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계 원로들이 21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연 역사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 철회 촉구 기자회견에서 안병욱 전 가톨릭대 명예교수(맨왼쪽)가 “정부는 역사와 교육에 대한 통제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현장 모르는 소리” 교사들 한목소리
“솔직히 국정 때는 학생들은 힘들고 교사들은 편했었죠.” “검정체제로 바뀐 뒤 다양한 자료를 만드는 등 수업 준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우리는 농촌 지역이어서 비문자 요소가 많은 교과서를 택하고 있죠.”
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환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어차피 8종의 검정 교과서가 있다고 해도 개별 학생이 배우는 교과서는 하나 아니냐”며 검정체제와 ‘다양성’은 무관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역사 수업을 하는 교사들은 검정체제로의 전환이 교실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 입을 모은다.
■ 교사들의 수업준비가 달라졌다
역사 교사들은 2010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 2011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가 처음으로 검정으로 전환했을 당시, 학교 수업 현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고 회상한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과서 외 별도의 수업자료를 만드는 것이 보편화했다는 것은 검정체제가 가져온 대표적인 변화다. 서울의 ㅂ교사는 “수업 준비가 천지 차이였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치려면 국정 때는 별도로 논문이나 사료를 찾아야 했지만, 검정 때는 교과서만 살펴봐도 다양한 사료 찾을 수 있어서 훨씬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서울 독산고 교사)은 “교과서 본문을 요약해서 필기하고 암기하는 수업 방식에서 교사들이 다양한 학습자료를 만들어서 사고력과 탐구력 위주로 수업하는 쪽으로 바뀐 데는 검정 교과서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고교 교사들의 경우 수능 시험이 여러 종의 교과서가 공통으로 다루는 요소에서 문제를 출제하기 때문에 다양한 교과서를 참고해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천의 ㅂ교사는 “솔직히 국정 때는 아이들한테 연도까지 달달 암기하게 했다. 국정이 아이들에게는 힘들고 교사들한테는 편했던 게 사실”이라며 “물론 여전히 암기할 부분은 많다. 하지만 검정 체제에선 교육방송(EBS) 연계교재도 8종 공통 요소 위주로 문제를 낸다. 고3은 이비에스 교재로만 수업을 한다고 해도, 한국사 교과서를 가르쳐야 하는 1·2학년 수업에서 시험과 연계해 설명하려면 교사가 모든 교과서를 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통요소 출제탓 8종 모두 참고
사고력·탐구력 위주 수업으로
수시냐, 정시냐 따라 다른 선택
‘최고 국정’ 만든다지만 독점체제
경쟁통한 검정과 비교할 수 없어
■ 교과서 간 경쟁이 질 향상을 가져왔다
교육부가 “국정 교과서를 최고 품질의 교과서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교사들은 “다양한 교과서가 나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질적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자는 “국정 교과서로 가르치다가 검정 교과서로 나왔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달랐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며 “교과서 개발할 때 1차 목표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자기주도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다. 이념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가장 채택률이 높은 ㅁ출판사 교과서의 한 집필자는 “올해 우리가 모든 단원에 6단 만화를 다 집어넣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2015년 교과서는 2011년 첫 검정 교과서보다 진일보했다. 출판사들이 채택을 놓고 경쟁을 하다 보니 서로 좋은 점들을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교과서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체제이던 2008년 다양한 교실 수업을 시도한 경험을 <나의 역사수업>이라는 책으로 펴낸 바 있는 윤종배 서울 수락중 교사는 “2000년대 국정 때는 역사 신문, 역사 뉴스, 역할극, 토론 등 학생들이 좀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모색하는 일이 교사 개개인의 의지에 달린 일이었다”며 “검정 전환으로 교과서 자체가 교사와 학생 관점에서 재미있는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달라지면서, 대다수 교사들이 다양한 수업을 시도하는 일이 일반적이 됐다”고 말했다.
■ 수시·정시 따라 교과서 선택도 달라져
국정화를 강행하는 쪽에선 검정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성을 문제 삼으며 ‘다양성 확보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검정 교과서들은 학생들의 학습 수준이나 학교가 주력하고 있는 입시 유형 등 다양한 수요에 따라 고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화되어 있다.
경북의 한 군 단위에 있는 고교 교사는 “서울에 있는 아이들하고 농촌 지역 아이들의 학습 수준이나 아이들이 흥미를 갖는 부분이 다르다. 우리는 아이들 활동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비문자 자료가 선명한 교과서를 선택했다”며 “필자에 따라 교과서를 구성한 형식이나 활용한 비문자 자료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 검정교과서가 갖고 있는 장점”이라고 했다.
대학 입시 전략도 교과서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012년부터 역사 동아리를 지도하고 있는 인천의 ㅂ 교사는 “교내 동아리를 강화하는 등 수시모집에 무게를 두는 학교는 활동 주제를 많이 갖고 있는 교과서를 채택한다. 반면 정시모집에 주력하는 학교에서는 수능 대비에 좋은, 근거 사료 제시를 잘하고 개념 정리를 잘해놓은 교과서를 채택한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2015-10-22>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