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뉴라이트 건국절 주장 수용…‘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교육과정 변경 고시
▲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화 역사교과서 집필진 구성과 편찬 기준 등을 설명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
국정 역사교과서에 ‘친일파 복권’의 토대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 대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이 실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부’라는 단어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수립일이 되면, 1919년 3·1운동 후 수립된 임시정부와 항일의 역사를 부정하는 셈이 된다. 이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인 광복절을 평가절하하면서, 친일파 복권을 위해 ‘건국절’을 주장해 온 뉴라이트 진영의 요구와 맥을 같이 한다.
제헌헌법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 건립…”
이명박 정부때부터 뉴라이트 진영 ‘건국절’ 주장
역사학계 “친일파 복권 노리는 것” 반발
역사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규정한다.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 후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제헌헌법’에는 좀더 분명히 나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 뉴라이트 인사들이 1945년 8월 15일 광복보다는,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 수립일을 강조하면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삼자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삼자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이승만 정부 출범부터 대한민국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것으로, 독립운동사 중심의 근대사가 축소되게 된다. 이를 통해 노리는 것은 친일파 복권이라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역사학계에서는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보는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해 “그 이전 임시정부를 포함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라며 반발해왔다.
그러나 당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에 보조를 맞췄다. 2008년 정부는 국무총리 산하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선언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 등은 8·15를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법률안까지 발의했다가 여론의 반대로 철회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8월 15일 오전 서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0주년 광복절 중앙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뉴시스 |
박근혜 대통령 8·15 경축사
지난해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6주년” -> 올해는 “건국 67년”
교육부 교육과정 고시에서 ‘정부’ 빼고 ‘대한민국 수립’으로
이명박 정부 때 무산됐던 뉴라이트의 숙원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로 이제 절반의 성공 단계에 와 있다.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고 있는 정부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에 화답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재외동포 여러분,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박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건국’이란 단어를 쓴 건 처음이었다. 2014년 8·15 경축사 때는 “오늘 제69주년 광복절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66주년을 맞이하여…”라고 했었다.
8·15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의 표현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66주년’에서 ‘건국 67년’으로 바뀐 건 일종의 역사 쿠데타의 신호탄이었다.
한 달여 뒤인 9월 23일 교육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했는데, 기존 고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란 표현에서 ‘정부’ 단어를 삭제하고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꿔놨다.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표현한 건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셈이다.
고시 다음날인 24일 ‘친일·독재미화 교과서 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라는 대한민국사의 정통성을 친일과 독재에 대한 긍정의 역사로 대체하려는 보수정권의 역사 쿠데타가 본격화된 셈이다”라며 “뉴라이트와 교육부의 야합을 규탄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건국절 주장 반발 크자, 우회 전략으로
건국절 주장은 논란도 많고 반발도 커서 수용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결국 뉴라이트 진영이 이를 감안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정부’라는 단어를 빼 버리면서 사실상 ‘건국절’ 주장을 관철하는 효과를 내는 우회전략을 택한 것이고, 교육부가 이를 수용한 셈이다.
도종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6일 교육부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그런 정황이 나와 있다. 지난 8월 중순 편찬준거 개발 자문회의에 참석한 한 자문위원은 “○○○ 선생이 1948년 건국을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 표현하지 말고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하면 건국절을 주장하는 분들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라며 “편수용어 검토 시 이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초 열린 회의에서 또 다른 자문위원은 “‘성취기준’의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정’을 ‘대한민국의 수립 과정’으로 바꾸면 좋겠다”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건국이었으므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다면 ‘정부’라는 용어는 빼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검토의견서를 제출했다.(경향신문 7일 보도)
교육부가 고시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은 교과별 학습목표와 교수방법 등이 지금과 비교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이다.
교육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 고시와 함께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구체적인 편찬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병행해왔다. 국정 역사교과서 기술의 보다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국편의 편찬기준은 이달 말 확정·발표될 예정이다.
▲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고시한 3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규탄 긴급 결의대회에서 중학생이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
“친일파도 한국 역사의 주역으로 재평가하자는 것”
국정 역사교과서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 또는 ‘건국일’로 기술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 여론도 좋지 않고, 역사학계에서 반발이 크다. 하지만 최소한 현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일’이라고 바꿀 수 있는 토대는 교육부가 고시를 통해 마련해놨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에 대해서는 국민의 3분의2가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도 맹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래서 우회하는 방법으로 내용은 (건국과) 같지만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이고, (자문회의에서) 표결에 붙였는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주장쪽이 다수였다. 그런데 교육부가 확정 고시를 하면서 슬그머니 ‘1948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꿔버렸다”라고 지적했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친일파라도 1945년 8월 15일 이후 3년 동안 ‘건국’에 참여한 공로자들은 건국 유공자로 재평가하고 훈장도 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건국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니까 친일파를 한국 역사의 주역으로 재평가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정웅재 기자 jmy94@vop.co.kr
<2015-11-07>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국정교과서의 “대한민국 수립” 기술, 친일파가 건국 유공자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