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1> 유신 쿠데타, 열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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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박정희가 왜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그동안 데탕트 위기론, 1968년 무렵 고조된 전쟁 위기에 주목한 견해,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춘 의견들을 살펴봤다. 이와 달리 1970년과 1971년, 그중에서도 특히 1971년에 그간 쌓인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이 발생해 위기 상황이 조성되자 박정희 정권이 유신 쿠데타로 대응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한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대략 10년마다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언제부터냐 하면, 대원군이 집권한 게 1863년인데 1873년에 쫓겨나지 않나. 뒤이어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딱 10년이 아니긴 하지만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그리고 1894년에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다. 대개 10년 안팎으로 그런 큰 사건이 있었는데, 현대사에 들어와서도 이 점은 비슷하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60년에 4월혁명, 1961년에는 5.16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나. 1971년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날 뻔했거나 일어났다. 그러고는 1979년, 1980년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다음에는 1987년에 6월항쟁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97년에 IMF 위기를 맞고 정권 교체가 일어난다.
이렇게 한국 근현대사를 보면 대략 10년 안팎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71년의 경우 대선과 총선이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형태로 있었다. 특정 지역에서 몰표가 나오는 일만 없었다면 정말 평화적 정권 교체도 있을 뻔했고, 사회적으로도 그해에 큰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그해 12월에 가면 국가 비상사태 선언이 있게 된다.
6월항쟁을 전후해 학술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학술 운동에 참여한 당시 젊은 연구자들, 이젠 젊지 않지만 어쨌건 이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를 보는 시각과 관련된 문제가 여러 쟁점에서 논쟁적으로 제기됐다. 그중 하나가 유신 체제의 성립 배경이라고 할까 요인으로 1971년 위기론이 적잖게 거론된 것이다. 1971년에 큰 사회적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런 사건들이 결국 유신 체제로 가게 하는 데 하나의 또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 부분에 관해 살펴보려면 먼저 그해에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학생들에게 ‘화형’당한 언론인들의 자성 “언론 자유 수호하자”
프레시안 : 1971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
서중석 :
여기서는 학생들의 학원 병영화 및 교련 반대 투쟁과 총선, 대선을 제외하고 사회적인 중요 사건들을 우선 살펴보자. 이 무렵 언론은 옥죄일 대로 옥죄임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자는 운동이 이 시기에 상당히 일어난다. 나중에 자유 언론 운동으로 많이 불리게 되는 언론 자유 운동이 이때 일어나게 된 데에는 학원 병영화 반대 투쟁을 벌이던 학생들이 ‘언론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며 성토한 게 크게 작용했다. 다시 말해 너무나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언론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 촉발 요인이 됐다.
1971년 3월 24일 서울대 법대생들이, 그다음 날에는 문리대 학생들이 언론인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26일에는 서울대의 여러 단과대 학생회장단 30여 명이 모여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발표하고 심지어 ‘언론 화형 선언문’까지 낭독하면서 시위했다. 유인물 같은 것을 통해 학생들은 언론이 지도적 기능은 차치하고 사실 보도도 제대로 하지 않아 언론이 해야 할 최소한의 보도적 기능조차 상실했고, 대학 병영화를 외면하면서 “민주주의를 암장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언론인들이 권력과 금력의 시녀로 전락해 조국에 대한 배신자가 된 것 아니냐고 아주 강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동아투위 사람들이 나중에 쓴 글 같은 걸 보면 이때 큰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아투위 막내 세대로서 1975년 해직되는 정연주 전 KBS 사장의 증언은 1970년대 초반 언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신 쿠데타 후 서울대 시위 현장을 취재하러 간 정연주 기자는 학생들의 농성장 쪽에 갔다가 이런 팻말과 마주친다.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 노동자들의 억울한 죽음이나 시위 등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던 언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자 통렬한 조롱이었다. 정연주 기자는 그때 너무나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부끄러움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정 기자만이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양심을 지키고자 한 많은 사람이 느낀 그러한 부끄러움과 분노는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밑거름이 된다. <편집자>)
이처럼 학생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게 되자 언론 내부에서 자성의 소리가 나왔다. 먼저 <동아일보> 기자들이 4월 15일 언론 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외부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한다”, “명예를 걸고 정보 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중앙정보부의 압력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다음 날에는 <한국일보> 기자들이, 17일에는 <조선일보>와 지방에 있던 여러 신문에서, 19일에는 <동양방송>과 <문화방송>을 비롯한 방송사에서, 20일에는 <합동통신>, <동화통신> 같은 통신사에서까지 언론 자유 수호 의지를 밝혔다. 이렇게 중앙과 지방, 그리고 신문사는 물론 방송사, 통신사에서까지 많은 기자가 참여했다. 5월 15일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자들은 진실은 진실대로 기사화하고 관계 기관의 불법적인 기자 연행을 일체 거부하며, 정부는 지금까지 언론에 대한 유형, 무형의 불법 부당한 간섭과 압력을 즉각 중지하고 신문, 방송, 통신의 제작은 언론인의 양심과 자율에 맡길 것”, 이렇게 요구했다. 여기서 관계 기관은 중앙정보부를 가리킨다.
