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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4화. “야스쿠니 참배는 백이면 백, 해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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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활동해온 사람들의 이야기


[프로젝트 소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


올 봄, 강제동원과 관련한 일본 전범기업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노력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등재를 막지는 못했지만, 유네스코는 등재 조건으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이 유네스코의 재정을 부담하는 비중, 일본 정부가 십 수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점, 아베 정부가 외교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은 점, 일본정부가 강제동원 가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기한 적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일본으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본정부가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를 온갖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며 부정하려 하지만,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모습으로만 비칠 뿐입니다. 오히려 이번 일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강제노동’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유네스코 21개 회원국에게 일본 산업시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독일의 회의장 인근에서 열린 강제노동 전시회를 살펴본 회원국 관계자들은 “한국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왜 문제제기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이 왜 문제제기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치밀한 준비에 비하면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너무 늦게 대응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부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피해자와 함께 한일시민들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피해 구제 활동을 해온 경험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공서, 절, 기업 등의 문서고를 뒤지며, 폐허가 된 현장과 이름 없는 한국인의 무덤을 찾아 위령시설을 세우고, 유해를 발굴하는 한편, 일본 사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속해온 것입니다.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호주머니 털어서 밝힌
강제노동 실태”


‘일본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일단 정리가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일본정부가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제대로 기록할 것인가? 아베정권은 또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오늘도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자들의 고민과 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피해자와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보전하고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해왔습니다. 또한 진실과 정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기억의 전승과 연대의 허브’ 역할을 할 ‘식민지역사박물관'(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나눠 갖는 책임’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등 각지의 징용. 징병 강제동원 현장에서 활동하며 밝혀 온 성과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 를 전하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쫓아 수십 년간 노력해 온 사람들 역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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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기니 자야푸라 지역
한일 공동 조사”


2013년 2월 15일 12시. 2차 대전 때 지금의 인도네시아령 뉴기니에서 사망한 일본군 군인·군속(한국인 포함)의 유골을 조사하는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뉴기니의 경우 세 번째 유골 조사 사업으로 민간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한일공동조사단을 꾸린 것입니다. 조사단은 A, B 두 팀으로 구성됐습니다.


A팀은 단장 이와부치 노부테루(태평양전사관 대표), 나가이 마사루(휴텍재팬 주식회사 대표), B팀은 저와 우에다 케이시(일본제철 징용공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회원) 총 4명이었습니다. 이와부치 씨는 총괄 진행, 나가이 씨는 통역, 우에다 씨는 영상 촬영, 저는 사진 촬영과 기록을 각각 맡았습니다.


2012년 6월, 뉴기니에서 유골 조사와 봉환사업을 해오던 이와부치 씨를 한국에 초청해 강연회와 유족 간담회 등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이 초청을 계기로 그해 11월 일본 이와테현의 태평양전사관(太平洋戰史館)을 방문하여 뉴기니 자야푸라 지역을 한일 공동 조사하기로 협의했습니다.


한국사람 만큼이나 성질 급한 이와부치 씨가 전격적으로 일을 추진한 결과 공동조사가 급물살을 탄 것입니다. 물론 개인을 국민성과 직결시키는 이런 식의 설명이 적절하지 못한 것은 알지만, 이듬해 2월에 가게 된 것입니다.







▲ 초청강연회- ‘뉴기니아의 한국인 유골문제’, 이와부치 노부테루 태평양전사관 대표, 2012년 6월 22일 ⓒ민족문제연구소







▲ 이와테현 태평양전사관 ⓒ민족문제연구소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정부가 전사자를 기리는
가장 천박한 방법”


