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0> 유신 쿠데타,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유신 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
[유신 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북한보다 야당이 더 못됐다? 박정희의 위험한 선동
[유신 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쿠바가 백악관 습격했다면”…분노한 박정희
[유신 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타임>은 왜 박정희 주장을 ‘상상’ 취급했나
[유신 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美·日이 박정희 쿠데타 초안에 퇴짜 놓은 이유
[유신 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경제 살리려 쿠데타? 치명적인 오해
[유신 쿠데타, 열 한째 마당] 전두환 ‘무시’, 박정희 ‘인정’? 자가당착 개발 독재
[유신 쿠데타, 열 두째 마당] 박정희 ‘핵 개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유신 쿠데타, 열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경제의 신’? 경제 실책으로 무너졌다
[유신 쿠데타, 열네 번째 마당] 박정희 시대, 정치 검찰의 ‘소신 판사 죽이기’ 대작전
프레시안 : 1970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역시 1971년 위기론을 짚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안 아닌가.
서중석 : 1960년 4월혁명 이후 학생 사회에서 민중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특히 1960년대 후반에 들어 커져간다. 그런 것이 학생 운동으로도 나타나지만 농활로도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1960년대 전반기에만 해도 농촌 봉사라고 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농촌 봉사라는 말을 여전히 쓰긴 했지만, 일부 서울대 학생들이 1960년대 후반 들어 농활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는 건 농촌 봉사가 아니다. 농촌에 봉사하러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농촌에 배우러 간다’고 하면서 그렇게 했다. 농촌에 들어가서 농민들과 같이 땀을 흘리고, 농민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로부터 배운다는 것이었다. 그걸 통해 농민과 일체가 돼서 농민들이 소외되지 않는 민중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걸 나중에는 의식화라고 부르던데, 어쨌건 그러한 마음 자세로 1960년대 후반에 서울대 법대, 문리대, 상대 등에서 들어갔고 그러면서 다른 대학에서도 그걸 따라서 하고 그랬다.
그런 가운데 1970년 11월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 사건이 학생들한테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전태일의 분신 투쟁은 정말 어려운 여건에서 운동을 펼쳤던 1970년대 노동 운동에 굉장한 영향을 줬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노동 운동에도 그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여튼 전태일의 분신 투쟁 직후부터 학생들은 이 투쟁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것이 노동자, 노동 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전환되는 걸 볼 수 있다. 1970년대 말부터 노동 야학 같은 형태로 노학연대의 원초적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도 항상 전태일의 분신 투쟁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 바이블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아울러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 운동, 양심수 운동, 민주화 운동을 지켜주고 타오르게 한 거목과 같은 존재로 이 시대의 양심을 대표했다. 그리고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됐던 <전태일 평전>은 참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며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그런데 이러한 1970년 11월 사건에 큰 관심을 가졌던 학생들이 광주 대단지 사건, 이걸 그 당시엔 광주 난동 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어쨌건 이 사건과 칼(KAL) 빌딩 방화 사건 같은 것을 보면서 또 충격과 영향을 받게 된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파월 기술자들은 왜 한진상사 칼 빌딩에 불을 질렀나
프레시안 :하나씩 살폈으면 한다. 칼 빌딩 방화 사건은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칼 빌딩 방화 사건은 그렇게 규모가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1971년의 주요 사건들은 대선 이전에 시작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을 빼놓고는 거의 다 4월 대선과 5월 총선 이후에 일어나는데, 이 사건도 그랬다.