이렇게 4월과 5월에 언론인들이 애를 많이 썼는데도 언론 활동의 기본, 즉 최소한의 보도 기능이라도 제대로 하라고 학생들이 강도 높게 비판했던 그것조차 지킬 수가 없었다. 유형, 무형으로 워낙 심했던 억압과 감시, 즉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그것도 작용했지만 이미 발행인, 편집인 같은 언론사 상층부가 권력 쪽에 예속됐다고 할까, 꼼짝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속에서 1971년 12월 6일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그로부터 11일 후인 12월 17일에 한국신문협회에서 프레스카드제 실시를 발표했다. 프레스카드를 발급받은 언론인만이 취재를 할 수 있게 된 건데, 이는 언론인의 신분과 취재 기자 수를 제약하기 위한 조치로 사실상 정부가 강제한 것이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
국공립대 교수들의 자주 선언과 인턴, 레지던트 파동
프레시안 : 이해에 대학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나오지 않나.
서중석 : 언론 자유 운동에 이어 국립대 교수 선언이 나온다. 여름방학 때인 1971년 8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이 시작했다. 교수 회의를 열고 대학의 자율성 및 연구 여건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는데, 이 회의에 교수 114명 중 70여 명이 참석했다. 일반적으로 교수들이 방학 때 학교에 잘 안 나오는 걸 감안하면, 이건 사실상 100퍼센트나 마찬가지였다. 교수들 중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참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며칠 후에는 공대, 상대, 농대에서도 교수들의 선언이 뒤따랐다. 서울대 공대에서는 총·학장을 임명할 때 교수들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8월 23일에는 서울대 전체 교수 998명 중 513명이나 대학 강당에 모여 교수협의회 긴급 임시 총회를 열고, 대학 자치를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대단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한 대학 교수들이 대거 나온 건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6월항쟁 때 그와 유사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때 나온 건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이러한 대학 교수들의 학원 자주화 요구는 지방 국공립대로 퍼졌다. 경북대, 부산대 교수들이 8월 23일 대학 자주화를 천명했다. 그 뒤를 이어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 충북대, 강원대, 부산수산대, 진주농대, 제주대, 이렇게 국공립대 교수들이 연이어 자주 선언을 발표했다. 9월 13일에는 지방 국립대학 교수협의회에서 자주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프레시안 : 지적한 대로 학생들이 아니라 교수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목소리를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서중석 : 이렇게까지 된 건 교수 사회가 큰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1965년 한일협정 비준 파동 여파로 20명 안팎의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났고, 그 후에도 권력은 대학을 계속 옥죄지 않았나. 그것에 대한 반발과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었다. 예컨대 1965년, 1966년, 1967년, 1969년에 대학 측 의사와 상관없이 휴업령이 내려져 수업을 중단해야 하는 사태가 많지 않았나. 서울대 상대 정영일 교수에 의하면, 대학 교수들은 그런 사태를 보며 대학의 자치권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인식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교수들은 정보 사찰의 대상이 돼 학문의 자유를 상실하고 심지어는 항시 이뤄지는 ‘보이지 않는 감시’로부터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교수가 연구실에서 제자와 나눈 사적인 대화조차 감시 대상이 됐다고 정 교수는 이야기했다. 그리고 예컨대 국민윤리, 교련 같은 것을 교육하라고 권력이 대학에 지침을 내렸을 때 학생들이 반대 투쟁을 하지 않나. 그럴 때 대학 당국이나 교수들은 이 문제를 논의할 용기라고 할까,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것도 자괴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8월에 국공립대를 중심으로 나온 대학 교수들의 자주 선언은 우리 역사에서 드문 일이긴 한데, 더 이상 어떤 영향이나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키거나 어떤 열매를 맺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선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프레시안 : 국공립대 교수 선언을 주도한 교수들도 한일협정 비준 파동과 관련해 쫓겨난 교수들처럼 처벌을 받았나?