이와부치 씨의 아버지는 그가 3세 때인 1944년 4월 16일 뉴기니 국경에 인접한 인도네시아 자야푸라(구 호란지아) 방공호에서 연합군 폭격으로 전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본 풍경을 확인하고 싶어 1967년 뉴기니를 방문했는데, 그곳에 사는 가톨릭 신부에게 많은 일본 병사가 묻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항공사 직원이 돼 뉴기니에 파견근무를 자원했고, 1977년부터 해마다 유가족들과 함께 유골을 봉환하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와부치 씨가 발굴해 귀환시킨 유골만 1만 2000구가 넘습니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정부가 전사자를 기리는 가장 천박한 방법”이며, “야스쿠니 참배는 아무 가치가 없고 백이면 백, 해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발로 돌아올 수 없는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산 자의 사명”이며 “야스쿠니에 참배할 바에는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유골들을 먼저 발굴해 귀환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뉴기니에서만 일본군 군인과 군속 24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제8방면군이 관할하고 있던 뉴브리턴, 뉴아일랜드, 솔로몬, 그리고 뉴기니 등 이른바 남양군도에는 1943년 9월 1일 현재 최대 병력이 24만 5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30일 패전 때의 병력은 8만 4천여 명이었습니다. 2년 사이 16만 명이 사망한 것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전사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이 1942년 말부터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습니다.


동부 뉴기니 전투에서 잇따른 패배로 후퇴하던 병력 대부분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밀림에서 죽어간 것이었습니다.







▲ 남동방면 (일본)육군 작전 경과 개요도 ⓒ민족문제연구소


참고 : <남동방면 육군 작전 경과 개요도> 왼쪽에 그은 선을 경계로 오른쪽이 지금의 파푸아 뉴기니이며, 왼쪽이 인도네시아 뉴기니입니다. 1944년 4월 22일 연합군이 국경 근처에 있는 아이타페와 호란지아(현 자야푸라)를 공격하면서 제8방면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뉴기니에서 사망한
한국인 피해자 4,690명”


뉴기니 등 남양군도로 끌려간 한국인의 전체 규모는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뉴기니에서 사망한 한국인 피해자는 4,690명이 확인되었습니다.


남양군도에 동원된 한국인들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군속 신분이었습니다. 설영대(設營隊)라 하여 지금의 공병대와 같습니다. 말이 공병대지 실은 부실한 장비와 몸뚱이 하나로 비행장 건설과 정비를 비롯하여 밀림의 길을 닦는 일에 투입된 노동력부대였습니다. 그런 만큼 연합군 비행기의 주요 폭격 대상에 항상 노출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 희생자 수를 시기별로 보면 1942년 12월에서 1943년 1월 사이는 2천여 명이 되며, 1944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월 평균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1943년을 전후한 수치는 맥아더 남서태평양 방면 부대가 반격을 시작하면서 포트 모레스비(현 파푸아 뉴기니 수도)와 부나 지역에서 많은 희생자가 난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때 체포된 한국인 군인·군속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카우라 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동부 뉴기니의 전투는 연합군과 일본군이 사활을 걸고 총력전을 벌인 전투였습니다. 결과는 풍부한 전력을 갖고 있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함으로써 1944년 초에 이르면 연합군이 중부 뉴기니에까지 진격하여 남방의 전세는 확연하게 연합군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1944년의 수치는 연합군이 중부 뉴기니로 진격하면서 생긴 희생자 수입니다. 해안가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산맥과 밀림을 지나 뉴기니 내륙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월별 사망자 수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해
기약없이 방치”


지난 몇 년간 제가 관계하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에서는 일본 후생노동성의 유골 조사와 봉환사업에 한국인 유족도 참여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당시에 관련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한국인 희생자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법적인 책임도 이유도 없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식민지기 일본이 ‘조선인’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억지로 끌고 갔다면, 죽은 유골이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일본정부는 매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각지에서 일본인 희생자 유해발굴, 봉환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희생자들에 관한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고 희생자들의 유해는 기약 없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오사카 간사이공항 가까운 곳에서 재한군인군속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오사카 회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다음날인 2월 16일 오전 11시, 인도네시아 덴빠사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덴빠사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10분, 7시간 10분 동안 서쪽으로 비행한 셈입니다.


덴빠사공항 인근에서 잠시 쉰 다음, 밤 12시 25분에 다시 자야푸라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자야푸라 공항에 도착한 것이 17일 아침 8시 40분이니 서쪽으로 간 시간만큼 다시 동쪽으로 간 것이죠. 인도네시아 뉴기니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기로 이틀 걸려 뉴기니에 도착한 것입니다. 2차 대전 때는 배로 일주일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제공권이 연합군에게 넘어간 뒤에는 비행기 공격을 피해 밤에만 이동했다고 하니 시간이 더 걸렸을 겁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배에서 보낸 뒤에서야 비로소 강제동원된 앞선 세대들은 열대의 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뉴기니는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섬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행정상 인도네시아령인 서반부와 파푸아뉴기니령인 동반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1884년경 남동쪽 1/4은 영국이, 북동부 1/4은 독일이 통치하였습니다.


