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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월 만에 “문창극, 독립유공자 손자 확인…”보훈처 “문씨 족보 다 뒤져” 유별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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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지난해 6월 첫 기자 출신 국무총리 후보로 ‘깜작 발탁’됐다가 14일 만에 자진사퇴한 문창극씨(67·사진)에게 심사 착수 1년4개월 만에 “독립유공자의 손자가 맞다”고 확정지었다.

당시 보훈처는 친일 강연 논란으로 문씨에 대한 사퇴 여론이 거세지자 뜬금없이 ‘문 후보자의 조부는 독립유공자’라는 주장을 외부에 공개해 빈축을 샀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섣부르게 공표했던 보훈처는 1년4개월간 공조직을 동원해 문씨의 ‘조부찾기’에 나선 것이다.


보훈처는 지난달 30일 문남규 선생과 문씨의 조부가 동일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족보·회고록·제적등본 및 전문가 의견 수렴을 거친 결과 같은 사람으로 판단돼 보훈심사위원회를 열어 ‘유족에 해당한다’고 의결한 것으로 21일 확인됐다.

지난 3월 보훈처는 독립운동 학자와 족보 전문가들을 불러 자문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자문회의에서 “문남규 선생이 소속돼 활동했던 대한독립단 자료와 문씨 조부의 원적지인 평북 삭주 기독교 독립운동 자료의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제기됐다.

이후에도 전문가들은 각종 문서를 검토했지만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급기야 보훈처는 1870~1956년, 1995년 이후 간행된 남평 문씨 족보 257권과 1904~1998년 만들어진 처갓집(신안 주씨) 족보 108권을 전수 조사했다. 문남규 선생의 사위 김길순 목사와 관련된 풍기 김씨 족보 1권, 김길순 목사 회고록과 제적등본까지 검토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주변에 “대한민국에 있는 문씨 족보를 전부 다 뒤졌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교형 기자 wassup01@kyunghyang.com

<2015-10-22>
경향신문

☞기사원문: 16개월 만에 “문창극, 독립유공자 손자 확인…”보훈처 “문씨 족보 다 뒤져” 유별난 노력

※관련기사

☞뉴시스: 보훈처 “문창극 전 후보자, 독립유공자 손자 맞다”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문창극 조부 대한독립단 대원설 확증 없어 (2014.6.23) 


다운로드: 보도자료(hwp)



<보도자료>


문창극 조부 대한독립단 대원설 확증 없어

국가보훈처의 무책임한 문창극 총리후보 지원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은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이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보훈처 관계자가 “문창극 후보는 총리 후보가 된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며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1989년 사망) 씨는 1931년 호주 상속을 받았으며, 생전에 “7세(1921년)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이같은 보도 직후 국가보훈처의 발표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과 문창극 후보의 조부가 동일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유은호 책임연구원은 “현재 발굴된 사료로는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대한독립단 주00 휘하 소대 대원으로 1920년(민국2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했고 이 같은 내용이 1921년 4월9일자 독립신문에 실려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국가보훈처 발표와 달리 독립신문 기사의 문맥을 볼 때 선생은 1921년이 아니라 1920년에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21년 독립신문의 기사는 대한독립단 약력으로 그간의 전공을 정리 소개한 것이며, 당시 여건상 만주나 국내의 항일운동은 사건 발생 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이나 공적조서에도 문남규 선생의 출생지나 본적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원적지가 삭주라고 주장하는 보훈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삭주 전투를 근거로 삼았다면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이라는 당시 독립전쟁의 일반적인 양상을 무시한 비상식적 해석”이라고 비판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공식 견해는 “문남규 선생은 1920년 삭주에서 전사한 것으로 판단되며 그 외 출생지 등 인적 사항은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설령 문창극 후보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그의 잘못된 가치관과 역사관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라며,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으로, 선대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더욱 언행을 조심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 참고자료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9권』, 국가보훈처, 2011.12, 157쪽.


문남규(文南奎) 
생 몰 년 : 미상~1921.1) 
출 신 : 미상 
운동계열 : 만주방면 
훈 격 : 애국장(2010)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소속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희생되었다.


대한독립단은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보약사(保約社) 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주로 의병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각 단체를 해산하고 결성하였으며, 복벽주의(復?主義)를 이념으로 하였다. 본부를 류하현 삼원포에 두었으며, 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부총재(副總裁) 백삼규(白三圭)였으며, 도총재부 산하에는 사무기구로 총단이 있었는데 총단장에 조맹선(趙孟善), 부단장에 최영호(崔永浩), 김원섭(金元燮)이 활동하였다.


국내외에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지역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는 관구(管區)를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환인(桓仁)장백(長白)무송(撫松)임강(臨江)관전(寬甸)집안(輯安) 등 10개 현에 지단을 세웠다. 이후 1923년까지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거쳐 의군부(義軍府)로 발전하였다.