간단히 살펴보면, 9월 15일 한진상사에서 과거에 베트남에 보냈던 파월 기술자 및 그 가족 400여 명이 한진상사 대표 조중훈에게 밀린 노임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면서 한진상사 본사가 있는 칼 빌딩에 진입, 국제선 항공 예약 데스크에 불을 지르고 직원들에게 폭행을 가하며 집기를 부쉈다. 한진상사 측은 계약에 따라 임금을 모두 지불했고 법정 투쟁에서 자신들이 이겼다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기술자들은 노임의 상당 부분을, 예컨대 연장 근로 수당이나 위험 수당 같은 걸 못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66명이 구속됐다. 이 문제와 관련해 10월 14일 재판이 열렸는데 이때 서울민사지법 합의 5부는 그때까지의 판결을 뒤엎었다. 파월 기술자 11명이 낸 소송이었는데, 재판부는 한진상사가 이들에게 수당 1197만여 원을 지급해야 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때 서울민사지법 합의 5부는 “한진상사와 파월 기술자들이 맺은 근로 계약서상에 기재된 임금 합계가 각종 수당을 포함한 것처럼 돼 있으나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현지에 가기도 전에 연장, 휴일, 야간 근로 수당액을 미리 책정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기술자들이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계약서에 서명할 때 한진상사 측이 기술자들에게 월급이 얼마라고만 말했을 뿐 수당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는 증언 등도 원고 승소 판결의 근거 중 하나였다. 1969년 11월 ‘미지불 임금 청산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고 임금 소송도 여러 건 제기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던 파월 기술자들에게는 반가운 판결이었다. 그러나 수당 1197만여 원은 애초에 기대했던 것에는 많이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이 판결 이후 법원이 파월 기술자들의 호소를 계속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이 판결 바로 다음 날인 10월 15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2부는 또 다른 파월 기술자 11명이 한진상사를 상대로 제기한 같은 내용의 소송에서 이번에는 한진상사 손을 들어줬다. 편집자)
서울에 무장 공비 출현? 무책임한 정부가 자초한 비극, 실미도 사건
프레시안 : 광주 대단지 사건은 칼 빌딩 방화 사건보다 훨씬 큰 충격을 사회에 줬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나.
서중석 : 광주 대단지 사건은 아주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려면 광주 대단지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를 봐야 하고, 그걸 보려면 이농 현상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농 현상은 한국전쟁 이후 많이 나타나지만, 특히 1960년대 후반에 대규모로 발생하면서 1970년대까지 엄청난 물결을 이루게 된다. 사실 1960년대 후반과 더불어 제일 큰 이농 현상이 일어난 때는 새마을운동이 전개된 유신 체제 시기다. 이것은 살기 좋은 농촌을 목표로 내걸고 시작된 새마을운동이라는 건 어떻게 된 것인가를 묻게 하는 큰 사태였다.
한국은 같은 지역에서 하나의 국가를 오랫동안 유지했다는 점에서도 참 특이한 나라다. 다른 말로 하면 고려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사회로 들어간 이후에는 다른 지역하고 교류가 별로 없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군사들이 일본 원정을 간다든가 하는 몇 가지를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자기 지역을 떠나지 않고 거기서 많이 살았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부여대해서 만주로 가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일본으로 품 팔러 가는 사람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그게 또한 강제 노역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국내에서도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1930년에서 1945년 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유대인 못지않은 인구 이동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또 한 번 일어난 것이다.
프레시안 : 1960∼1970년대 인구 이동 규모,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나.
서중석 : 한 통계를 보면 1960년에서 1965년 사이에 전국에서 95만3000명이 자기 지역을 떠났다. 이 시기에 67만2000명이 서울에 온 것으로 돼 있다. 전체 이동 인구의 70퍼센트가 넘었고 그만큼 서울로 집중된 것이다. 그다음 시기인 1960년대 후반기 이때 엄청난 인구 이동이 이뤄졌는데, 이때는 무려 249만2000명이나 된다. 그 이전 5년의 2.5배 정도에 이르렀다. 그중 61.6퍼센트에 해당하는 153만4000명이 서울로 왔다. 이렇게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이 이뤄지는 건 1970년대에도 비슷했다. 1971년에서 1975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187만3000명의 인구 이동이 이뤄졌는데, 그중 서울로 간 비중은 전체의 40퍼센트 이내로 팍 줄었다. 부산, 그리고 울산을 비롯해 공업과 관련된 새로운 지역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1976년에서 1980년 사이에는 1966년에서 1970년 사이보다 더 많은 인구 이동이 이뤄졌다. 257만3000명에 이르렀다. 새마을운동이 굉장히 열띤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다가 이때쯤 하강 국면에 들어갔는데, 그때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이뤄졌다.