영국의 지배권은 1904년 오스트레일리아로 넘어갔으며, 2차 대전 당시는 일본이 남동쪽 일부를 제외하곤 섬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2차 대전 후 서쪽 절반이 네덜란드령으로 되었다가 1969년 이리안바라트가 인도네시아로 합병되었고, 파푸아뉴기니는 1975년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했습니다.







▲ 파푸아 뉴기니아 남태평양 지도 ⓒ구글맵


국경선과 인접한 인도네시아 뉴기니의 자야푸라공항은 마치 한적한 시골역을 연상시킬 정도로 작았습니다. 뉴기니주의 지방 수도이긴 하나 아직은 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공항에서 나온 조사단은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30분 정도 차로 이동하여 예약했던 호텔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호텔이라고 찾아간 곳은 황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시골 여인숙 같은 집 몇 채를 벌판에 만들어놓고 호텔이라 한 것입니다. 게다가 안내하는 점원도 없어 한참을 찾아다녀야만 했습니다. 겨우 점원을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결과 냉방도 전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2월이지만 30도를 넘는 곳에 냉방이 되지 않는다니. 자야푸라에서 여행업을 하는 현지인이 숙소를 잘못 잡은 데다 현지 조사에 필요한 준비조차 해놓지 않은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와부치 씨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어지간하면 숙소로 사용하려 했으나 주변에 먹을 만한 곳도 없고 물 사정도 좋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30여 년간 여행업을 하면서 유골 조사를 해왔던 이와부치 씨는 상황을 빠르게 수습해 나갔습니다. 다행히 자야푸라에 있는 유일한 호텔로 숙소를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2월 18일 월요일, 조사단 일행은 먼저 뉴기니 주정부의 산업국장을 면담했습니다. 산업국장은 은퇴 후 지역개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눈치여서 우리들에게 지역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조사단이 원하는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교육국장과 사루미 지역에서 유골을 수습한 관료를 소개받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사루미 역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이라 이전에도 많은 유골들이 확인된 곳이었습니다. 이날은 일정이 일찍 끝나 이와부치씨 아버지가 근무했던 부대가 있었던 곳을 방문했습니다.







▲ 이와부치씨의 아버지께서 폭격으로 돌아가신 해안가 ⓒ민족문제연구소







▲ 해안가 언덕에 남아 있는 부대 주둔지 ⓒ민족문제연구소


이튿날인 19일에는 교육국장과 유골 조사를 한 담당 관료를 만나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조사 지역을 확대하기 위한 기초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파푸아뉴기니 주정부 교육국 ⓒ민족문제연구소


“이번 유골 조사는
고위 행정관료들에게
협조를 얻었다”


인도네시아는 최근까지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령 뉴기니 역시 행정에서 군사적인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료들은 모두 군복 형태의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행정관청들은 오후 4시가 되면 거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면담은 오전에 처리해야 했습니다.


20일 오전에는 뉴기니 주지사의 총무비서를 면담하여 조사단의 사업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고위급 행정관료들과 면담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가이 대표가 상당 기간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면서 행정관료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이와부치 씨가 유골 조사 활동을 한 것은 현지 주민들이 알음알음으로 유골 정보를 알려준 것에 의존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유골 조사의 특징은 고위 행정관료들에게 사업의 취지를 전하고 협조를 얻음으로써 향후 유골 조사사업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나가이 대표의 공이 컸다고 이와부치는 말했습니다.







▲ 주지사. 총무비서 면담 ⓒ민족문제연구소


주지사 총무비서와 면담을 끝낸 뒤 우리들은 이른 점심을 먹고 푸하이 마을로 서둘러 출발했습니다. 현지 주민이 유골을 찾아 모아두었다는 정보를 듣고 실태를 확인하고자 1차 조사를 하러 떠난 것입니다.


글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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