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집필진 신형식·최몽룡, 식민사관 집대성한 이병도의 제자 최몽룡은 성희롱 논란으로 이틀 만에 자진 사퇴
▲ 보수 원로 사학자인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가 국정 역사 교과서 대표집필진으로 나섰다. 신 교수는 11월4일 국사편찬위원회가 마련한 국정교과서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했지만(왼쪽), 최 교수는 제자들의 만류로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한 채 자택에서 언론사 취재에 응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연합뉴스
국정 역사 교과서가 첫 민낯을 드러냈다. 편찬 책임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11월4일 국정 역사 교과서 대표 집필진 2명을 처음 공개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신형식(76·사학)과 서울대 명예교수 최몽룡(69·고고미술사학)이 각각 선사시대와 고대사의 집필 책임자로 정해졌다. 대표 집필진 공개 이틀 만에 최몽룡이 자택에 취재 온 여기자를 성희롱했다는 논란으로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진 구성 작업은 일단 돛을 올렸다.
공개된 대표 집필진은 선사시대·고대사 부문
모두 6개 분야로 나뉜 시대사별 대표 집필진 가운데 고려·조선·근대·현대사 분야 4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국편은 브리핑에서 “(나머지) 대표 집필자가 거의 확정된 상태”라면서도 “당사자들과 충분히 검토하고, 집필에 방해가 없을지 따져서 적당할 때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대표 집필진을 포함한 실무진은 중학교 교과서(역사) 21명, 고등학교 교과서(한국사) 15명이 배정됐다. 국편 누리집에서 11월4~9일 ‘교수·연구원·현장 교원’을 대상으로 25명 규모의 집필진 공모에 나섰다. 일부는 초빙 방식으로 구성된다.
국편은 신형식과 최몽룡을 ‘얼굴마담’으로 활용했다. 일단 이들을 앞세워 새 교과서의 권위를 올리고, ‘집필진 비공개’ 논란을 최소화하자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들이 역사학계 원로인데다, 새 국정 역사 교과서 논란의 핵심인 근현대사를 직접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최몽룡은 대표 집필진으로 초빙된 경위를 묻는 질문에 “말이 대표지, 진짜는 근현대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대표 집필진이다. 나를 끌어들여야 김(정배) 위원장이 산다. 나는 그냥 방패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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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 국정교과서를 두고 ‘친일·독재 미화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유이하게’ 공개된 대표 집필진이 친일 역사학자이자 지금까지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의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란의 여지가 있다. 국정교과서 총대를 멘 김정배 국편 위원장도 이병도와 함께 식민사관을 만든 친일학자 신석호(1904∼81)의 직계로 꼽힌다.
새 국정 역사 교과서의 선봉에 나선 이들이 친일학자들과 어떤 연관을 맺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부교수는 책 <식민지 불온열전>(2013)에서 “일제 시기 최고의 역사 전문가라면 이병도와 신석호”라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은 ‘조선사편수회’를 다니며 본격적인 역사학자로 발돋움했다. 편수회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정당화할 이론적 토대와 조작된 식민사관을 집대성한 곳이다. 한국사를 교묘하게 뒤트는 방식으로 친일에 가담하는 이른바 ‘연구보국’을 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 시절 윤재식 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타율성론과, 왕조의 교체 등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설명하는 정체성론이 식민사관의 핵심이다. 이렇게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핵심으로 하는 식민사관을 제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조선사편수회이며, 그 대표적 성과물이 <조선사>라는 저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1938)를 보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이 편수회 고문으로 참여해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고 있던 문중의 족손(族孫) 이병도를 발탁한 것으로 돼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병도는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편수회의 촉탁을 받아 일본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와 함께 10년여에 걸쳐 <조선사> 1~3편을 편찬했다. 당시 함께 일한 이가 신석호였다. 그는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1929년에 졸업하고, 해방 즈음까지 편수회 수사관으로 재직했다.
친일 유산 후학에 남긴 이병도·신석호
문제는 이들이 해방 뒤 친일의 허물을 벗고 우리 역사학계를 주무르며 친일 유산을 후학들에게 남겼다는 점이다. 신석호는 해방 뒤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를 만들어 국사 교사들을 가르쳤다. 국편의 전신인 국사관에서는 1946년부터 3년간 관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고려대, 성균관대, 영남대 등에서 교수, 학장, 대학원장을 거치며 후학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줬다.
또한 이병도는 1946년 9월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를 시작으로 국민대, 성균관대를 거치며 현재 주류 사학계의 원로가 된 학자들을 키웠다. 그는 1955년 국편 위원을 거쳐 1960년 문교부 장관이 겸직하는 국편 위원장도 맡았다. 친일 행위를 했던 이들이 입맛대로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고, 국사 교사를 양성하는 일을 책임진 셈이다. 이 불편한 유산을 지금 국편이 고스란히 다시 짊어지고 있다.
이들의 서울대와 고려대 직계 제자로 꼽히는 이들이 신형식·최몽룡·김정배다. 신형식은 이병도가 서울대 교수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떠나던 1961년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이번에 ‘올바른 역사 교과서 찬성 교수’ 지지 의견을 낸 원로 사학자 7명 가운데 하나이자, 2년 전 ‘친일 독재 미화’ 논란이 빚어졌던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 중학교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고,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국사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신형식은 최근 ‘황교안 총리가 현행 교과서의 99.9%가 편향됐다고 한 데 공감하냐’는 질문에 “그 사람들이 거짓말 시켰겠습니까? 약간의 문제가 있겠지요”라며 안이한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최몽룡은 지난 11월4일 언론사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언론에서 나를 친일 역사학자라고 표현했지만 누구보다 진보적인 역사학자다. 나는 이병도 선생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1987년 10월27일치 <매일경제신문>에는 “역사학계 원로 두계 이병도 선생의 구순을 기념하는 한국사학논총이 출간돼 학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며 논문을 기고한 ‘2세 제자’ 가운데 하나로 최몽룡을 꼽고 있다. <주간조선>이 2011년 쓴 ‘한국의 명가-이병도’편에서도 “이병도의 제자로는 이기백 (…) 최몽룡·민현구 등이 있으며, 모두 학계의 중진들”이라고 적고 있다. 최몽룡은 노태우 정권 시절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고, 2007년 고교 역사 교과서에서도 집필을 맡았다. 최근 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제 황교안 총리식으로 하자면, 검인정 교과서가 실패했다고 하니까 그걸 우리가 따지고 들 얘기는 아니잖아. 정부 쪽을 믿으면 (교과서가) 잘 나와요”라고 말했다.
서울대 인맥의 이병도 사단이 있다면, 고려대 학맥의 신석호가 키워낸 대표적인 제자가 김정배다. 국정 역사 교과서 추진에 총대를 멘 김정배 국편 위원장이 국내 고고사 연구에서 신석호의 수제자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정부 믿으면 (교과서) 잘 나온다”는 역사학자
역사저술가 황순종은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에서 “이병도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장악해 제자들에게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주입시켰다. 또한 신석호가 고려대와 성균관대 사학과에 재직하면서 여기도 또한 식민사학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병도와 신석호는 국사관도 장악했고, 또한 임시중등국사교원양성소도 장악해 여러 대학과 국사관에서 계승한 일제 식민사학을 교사들에게 그대로 주입시켰다. 그래서 해방 70여 년이 되도록 일제 식민사관이 사회 각계에서 주류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2015-11-09> 한겨레21
☞기사원문: 국정 역사 교과서 ‘얼굴마담’의 품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