1966년에서 1970년 사이의 인구 이동은 굉장한 한해와 홍수, 그중에서도 특히 한해가 심했던 것과도 연관이 있었다. 당시 전라도 호남선, 전라선 역전마다 보퉁이를 들고 이고 한 남녀들이 많이 헤매던 풍경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자주 떠오른다. 정처 없이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특히 전라도 쪽에서 많이 떠났다. 1970년대에는 전라도에서 경상도 쪽으로도 많이 갔는데, 그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쪽에 공업과 관련된 지역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지대에 세운 시민 아파트…”그래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프레시안 : 정처 없이 서울로 떠나는 사람들 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말 그대로 번듯한 집과 일자리를 구해놓고 이주하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서중석 : 그러니까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판잣집이라든가 불량 주택에서 살거나 집 없는 셋방살이를 하는 인구를 대량으로 산출했다는 것을 얘기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70년 4월 현재 도시의 무주택자가 48.5퍼센트나 됐다. 대구가 제일 높아서 59퍼센트였고 부산은 56퍼센트였으며 원주, 서울, 인천, 의정부도 각각 50퍼센트를 넘었다.
이런 무주택자나 아주 형편없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는데, 이 사람들의 대다수는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게 박정희 정권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서울의 경우 무허가 불량 주택이 1961년에 8만4440호였는데 1964년에는 11만6200호, 1970년에는 18만7500호였던 것으로 통계가 나와 있다. 1966년 말 서울시내 판자촌 인구가 약 127만 명이나 됐다. 당시 서울시 인구의 3분의 1 정도나 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1966년 김현옥이 서울시장에 부임했다. 김현옥은 박정희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할까, 박정희가 제일 좋아하는 유형이었다. 그야말로 성장이나 발전을 위해 막 밀어붙이는 불도저 스타일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부산시장으로 있을 때 불도저 시장의 면모를 보여줬고 그래서 서울시장으로 발탁된 사람 아닌가. 이 사람은 1967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무허가 주택 양성화 사업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건 사실상 선거용 공약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지속성을 갖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무허가 주택 양성화 사업은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정책이 있었다. 하나는 철거민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민 아파트(시민 아파트)를 건립하는 정책이었다. 그중에서 서민 아파트 건립 정책이 서울시내의 경우 우선 눈에 띄었는데, 그 문제점을 단번에 싹 드러낸 것이 유명한 와우아파트 도괴 사건이었다. 1970년 4월에 아파트 한 동이 성냥갑 무너지듯 폭삭 주저앉아 그 거주자 가운데 33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일어나서, 바로 전달(1970년 3월)에 발생한 정인숙 피살 사건과 함께 큰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이게 광주 단지 사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시민 아파트 건립 정책에서 보여준 김현옥 시장의 밀어붙이기 정책을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민 아파트 도괴 사건 또는 붕괴 사건이 일어난 건 한마디로 엉터리로 지었기 때문이다. 우선 실제로 투입된 공사비가 너무나 적었고, 업자는 거기에 맞춰 날림 공사를 했다. 공사 기간도 문제였다. 예컨대 시멘트를 양생하는 데 4주가 걸리는 것 등을 충분히 감안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안전하고 튼튼하게 지을 수 있는 건데, 서울시는 처음부터 빨리 완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착공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와우아파트를 준공했다. 이런 것들 외에도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부실이었다. 그러니까 준공한 지 넉 달 만에 와르르 무너진 것 아니겠나. (공사 계약을 따낸 업체는 부실기업이었다. 이 업체는 커미션을 챙기고 무자격 업자에게 하청을 줬다. 현장을 감독해야 할 공무원은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부실 공사를 눈감아줬다. 그렇잖아도 충분치 않게 책정됐던 공사비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그 결과 택지 조성비 등을 제외하면 실제 건축비는 평당 1만 원도 채 안됐다고 한다. 업자는 제대로 된 지질 검사 같은 건 실시하지도 않았고, 기둥 하나에 70개씩 넣어야 할 철근을 고작 5개만 넣는 식으로 날림 공사를 했다. 그렇게 부실하게 지어진 와우아파트는 완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 조짐을 드러냈다. 벽체에 금이 가는 등의 심각한 문제를 발견한 주민들은 관공서에 이를 신고했다. 그러나 관청은 이를 묵살했다. 결국 와우아파트는 정상 하중의 3배를 견디다 무너졌다. 편집자)
불도저식, ‘빨리빨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와우아파트지만 다른 데에도 이것과 비슷하게 지은 경우가 많지 않았겠나. 그런데 와우아파트가 건립된 입지는 70도나 되는 경사진 산비탈이었다. 이럴 때에는 그런 경사로 인해 가중되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 시공했어야 하는데 그런 고려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문제는 당시 서울의 시민 아파트가 다 이런 고지대에 건립됐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내가 대학 다닐 때 이처럼 고지대의 시민 아파트를 참 많이 봤다. 고지대 건립은 저지대 건립에 비해 자재 운반, 공사 진척 등 모든 것에서 힘이 더 들고 건립 비용도 더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랬다.