서중석 : 그런 건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내버려뒀다. 교수 처벌은 일절 없었다. 사법부 파동에 대처하는 것 때문에도 그랬고, 잘못 건드리면 일파만파로 번져 큰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사법부 파동이 일어나고 나서 얼마 후 교수들의 자주 선언이 나오지 않았나.
교수들의 자주 선언에 이어 이번에는 인턴, 레지던트들의 파동이 일어났다. 이것도 국공립에서 먼저 일어나는데, 그건 국공립 병원 수련의들이 공무원 보수 규정에 얽매여 사립 병원 수련의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6월 중순 국립의료원 인턴 32명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내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의 집단 사표를 수리했던 국립의료원은 6월 29일, 사표를 수리한 32명을 새로 모집하는 형식으로 복귀시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다가 9월에 들어와 다시 인턴, 레지던트가 집단으로 싸우게 된다. 9월 4일 서울대 부속 병원 인턴 40명이 집단 이탈하고 여기에 레지던트들이 동조했다. 그러면서 병원의 일부 기능이 마비됐다. 이어서 부산대, 전남대의 대학 병원으로 퍼졌고 그게 다시 국립의료원으로 가고 세브란스 병원과 가톨릭대 부속 병원으로까지 파급됐다.
이것에 대해 정부 당국은 징집으로 맞섰다. 그런데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이화여대 부속 병원, 경찰병원, 서울대 치대까지 합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민관식 문교부 장관을 방문했다. 이들은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수련의들의 요구 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우리 교수들도 같이 사퇴하겠다’, 이렇게 하면서 설득했다. 결국 서울대 의대 인턴, 레지던트들이 복귀하면서 일단락됐는데, 다른 데도 대개 그런 식으로 복귀했다.
이건 자유 선언과는 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국공립대 교수들의 자주 선언이나 언론 자유 운동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국공립 병원의 경우는 그와 좀 다르다. 하여튼 그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고, 국공립 병원에서 먼저 일어난 건 공무원 보수 규정 문제와 연관돼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사건까지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당시 운동권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관심을 아주 크게 가진 건 광주 대단지 사건이었다. 아울러 파월 기술자들의 KAL 빌딩 방화 사건, 이것에도 관심을 가졌다.
▲ ⓒ연합뉴스 |
검찰의 판사 구속영장 신청을 계기로 불붙은 사법부 파동
프레시안 : 1971년에는 법조계도 요동치지 않았나.
서중석 : 바로 이해에 사법부 파동도 일어났다. 이렇게 큰 규모의 사법부 파동이 일어난 건 전무후무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1971년에 일어난 사건들 중 일반인들한테 제일 큰 영향을 준 게 바로 이 사법부 파동이었다. 언론이 장기간에 걸쳐 아주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다.
사법부도 언론계, 대학가와 똑같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또는 보이는 손으로부터 계속 압력, 감시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1971년 초에 이미 자체 정화 운동을 추진하는 형태로 사법부 독립을 모색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1월 13일 대구고등법원 산하 판사들과 12개의 지원 판사 등 100여 명이 권력으로부터 독립, 청탁 배제 등을 구호로 내걸고 자체 정화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대한변호사협회 변호사들이 적극 호응해 대법원장에게 외부로부터 사법권 독립을 지키는 데 앞장설 것을 건의했다. 여기서 외부라는 게 어딘지는 뻔하지 않나.
큰 규모의 사법부 파동이 일어나는 건 7월 하순의 일 때문이다.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서울지법 형사부에서 똑똑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이범열 부장판사 그리고 최공웅 판사와 서기, 이렇게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범열 부장판사 일행이 출장을 가서 뇌물을 받았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이다. 이게 간첩 사건도 아닌데 왜 공안부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으나, 어쨌건 검찰에서 그렇게 조치했다.
