용을 혁신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에 합의한 것이지 결코 국정교과서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새 교과서 편찬 작업이 이뤄지던 중에 유신 체제가 된 것인가.
“기초작업들이 진행되던 중인 1972년 10월 느닷없이 유신이 됐다. 유신 체제가 되면서 국정으로 해버리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학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문교부가 밀고 나갔다. 그러면서 유신교과서가 됐고,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은 ‘어용교수’라고 낙인이 찍혔다..


유신 관련 내용은 집필자가 쓴 것이 아니다. 근·현대사를 집필한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는 그 내용을 쓰지 않았다. 윤 선생님은 집필을 거부하셨다. 그랬더니 문교부에서 작문을 해서 집어넣은 것이다. 우리가 쓰지도 않은 내용 때문에 현대사를 집필했든, 고대사나 조선사를 집필했든 다 어용이 돼버렸다. 사실 정부가 발행하는 교과서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넣을 수 있겠냐? 지금 국정교과서 만든다면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을 넣을 수 있겠나? 그것은 유신정권이든 민주정부든 마찬가지다.”


-졸지에 어용교수 소리를 듣고 힘드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너무 힘들었다.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학계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돼서 (학문을) 그만둘까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당시 교과서 집필한 학자들 중에 어용학자는 없었다. 다들 평생 연구만 했고 정부에서 벼슬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용교수라고 낙인이 찍힌 뒤에는 내 학문이 학문적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평가됐다.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자면, 내가 역사학계에서 ‘정도전 연구’ 1세대다. 지금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급진적인 개혁파의 모습이 내가 연구했던 정도전의 모습이다. 교과서를 한창 집필하던 1973년 첫 책(<정도전사상의 연구>)이 나왔는데, (어용으로 찍힌 뒤에)어떤 분이 이 책을 두고 내가 박정희를 존경해서 이 책을 썼다는 분석을 했다. 이성계가 박정희에 해당하고, 정도전이 김종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나? 더 웃긴 것은 정부에서는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정몽주를 성리학 우파라고 한다면, 정도전은 성리학 좌파라고 비유했다. 좌파적인 시각에서 쓴 책이라고 보고 ‘저자 한아무개가 어떤 사람이냐’ 해서 조사를 해보니 어용교수였더라고 했다더라. (웃음) 아무튼 교과서 써놓고 아주 희한한 경험을 했다. 이렇게 국정교과서가 되면 거기 참여하는 학자들은 만신창이가 된다. 정부에서 국정교과서를 만든다고 해도 생각있는 학자들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1974년 3차 교육과정 교과서의 내용은 기존과 어떻게 달라졌나.
“‘유신교과서’라고 낙인찍혔지만 전체적인 내용이 유신교과서인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부다. 그 부분을 제외하면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의 주체적인 역사관으로 서술하는 것에 더 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식민사관의 특징은 첫째 ‘한국인은 중국에 사대만 하는 자주성이 없는 민족이다’이라는 것, 둘째는 ‘한민족의 역사는 왕조가 바뀌어도 스스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이것을 뒤집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주의 사관’과 ‘발전 사관’을 기본 축으로 서술했다. 근대사 쪽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을 외세에 대한 자주성 회복과 봉건사회 극복을 시도한 혁명으로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내가 쓴 조선시대가 종전 교과서와 다른 점은, 기존 교과서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양반중심의 신분사회’, ‘농본주의’ 세가지로 기술했다. 그런데 이것은 산업화 이전 전근대 사회에서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나는 조선의 건국이념을, 첫째는 ‘대외 자주성’, 둘째 ‘민본주의’로 서술했다. 조선 초기 이성계와 정도전이 명을 상대로 요동정벌에 나선다. 결과적으로는 (내부 정치상황으로)실패하지만 이게 어떻게 사대주의인가. 또 조선은 귀족이 아닌 사대부와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건국된 나라라는 것을 강조했다. 당시 이건 혁명적인 변화였다. 정도전을 비롯해 동학, 독립운동사, 박은식, 신채호 등에 대한 연구가 다 4·19 세대가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진행한 연구고, 이런 연구 성과들이 당시 교과서에 많이 반영이 됐다. 이게 1974년 교과서의 기본 성격이다.”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당시 몰아치기로 집필을 했다. 국어하는 사람이 윤문을 해야 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앞 단원과 뒷 단원 간 호흡이 안 맞는 것도 맞춰야 되고…. 이것을 학생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또 손질을 해야 한다. 지금 학생들이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많이 대답했다는 통계를 갖고 역사 교육이 잘못됐다는 비판이 시작됐는데, 그건 역사를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침, 북침이란 용어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은 제대로 됐는데, 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쓴 게 잘못이다.