문남규는 1921년2) 평북(平北) 삭주(朔州)에서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 독립신문(1921.4.9)
      


1) 『독립유공자공훈록 제19권』 157쪽의 1921년은 1920년의 오류임(大韓獨立團의 略歷(續), 『獨立新聞』 1921년 4월 9일(4면)에 의하면, 문남규가 전사 순국한 것은 [民國]二年 즉, 1920년 2월 이후 1920년 11월 사이로 판단됨).

2) 주 1과 동일



문남규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大韓獨立團의 略歷(續), 『獨立新聞』 1921년 4월 9일(4면)


元年 七月頃에 至하야 中央에 會集된 團員靑年의 數가 또 三百餘에 達한지라 一中隊를 編成하고 其中에 學科를 設置하야 軍事知識을 可成的 敎授케 되엿고 桓仁과 寬甸 等地에 儒林의 主唱으로 設立되엿든 鄕約의 全體로 더부러 統一이 되엿더라.
九月에 至하야 崔永鎬氏로부터 軍人增派의 通知를 接하엿슴으로 二小隊를 俄領으를 派遣하엿고 十二月頃에 敵의 妨害로 位置가 動撓될 事實이 生하야 練習中에 在한 軍人은 各地方으로 排置하고 中央位置를 輯安 ○○○川地方으로 移定하니 이는 如上한 事實만 有할 뿐 아니라 本團의 主義가 急進策이 持久策보다 勝하난 點이 多하고 且 內地에 組織한 各道郡面團에서 急速討伐하자는 報告가 連續함으로 動員促進의 狀態를 含有한 計劃이더라.


二年(정리자 주 : 민국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2년 즉 1920년) 二月에
至하야
俄領에 出駐하엿던 崔永鎬氏와 其部員 金敎淳氏 等이 敵의 偵探에게 遇害된 報道가 有하야 急히 臨時總會를 開하고 會議한 結果 趙團長이 俄領軍事事務를 任케 되야 同地로 出張하고 某某職員은 各機關 ○○○位置로 出張되야 內地에 計劃을 籌備케 하엿더라.


某地方機關으로 由하야 內地로 入去한 討伐隊長 李明瑞氏와 隊員 李建榮 高斗煥 閔良基 朱利煥 元士玄 李芝苞 朴致憲 諸氏가 平安南北道에서 多少의 敵을 討伐하고 黃海道에 直入하야 殷栗郡 居故義士 洪元澤氏로 더부러 同郡郡守를 誅하고 他方面으로 出動하다가 敵兵數百에게 包圍되야 四五時間을 激戰한 結果 敵에게 多數한 殺傷을 與하엿스나 終乃 衆寡에 不及으로 因하야 全數 殉國하다.


또 某地方機關으로부터 出動된 討伐隊長 朱○○氏 以下 一小隊는 全國內를 通하야 討伐하기로 計劃을 定하고 出動한바 朔州郡에서 敵軍과 開仗되야 幾個의 敵을 斬하고 多少의 勝利를 得하엿스나 從軍하엿든 李善贊 文南奎 兩氏가 殉國하다.


寬甸地方團檢察員으로 在하야 勤務하던 李仁奎氏난 敵兵이 團內에 侵入함을 見하고 短銃을 帶하고 單身으로 突出하야 射擊을 行하엿스나 敵兵 數十은 長銃으로써 猛射함으로 不幸히 中丸被擒되야 馬車에 실려 該縣城裏로 드러갈 時에 敵에 對하야 怒罵不絶하다가 當日을 逾치 못하고 殉國하엿는대 終命할 時에 大韓獨立萬歲를 高唱하엿더라.


同地方에서 副總裁 白三圭氏와 其部下 金得臣氏가 敵에게 被擒하야 桓仁地方으로 押去하다가 中路에서 銃에 마자 殉國하엿고 輯安 某機關에서 勤務하던 朴云錫 金昌洛 韓炳基 諸氏가 敵兵에게 被擒하야 殉國하고 通化地方 某機關에서 尹悳培氏가 敵의 鷹犬된 所謂保民會의 妨害로 殉國하엿더라. (以下 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9)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반병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12, 175쪽


제3장 만주지역 항일독립군 단체의 형성과 발전

 4. 서간도지역의 무장독립단체 현황

  2. 대한독립단


1920년 2월의 임시총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단은 지방기관을 중심으로 국내작전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토벌대장 이명서李明瑞는 지방기관을 거쳐 국내로 들어가 대원 이건영·고두환·민양기·주리환·원사현·이지포·박치헌 등과 평안도 지역에서 적들을 토벌하였다. 이어 이들은 황해도로 들어가 은율군 거주 지사인 홍원택洪元澤과 군수를 살해하고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다 일본군 수백 명에게 포위되어 4~5시간을 격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 순국하였다. 모지방 기관에서 출동한 주모朱某 토벌대장 휘하의 1소대가 삭주군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수명을 살해하였으나 대원 이선찬과 문남규가 순국하였다. 註249)

[註 249] 『독립신문』 1921년 4월 9일 「大韓獨立團의 略歷(續)」, 1919년 11월 1일 「西間島의 韓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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