프레시안 : 왜 그런 곳에다 지은 건가.
서중석 : 정부는 싼 가격으로 빨리빨리 지으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산비탈이나 산등성이에 지어놓았느냐.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서울시 간부로 있었던 손정목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쓴 게 있다. 그걸 보면 한 간부가 ‘왜 이렇게 높은 데다가 아파트를 지어야 하느냐. 공사하기도 힘들고 입주자들이 출퇴근하기도 힘들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을 물어본 것이다. 그러자 김현옥 시장이 “야 이 돌대가리야, 높은 데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박정희 시기 경제 정책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장면이다.
하여튼 와우아파트 사건이 나자, 박정희 정권은 할 수 없이 김현옥을 서울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 뒤를 이어 양택식이 서울시장이 됐다. 그러면서 이해 시민 아파트 건립 계획이 전면 백지화됐다. 그런데 서울시장에서 쫓겨난 김현옥은 바로 다음 해(1971년)에 내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박정희가 밀어붙이기식 경제 건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당일(1970년 4월 8일) 참사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면. ⓒ<경향신문> |
대책 없는 집단 이주 정책의 산물, 광주 대단지 사건
프레시안 :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난 지 1년여 만에 이번에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난다. 광주 대단지는 당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나.
서중석 : 시민 아파트 건립 정책이 그렇게 되면서 남은 것은 철거민 집단 이주 정책이었다. 이건 부분적으로 이미 시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가장 큰 규모의 철거민 집단 이주가 이뤄진 데가 바로 광주 대단지라고 불리는 지금의 성남시 일대였다. 서울시는 당시 광주로 불린 이 지역에 양택식 시장 취임 이전에 이미 택지 정지 작업을 2개월 동안 하고, 철거민들이 1969년 5월부터 들어와서 살도록 청소차, 공용차를 이용해 광주 대단지로 이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했느냐. 1970년 6월 현재, 그렇게 해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2655세대는 집이 있었고 1700세대는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고 신문에 보도됐다. 이 사람들은 상하수도나 전기 시설이 없어 냇물을 길어다 쌀을 씻었고, 뒷산에서 생나무를 베어다 밥을 지어 생활했다. 전기가 없으니까 호롱불로 불을 밝혀야 했다. 수천 가구가 살았는데도 공동 화장실이 너무나 부족했다. 12개밖에 안됐다고 그런다. 그래서 인근 야산이 온통 인분으로 뒤덮이기도 했고, 그러면서 이질,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수인성 전염병도 심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1970년 초여름만 해도 하루에 서너 구의 시신이 실려 나오는 실정이었다고 그런다.
다시 말해 정부가 무작정 이주만 시켜놓은 다음에 적절한 생활 환경 같은 건 마련해주지 않은 채 이주민들을 방치한 것이다. 그로 인한 불만이 쌓여 광주 대단지 사건이 터지게 된다. 광주 대단지 사건 부분은 장세훈 교수가 쓴 글을 많이 참조했는데, 그 글에 의하면 1971년 8월 10일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 뒷산에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벌거벗은 산자락을 가득 메운 이들은 가슴에 “살인적 불하 가격 결사반대”라는 리본을 달고 손에는 “배가 고파 못 살겠다”, “일자리를 달라”, “영세민을 착취하지 말라”, “토지 불하 가격을 내려달라”, “100원에 산 땅 10000원에 파는 폭리를 중단하라” 같은 피켓을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양택식 서울시장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 시장은 약속 시간을 훨씬 넘긴 오전 11시 30분경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내리던 빗줄기가 더 굵어지면서 군중 사이에서 고함, 욕설 같은 게 터져 나왔고 피켓과 플래카드의 버팀목들이 어느새 각목으로 바뀌면서 사달이 나게 된다. 11시 45분경 성난 군중이 광주 대단지 사업소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기물을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지르자 출장소가 아수라장이 됐고, 그러면서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흥분한 군중은 “죽여라”, “부숴라”, “밟아버려라” 등 구호를 외치면서 관공서 기물, 관용 차량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차량 10여 대를 탈취해 플래카드를 치켜든 채 허름한 가건물과 천막이 빽빽이 들어찬 광주 대단지 거리를 질주했다.
