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탐사보도팀이 광복 70주년 특집으로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해 왔던 ‘훈장’ 2부작이 사실상 폐기될 운명에 놓였습니다. 특히 2부 ‘친일과 훈장’은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기획으로 제작되었으며, 철저하게 원사료를 분석한 객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훈장’의 불방은 오늘 한국 언론이 처한 현실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
훈장 2부작 사실상 불방 수순으로
20시간의 데스킹… 아직도 방송은 미정
‘훈장을 통해 본 대한민국 70년의 역사’를 취재한 훈장 2부작이 결국 불방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제작진은 지난달 8일 사내게시판을 통해 훈장 프로그램의 조속한 방송을 촉구했고, 열흘뒤인 18일부터 데스킹이 시작됐습니다. 지금까지 10차례에 걸쳐 20시간의 데스킹 회의를 거쳤습니다. KBS 역사상 유례없는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데스킹을 받으면서도 제작진은 방송을 내야한다는 일념 아래 성심성의껏 데스크의 의견을 최대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참담합니다. 1,2편 모두 방송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아직 방송일조차 정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잇단 특집 편성에 따른 결방, 계획된 불방 수순?
‘간첩 조작 사건의 수사관들이 훈장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됐다’는 내용의 1편 <간첩과 훈장>은 데스킹이 거의 마무리돼 당초 이달 20일 방송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생방송 세계기록유산등재와 관련한 특별대담이 갑자기 편성돼 한 주가 미뤄졌습니다. 이에 따라 내일(27일) 방송 예정이었으나 이번엔 <시청자칼럼 우리 사는 세상 4천회 특집>이 돌연 편성됐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시청자칼럼 특집이 왜 꼭 화요일, 그것도 밤10시 시사기획 창 시간에 방송돼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다른 아이템들이 예정돼 있다고 합니다. 원래 예정이었던 7월말을 기준으로 보면 3달째 방송이 못 나가고 있습니다. ‘불방’이라는 단어 외에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김형덕 부장과의 데스킹에서 마지막 논란은 ‘조작’이라는 단어의 사용 여부였습니다. 제작진은 “불법연행과 불법감금,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입증돼 무죄가 선고됐다면 ‘조작’이라는 포현을 사용할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데스크는 “간첩이 아닌 선량한 사람들을 잡았다면 조작이지만 원래 간첩인데 불법연행이나 고문 등 수사 절차상 하자가 발생해 무죄가 선고된 경우는 조작이 아니며 이럴 경우 당시 수사관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며 ‘조작’은 물론 조작을 연상시킬 수 있는 ‘간첩으로 만들어 내는’ 등의 표현이나 인터뷰 내용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이현주 국장은 부장 데스킹까지 끝난 원고에 대해 ‘상당한 우려 열 몇 가지’가 있다면서 내용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 무죄 사건은 전체 간첩 사건 중 극소수라는 것을 적시하라
– 무죄 사건이 모두 조작이 아니라는 것을 구분해서 적시하라
– 대공활동 전체에 대한 폄훼가 없어야 한다
– 한홍구 교수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으니 인터뷰를 빼라
– 국방부 반론을 더 넣어라
이 모든 요구들에서 진실을 찾아가려는 열정이 느껴진다면 또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 보자는 진심이 느껴진다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을까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의심받고 검열을 받는 느낌입니다. 팀장, 부장, 국장 누구에게도 방송을 내겠다는 의지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제작진도 모르는 기획의도 제시, 박정희 관련 내용은 빼라
2편 <친일과 훈장>은 문제가 더욱 심각합니다. 2편은 처음부터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취재와 제작이 이뤄졌습니다. ‘독립’, ‘친일’, ‘일본인’ 훈장이었습니다.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광복 70년을 되돌아보대 이에 대한 두 개의 시선(보수와 진보 양쪽의 시선)을 공정하게 담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였습니다. 제작진은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취재도 양쪽의 해석과 평가를 담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6번의 데스킹을 거쳐 처음 원고의 많은 부분이 수정됐습니다. 그러나 김형덕 탐사제작부장은 ‘수정’ 차원이 아닌 ‘새로운 프로그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작진의 기획, 취재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아니면 방송이 안 된다는 식입니다.
요구의 핵심은 현재 원고에서 3분의 1정도를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뉴스가 아니거나 프로그램 기획 의도와 맞지 않거나 기자들이 편협하다”는 등의 이유를 듭니다. 그런데 부장이 삭제하라는 3분의 1은 대부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역대 정권 중 집권 기간이 가장 긴 박정희 정권 부분을 빼고 훈장을 통해 본 광복 70년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김형덕 부장은 “친일행적자들이 받은 훈장의 적절성 여부가 기획의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작진은 단 한번도, 2편 <친일과 훈장>을 ‘친일행적자들이 받은 잘못된 훈장’을 중심으로 다루겠다고 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작진이 여러 측면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제시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작진이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자 원본 데이터까지 가져가서 검토해 보더니 이제는 검토만 했을 뿐 취재는 제작진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2편의 논의는 완전 중단된 상태입니다. 제작진이 양심을 저버리거나,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 한, 2편은 불방될 것이 명확해 보입니다.
사장 선임 눈치보기?
프로그램의 잇단 결방과 방향 수정 지시, 우리는 이 모든 사태가 현재의 사장 선임 과정과 결코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대현 사장의 연임에 걸림돌이 될 만한,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이인호 이사장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그 어떤 내용도 방송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동순,고대영 등 다른 사장 후보에게도 밉보일 내용은 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현주 시사제작국장과 김형덕 탐사제작부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제작진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KBS의 프로그램이 방송일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최종원고를 데스킹을 하며, 그 데스킹이 한달 동안 10차례, 20시간이나 한단 말입니까? 7월 말에 취재가 다 끝난 프로그램이 석 달이 되도록 방송되지 못하는 사유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지 마십시오.
2015년 10월 26일
훈장2부작 제작진 일동
※관련기사
☞미디어스: KBS, 결국 박정희 때문에 ‘훈장’ 불방시키나
(2015.10.26)
☞미디어오늘: ‘훈장’ 제작진, “삭제 지시 대부분 박정희 관련” (2015.10.26)
☞한국기자협회: 뉴라이트 역사관에 흔들리는 공영방송 KBS (2015.09.16)
☞미디어오늘: KBS 조대현 사장 연임위해 ‘훈장’ 불방했나 (2015-09-11)
☞미디어오늘: “친일파 등에게 준 훈장 70만건” 보도 누가 막고 있나 (2015.09.09)
☞미디어스: 이승만-박정희는 금기? KBS ‘친일과 훈장’ 불방 위기 (2015.09.09)
☞한겨레: KBS, 이승만·박정희 비판은 금기?…‘친일과 훈장’ 불방되나 (2015.09.09)
☞민중의소리: “KBS, 이승만·박정희 정부 ‘친일파 훈장’ 방송 계속 연기”…내부 반발 (2015.09.09)
☞한국일보: 이승만·박정희 비판은 금기? KBS 탐사보도 불방 위기 (2015.09.09)
☞오마이뉴스: 박정희 시절 못다뤄? KBS의 이상한 팀장 교체 (2015.09.09)
☞노컷뉴스: “쉿!”…KBS에서 볼드모트가 된 ‘친일·이승만·박정희’ (2015.09.09)
☞PD저널: KBS, 이승만·박정희 비판 아이템 자르기? (201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