(이 부장판사 일행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의 항소심 심리를 위해 현지에서 증인을 신문하고자 제주도에 내려갔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사가 이 부장판사 일행의 항공료 및 술값 등을 냈다며 이 부장판사 일행에게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출장 체재비를 문제 삼아 검찰이 현직 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한 건 이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지만, 피고인 측 요구로 법원에서 지방에 내려갈 경우 그에 필요한 비용을 피고인 측에서 부담하는 건 그 시절 오랜 관행이었다. 이는 당시 법원 쪽 출장비가 그리 넉넉지 않았던 사정과 관련 있다. 박천식 법원행정처 조사국장은 문제가 된 출장비에 대해 1971년 8월 6일 자 <경향신문>에 이렇게 밝혔다. “판사 3명, 서기 1명 기준의 5일분 출장비가 총 2만6000원인데 이것으로 판사들은 관광호 아닌 1등차, 서기는 2등차 정도로 갈라 타고 여관도 각각 들어야 하며 비행기 출장이란 어림없는 얘기지요.” 박 국장은 사법부 전체 예산이 행정부 1개 부처 예산에도 못 미친다며 “이 같은 사법부의 적자 예산 전통은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이 세워놓았다”고 밝혔다. “꼬장꼬장하고 결백하기로 이름 높았던 김 대법원장은 올린 예산을 일일이 따져 최소한의 것마저 필요 없다고 스스로 깎아버리기가 일쑤였다”고 박 국장은 덧붙였다. <편집자>)
여기부터 싸움이 붙은 것이다. 서울형사지법은 구속영장 신청을 당일로 기각해버렸다. 또한 서울형사지법 판사 42명 중 39명(28일 당일 37명, 29일 2명)이 두 판사에 대한 영장 신청은 공안 사건 무죄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고 보고 “이런 분위기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집단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42명 중 39명이라는 건 대단한 것이다. 사실상 모두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렇게 되면서 사법부와 박정희 권력 간의 갈등이 드디어 표면화된 것이다.
프레시안 : 검찰이 그런 조치를 단행한 속내는 무엇인가.
서중석 : 서울지검 공안부가 두 판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한 데에는, 그리고 그것이 보복 조치로 비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우선 1971년 6월 대법원은 국가배상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수백 억 원이 걸려 있던 소송에서 국가 패소 결정을 내렸다. 또 법원의 위헌심권(違憲審權)을 제한한 법원조직법 중 일부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때는 대법원이 위헌 판결권을 갖고 있었지만 유신 쿠데타 때 그걸 뺏겼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하여튼 대법원은 이때 이렇게 판결해, 입법부와 행정부가 사법부에 가했던 제약 요소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 총선을 하려고 할 때 서울대생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 일어난다. 총선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민당원들한테 요구하며 농성한 것이었는데, 정부는 이 사건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신민당사에 진입한 서울대생을 다 구속하고, 최종적으로 관련자 10명한테는 실형을 구형했다. 강경 일변도로 나간 건데, 6월 29일 서울형사지법은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또 검찰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다리>라는 월간지 필화 사건이 있었는데, 서울지법은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도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필화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김대중 후보하고 관련이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판결이 나온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울고법 특별부는 잡지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이 문공부 장관을 상대로 낸 ‘<씨알의 소리> 간행물 등록 취소 처분 취소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등록 취소 처분을 취소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씨알의 소리> 쪽 손을 들어준 것이다.
사법부가 1950∼1960년대에 그래도 조금은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1971년에 좋은 판결을 연이어 한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건 그런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검찰 공안부에서 유명한 판사 2명을 기소한 것이다. (<경향신문> 1971년 7월 28일 자에 따르면, 이범열 부장판사가 맡은 서울형사지법 항소 3부는 1971년에 19건을 무죄 판결했고 검찰 공안부가 기소한 반공법 위반 등의 사건에 대해서도 5건이나 무죄를 선고했다. 이 부장판사 일행이 사법부 길들이기를 시도한 세력의 표적이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편집자>) 그러자 바로 서울형사지법 판사들이 이걸 보복 조치로 판단하고 일제히 사표를 냈고, 그것에 이어 서울민사지법에서도 검찰의 조치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으며, 대구지법에서도 호응했다.
프레시안 : 검찰은 오늘날에도 정치 검찰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이 자초한 면이 많은 그러한 오욕의 역사는 그 뿌리가 깊다. 사법부 파동에서 검찰이 보인 모습 역시 그와 무관치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오면, 판사들의 반발에 검찰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7월 28일 서울형사지법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검찰은 그다음 날인 29일 내용을 보강해 영장을 재신청했다. 보강한 내용이 뭐냐 하면 두 판사가 변호사와 술을 마시고 접대부와 동침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용을 보강해 영장을 다시 신청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국회로까지 비화됐다.