오후 들어서 서울시경, 경기도경의 기동 경찰 700여 명이 나타났는데 오히려 군중의 흥분이 더 가열됐다. 2000여 명의 주민들이 10여 대의 시영 버스에 나눠 타고 “이제 서울로 가자”고 하면서 수진리 고개를 넘어 서울시 경계에 이르렀다. 그때 출동한 기동 경찰하고 맞부딪쳤다. 경찰의 최루탄 세례에 투석전으로 맞서지만, “서울로 가자”는 건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오후 2시 30분경 격분한 데모대가 광주경찰서 성남지서를 부수고 순찰차 1대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5000여 명의 주민이 “잘한다”고 하면서 고함을 지르고 그랬다.
이게 우리가 아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9월 9일 서울지검은 21명을 구속 기소했다. 그렇지만 9월 13일 주민들 가운데 토지 사기 사건 같은 것으로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8000여 가구의 주민 대표 100여 명이 데모를 하고 200여 명은 단식 연좌 농성을 벌이는 등 그 후에도 사건이 일어났다.
프레시안 : 전태일 분신에 많은 관심을 보인 학생들이 광주 대단지 사건과 칼 빌딩 방화 사건에도 관심을 보이고 영향을 받았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광주 단지 사건이라고도 이야기하고 광주 단지 폭동 사건이라고도 이야기하는 이 사건하고 칼 빌딩 사건은 산업 노동자와 관련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이 시기는 규모가 큰 산업 노동자가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던 때이지 않았나. 그래서 규모가 큰 산업 노동자들이 노동 운동 같은 걸 통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 1970년대 초의 대표적 노동 소설이라고 하는 황석영의 <객지>에도 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막일꾼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어쨌건 휴전 협정 후 처음으로 빈민 봉기와 비슷하게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광주 대단지 사건을 매우 주목했다. 그런 가운데 칼 빌딩 방화 사건이 또 일어났다. 그와 더불어 8월과 9월에는 서울과 대구의 시장 상인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전엔 없던 사건들이 이렇게 일어나니까 학생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상당히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할까, 즉 ‘자기 자신의 문제로 들고일어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느냐’, 이런 분위기도 있고 그랬다.
광주 대단지 사건과 관련해 기억나는 게 한 가지 있다. 1975년으로 기억하는데, 어떤 출판사 일 때문에 광주 단지에 가서 1월 그 추울 때에 상당히 여러 날 여관에 머문 적이 있다. 그 여관의 세 가지 특징이라고 내가 강의할 때도 많이 이야기한 것인데, 당시 광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거기서 봤다. 그때 큰 여관을 찾아다녔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는 데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내가 묵은 곳이 작은 여관이 아니었는데도, 나처럼 별로 크지도 않은 사람도 일직선으로 발을 뻗고 자기가 만만치 않을 정도로 방도 좁았다. 그리고 이불을 몇 겹 뒤집어써도 추울 정도로 아주 추웠는데, 그 추운 겨울에 창이 전부 단창으로 돼 있었다. 그래서 마치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추운 공기가 매섭게 들어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추워서 잠도 안 오는데, 방 사이를 판자로 막아놓은 것인지 예닐곱 개 정도 되던 방들 사이의 이야기가 다 들렸다. 벽을 두껍게 하지 않은 것이다. 괜찮다는 여관조차 이 정도였으니, 당시 10여만 명이 살았던 그 단지의 일반 사람들 대다수가 그 추운 겨울에 어떻게 살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대규모 이농…너나없이 살던 곳을 떠난 사람들
프레시안 : 광주 대단지 사건 후 몇 년이 지난 때인데도 그런 상태였으니 사건 당시에는 어땠을까 싶다.