그런데 제3자가 검열을 한다는 게 어렵다. 다 콧대높은 교수들인데 ‘선생님이 쓰신 것이 틀렸다’고 말을 못하고 당시 그냥 대충 넘어갔다. 학자 세 사람 합의보기가 돼지 100마리 몰고가기보다 더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그래서 국정으로는 좋은 교과서 나오기가 힘들다. 좋은 역사책이란 위, 아래 호흡이 딱 맞아서 읽는 사람이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안 되면 나열로 끝나게 된다. 여러 사람이 합작을 하더라도 집필진의 호흡이 맞아야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교과서가 나올 수 있다. 검·인정 교과서로는 그게 가능하지만 국정 교과서는 호흡이 맞는 집필진을 꾸리는 것이 힘들다. 다행히 1974년 교과서 집필진은 전부 사제지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집필진을 그렇게 꾸리면 ‘왜 다 서울대에서 쓰냐’는 이야기가 나올 거다. 그렇다고 이 대학, 저 대학 한 명씩 배분하면 집필진 간 호흡이 또 안 맞는다. 생각만해도 골치가 아플 것 같다. 이런 어려움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교과서가 단일화된다는 점 때문인가.
“그렇다. 단일 교과서가 되면 각계각층에서 요구가 봇물 터지듯 들어올 것이다. 재계에서는 ‘왜 재벌을 비판적으로 쓰느냐’고, 군에서는 ‘왜 군인들을 부정적으로 쓰느냐’고 이런 요구 저런 요구가 봇물처럼 들어와서 집필진과 실무진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교과서를 왜 그렇게 쓰느냐’는 비판도 들어온다. 현대사에 대해서만 그런 게 아니라 고대사든 조선사든 마찬가지다. 단군조선을 빼면 ‘왜 단군조선을 안 썼느냐, 민족반역자다’ 할테고, 넣으면 ‘실증적으로 입증도 안 된 걸 왜 넣었느냐’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제기될 것이다. 자기 학설에 목숨을 거는 게 학자인데, 단일 교과서가 되면 그중 어떤 것만 정설인 것처럼 받아주고 나머지는 배제하게 될텐데 어느 누가 가만 있겠나. 그렇다고 그걸 다 넣어주려다 보면 교과서를 만들 수가 없다. 아마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런저런 압력에 정신을 못 차릴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아주 동정이 가기도 한다.


북한처럼 하나의 교시에 따라서만 역사를 해석하면 국정을 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다양한 학설을 인정하는 민주국가에서 하나만 딱 뽑아서 이것만 정설이라고 하면 그건 정부가 싸움을 부추기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 구조 위에 단 하나의 ‘표준 바이블’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교과서는 뿌리내리기가 아주 어렵다.


문제는 이쪽 저쪽에서 비판을 받다보면 교과서 자체의 신뢰가 떨어지게 된다. 이쪽 저쪽에서 비판하는 교과서를 어떻게 학생들이 신뢰하고 교사들이 신뢰할 수 있겠나. 민주국가에서 단일한 하나의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명분도 약하고 실리도 없는 것이 국정교과서다.”


-기존 검·인정 교과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지금 검·인정 교과서가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현재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북한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 역사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쓸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에서도 체제 경쟁을 하던 시절은 끝났다. 적대하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근대사를 더 긍정적으로 조명해야 한다. 물론 역사의 어두운 면, 그림자도 충분히 담아야 한다. 지금 교과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국정은 아니다. 지금 검·인정 교과서가 잘못됐으니 국정을 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이 교과서들이 집필자 마음대로 쓴 교과서가 아니라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은 교과서 아닌가. 이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그게 누구 잘못이냐. 교육부 잘못이다.


검·인정 교과서는 정부가 개입을 안 하는 교과서가 아니다. 교과서는 국정제, 검·인정제, 자유발행제가 있다. 민주국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검·인정제와 자유발행제다. 자유발행제는 완전히 집필자에게 맡기는 거고, 검·인정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지금 검·인정제는 민주국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여야가 둘로 갈려서 한쪽은 ‘검·인정 교과서가 완전히 문제다’, 한쪽은 ‘검·인정 교과서는 전혀 문제 없다’고 주장하는데, 지금은 정부도 야당도 침착하게 정말 좋은 교과서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해야 한다. 기존 검·인정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지침을 구체화하고 검·인정 절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면 된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2015-10-23> 한겨레


☞기사원문: 첫 유신교과서 집필자 “정부 발행 교과서에 정부 비판 넣을 수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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