검찰에서 그렇게 나오자, 항의 성명을 냈던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은 ‘이건 분명히 고의성이 아주 짙은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고 7월 30일 44명이 집단으로 사표를 냈다. 그러면서 사법권 수호 건의문을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아울러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판사들도 사표를 내게 된다. 이때 전체 법관의 3분의 1에 이르는 153명이나 사표를 냈다.
대한변협에서는 이봉성 검찰총장과 더불어 민복기 대법원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의 인책 사퇴를 요구했다. 민복기나 신직수는 박정희 정권에서 정말 잘나갔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아주 고위직을 받으면서 박정희 정권이 요구한 활동을 했던 이들이다. 민복기는 친일파의 거물인 민병석의 아들이다. 민복기 본인도 일제 때 경성복심법원 판사까지 했으니 친일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때는 검찰총장을 하고,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는 법무부 장관에 이어 드디어 대법원장까지 된 사람이다. 신직수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군대에 있을 때 박정희 밑에서 법무 참모 같은 것으로 일했는데 5.16쿠데타 후 검찰총장, 중앙정보부 차장 같은 요직을 지내다가 이때는 법무부 장관으로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니까 문제가 있다고 해서 대한변협에서 사퇴를 요구한 것이다. (물론 박정희는 이때 민복기도, 신직수도 경질하지 않았다. 민복기는 1978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대법원장으로 계속 있었고, 신직수는 1973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정권 차원에서 사건을 조작해 1975년 8명을 처형한 ‘사법 살인’인 제2차 인혁당 사건 당시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 민복기는 대법원장이었다. <편집자>)
사건이 커지고 시끄러워지니까 8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판사 독직 사건을 전부 백지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검찰은 곧 사건을 불기소 처분했다. <편집자>) 그렇지만 바로 다음 날, 이번엔 대법원 판사들도 사법권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했다. 그리고 서울형사지법, 서울민사지법 판사들은 관계 기관 인사들의 인책 사퇴를 요구했다. 8월 27일에 가서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민복기 대법원장이 재경 법관 전체 회의를 소집하고 ‘내외 정세를 감안해 사표를 철회하라’고 호소했다. 사표를 냈던 판사들이 그 후 법정에 복귀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런데 이 파동의 경우 유심히 봐야 할 것이 있다.
사법부 파동을 계기로 사실상 박정희 권력에 예속된 사법부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을 비롯한 여러 법원에 속한 많은 판사들이 호응해 잘 싸운 사건이지만, 그리고 박정희가 판사 독직 사건 백지화 지시를 내려 얼핏 보기에는 판사들이 이긴 것처럼 비치는 면도 있지만, 그러나 사법부 독립을 모색한 사법부 파동을 계기로 사법부가 사실상 박정희 권력에 예속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게 우리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큰 아니러니인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전체적으로 보면 대학 교수들의 자주화 선언이나 언론 자유 운동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교수들의 자주화 선언이나 언론 자유 운동은 당시 별 효과를 못 보지 않았나. 언론은 권력에 예속되고 대학도 자주적인 활동을 더 하지 못하게 되며, 유신 쿠데타 이후에는 철통같은 감시 아래 놓이게 된다. 그것과 비슷한 것들이 사법부에도 적용된다. 직접적으로는 이범열 판사와 최공웅 판사가 사표를 냈다. (1971년 9월 대법원은 이범열 판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최공웅 판사의 사표는 반려했다. 결국 이범열 판사는 그렇게 법복을 벗게 된다. <편집자>) 그리고 서울형사지법에서건 서울민사지법에서건 앞장서서 싸웠던 판사들, 제일 똑똑하고 사법부 독립을 강렬하게 주장했던 그분들이 있어서 그렇게 잘 싸울 수 있었던 건데 이 양반들 중 여러 명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직간접적인 여러 압력을 8월 27일 이후에 받은 것이다. 1973년에 들어서면 법관 재임용에서 아주 똑똑한 판사들이 탈락하게 된다.
그러니까 유신 체제가 성립될 때쯤 되면 이미 사법부는 더 이상 독립성을 가졌다고 하기가 어려운 상태가 된다. 아울러 사법부가 독립성을 갖기 어렵게 한 유신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실제로도 완연히 그런 상황에 접어들게 된다.
김덕련 전 기자
<2015-10-25>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시대, 정치 검찰의 ‘소신 판사 죽이기’ 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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