서중석 : 이제 1971년에 일어난 큰 사건 중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살펴본 사건들과는 또 다르게 아주 특이한 사건이었던 실미도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자. 처음에는 ‘공비’ 사건으로 돼 있었는데,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모는 장기간에 걸쳐 제대로 알려졌다고 보기가 어렵다. 2003년에 영화 <실미도>가 나오면서 이 사건의 진상이 상당 부분 알려지게 된다. 그 영화를 참 많은 사람이 보지 않았나. 사실 그전에는 실미도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북파 공작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비롯해 이 사건의 진상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1968년 1.21사태 후 이 사람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는데, 그 후 남북 관계가 변하면서 북파를 할 수 없게 됐고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처리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자 분개한 이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이 바로 실미도 사건이다.
이 사건도 1971년 8월에 일어났다. 8월 23일 대간첩대책본부장이던 김재명 중장이 놀라운 소식을 발표했다. 서울 침투를 기도한 북괴 무장 공비 21명이 인천 남쪽 송도 부근에 나타나 군경 및 예비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후 무장 공비들은 민간 버스를 탈취해 부평 소사를 거쳐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가 저지됐다는 것이었다. 21명이나 되는 무장 공비가 노량진, 대방동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했으니 사람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꼭 중심가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때는 서울 중심가 쪽이라고 볼 수도 있었는데,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그런데 몇 시간 후 국방부에서 정정 발표를 했다. 무장 공비가 아니라 인천 앞바다 실미도라는 데에서 공군이 수용·관리하던 군 특수범들이 벌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부 발표가 오락가락했으니, 그렇잖아도 놀란 시민들은 혼란 속에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9월 16일에 가서 김종필 총리가 국회에서 이 사람들이 군 특수범이 아니라 군 특수 부대 요원이었다는 것까지 밝히기는 했다.
8월 23일 무장한 특수 요원들이 민간 버스를 타고 서울에 들어올 때 요구 조건이 있었다. ‘우리에 대한 진실을 밝혀라’, 이게 핵심이었던 것 같은데 군경 수색대와 모두 네 차례의 교전을 했다. 결국 수류탄이 폭발해 요원 14명과 민간인 3명이 폭사했는데, 이것도 논란이 많이 됐다. 교전 과정까지 포함하면 민간인 6명과 경찰관 등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게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실미도 사건이다. 이처럼 실미도 사건에 이르기까지 1971년에 큰 사건이 많이 일어난 건 사실이다.
(사건에 가담한 실미도 부대원은 21명이 아니라 24명이다. 당시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사건 발생 후 서울과 경기 등에는 비상령이 내려졌고 공항은 임시 폐쇄됐다. 또한 한강 인도교에 군 장갑차가 출동해 다리를 차단했으며, 정부종합청사는 출입증을 바꾸고 법원은 재판을 연기하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아울러 영등포 일대에서는 집 밖에서 놀던 아이들을 찾는 엄마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영화 <실미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영화의 설정이 사건의 실제와 일부 다른 점 때문에 잘못 알려진 부분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실미도 부대원들의 출신 및 신분 문제다. 영화에서는 사형수를 비롯한 중범죄자들이었던 것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미도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국방부 과거사 진상 규명 위원회는 2006년 7월 이들이 군 특수범이나 사형수를 비롯한 중범죄자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고 발표했다. 현역병 입영 또는 장교·부사관 임용 처분이 없었고 사건 후 진행된 군사 재판에서도 이들을 민간인으로 간주했던 점 등으로 볼 때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모집관들은 장교 임관, 미군 부대 취직 등을 내걸고 이들을 모아 실미도로 데려갔다. 그러나 정부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정책 변경 후 이들을 방치했다. 그에 더해 사건 발생 후에는 이들의 신분을 왜곡하고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 실미도 부대 창설을 주도한 중앙정보부는 사건 발생 후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편집자)
김덕련 전 기자
<2015-10-25>프레시안
☞기사원문: 왜 하필 거기에…”그래야 청와대서 잘 보이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