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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교과서 전면해부① “김구, 항일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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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8년 5월26일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이하 뉴라이트 교과서) 출판기념회에서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임기 첫해인 2013년 나온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이하 교학사 교과서)는 애초 2261건의 오류가 발견됐고 이후 오류 수정에도 문제점이 많았지만, 교육부는 검정을 통과시키는 등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박 대통령은 27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 왜곡이나 미화가 있지 않을까 일부에서 우려하고 있지만 그런 교과서가 나오는 것은 저부터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새로 나올 국정 교과서의 ‘역사 왜곡’과 ‘미화’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기 힘들다.


박정희, ‘공’ 부풀리고 ‘과’ 합리화

“측근 부정부패에 엄격…근면·검소”

5·16 쿠데타를 “일대 변혁” 평가

군부세력은 “가장 유능한 집단”

유신은 ‘주변정세 이유’로 정당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일명 ‘뉴라이트 교과서’)에 나오는 박정희 서술


■ 박정희 전 대통령 ‘공’ 부풀리고 ‘과’는 합리화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문제 중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서술이다. 특히 300여쪽에 걸쳐 근·현대사만 상세히 다룬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의 ‘공’을 부풀리고 ‘과’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186쪽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한국 사회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장의 잠재력을 최대로 동원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그의 집권기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의 이륙을 달성했으며, 사회는 혁명에 가까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측근의 부정부패에 대해 엄격했으며, 스스로 근면하고 검소하였다”와 같은 서술이 대표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미 ‘쿠데타’로 정리가 끝난 5·16에 대한 설명도 위태롭다. 뉴라이트 교과서 180쪽을 보면, 쿠데타를 주도한 군부 세력을 6·25 전쟁 이후 “가장 유능하고 잘 조직된 집단”과 “‘조국 근대화’의 강렬한 포부를 지닌 젊은 장교들”로 묘사한다. 쿠데타의 핵심인 박 전 대통령은 “군부에서 청렴한 이미지로 명망을 얻고 있던” 인물로 서술한다.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해 “5·16은 일부 군부 세력이 (…) 정부를 불법적으로 전복한 쿠데타”라는 정의가 나온다. 언뜻 5·16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초안에서 ‘5·16 혁명’으로 표기했다가 역사학계의 거센 반발로 마지못해 수정한 표현이다. 특히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5·16에 대한 평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치기능 면에서 5·16 쿠데타는 근대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수행할 능력이 결여된 구정치 세력과 그에 도전한 급진이념의 정치 세력 모두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이 국가권력의 중심부를 장악한 일대 변혁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반헌법적 조처들은 주변 정세를 이유로 합리화한다. 교학사 교과서 325쪽은 북한의 군사공세 강화와 미국의 닉슨독트린을 설명한 뒤 “이 같은 긴박한 분위기에서 박정희는 1971년 12월 국가 비상 사태를 선언하였다. 또한, 통제와 동원을 쉽게 하기 위하여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고 말한다. 심지어 뉴라이트 교과서는 10월 유신에 대해 “개인의 권력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며 “한국을 둘러싼 국가안보와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를 맞아 (…) 자신에게 집중된 행정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205쪽)고 서술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군인이 되고 싶은 평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40년 만주국 군관학교에 입학했다”(186쪽)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꿈의 실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실장은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교사직마저 그만두고 일본 관동군이 만든 만주국의 장교로 복무했다는 것은 일제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의 전형”이라고 설명한다.


이승만, 300여쪽 중 41쪽 할애

“임시정부 승인 획득운동의 주역

대한민국 기틀 잡는 데

어느 누구보다 커다란 공훈”

김구, 300여쪽 중 달랑 5쪽뿐

“한인애국단 조직, 항일 테러활동”

“통일정부 교섭 벌였으나 실패” 등

부정적인 서술이 주를 이뤄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일명 ‘뉴라이트 교과서’)에 나오는 이승만·김구 서술


■ 이승만은 부각, 김구는 무시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에 관련한 서술에서도 뉴라이트 교과서의 ‘편향성’은 잘 나타난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경우 이승만과 관련된 소개가 나오는 부분은 전체 본문 300여쪽 가운데 41쪽으로 6·25 전쟁(38쪽)보다도 많다. 반면 김구의 이름은 5쪽에 걸쳐 간단하게만 등장하고, 그나마도 부정적인 서술이 주를 이룬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고려공산당 당원과 반이승만 세력(…)에 의해 탄핵, 면직되었다”(58쪽)고 설명한다. 그러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임정의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이 미주에 머물면서 임정을 돌보지 않았고, 임시의정원이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임명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주 동포들로부터 거두는 인구세를 임정에 보내지 않고 임의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승만을 탄핵했다”고 지적했다.


이 전 대통령을 영웅화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교학사 교과서는 “임시정부 승인 획득 운동의 주역은 이승만이었다”(293쪽)며 독립운동의 공을 이승만 개인에게 돌린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이승만의 삶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한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158쪽)고 요약한다.


독재와 친일파 척결 실패 등 이 전 대통령의 과오는 합리화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친일파 청산보다 내부 단결과 반공 태세가 더 급하다고 생각하였다”(145쪽)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치됐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실패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또 “노쇠한 대통령의 후계를 노리는 자유당 강경파의 집권욕은 국내 정치의 혼란을 부채질하였다. (…) 그들은 유권자를 조작하거나 개표결과를 조작하는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173쪽)며 부정선거의 책임을 자유당에 전가한다.


김구 선생은 뉴라이트 교과서에서 가장 홀대받는 인물 중 하나다. 이 교과서는 김구 선생에 대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테러활동을 시작하였다”(129쪽)고 설명한다. 역사학계가 ‘의열투쟁’으로 부르고 일반인들이 ‘독립운동’이라고 여기는 김구의 활동을 ‘테러’라고 표현한 것이다. 129쪽을 보면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를 반대하고, 북한에 들어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박찬승 교수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키고,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불참했다는 점을 외면한 서술”이라고 지적한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2015-10-29> 한겨레

기사원문: 뉴라이트 교과서 전면해부① “김구, 항일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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