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6> 유신 쿠데타, 열아홉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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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박정희가 10.17쿠데타를 단행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런 자신감을 갖게 만든 당시 상황을 부문별로 살피고 있는데, 지난번에는 유신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사법부 그리고 정치권 중 여당의 상황을 짚었다. 이번에는 야당을 살폈으면 한다. 야당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10.17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야당은 어땠느냐. 우선 이야기할 건 쿠데타 전에는 야당을 직접적·노골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탄압을 하려고 해도 뭔가 명분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없는 상태에서 야당을 대놓고 탄압하면 정국이 오히려 꼬일 수 있고, 유신 체제 같은 아주 극단적인 체제로 가려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꼬투리가 잡힐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탄압은 쿠데타 이전에는 불가능했고, 그 이후에야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유신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저항할 수 있는 힘, 조직을 야당 의원들은 갖고 있지 않았다. (유신 쿠데타 직전 신민당은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유진산 세력, 즉 진산계와 반진산계 연합 세력이 당권 등을 놓고 충돌한 결과다. 시민회관과 효창동에서 각기 대회를 연 양측은 법정 다툼을 벌이던 중 유신 쿠데타를 맞았다. 10.17쿠데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법정 다툼은 막을 내렸다. 반진산계 중 일부 인사들은 신민당을 떠나 1973년 1월 민주통일당(통일당)을 만들었다. <편집자>) 그렇기 때문에 국정 감사 기간인 10월에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누군가 나서서 반대한다든가 하기보다는 정말 입이 딱딱 벌어지는 놀라운 사태에 두려움만 갖는 식이 됐던 것이다. 그리고 야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대중은 이때 일본에 가 있었다.
유신 쿠데타 후 끌려가 혹독하게 고문당한 야당 의원들
프레시안 : 유신 쿠데타 후 야당 의원들은 어떤 탄압을 당했나.
서중석 : 야당 의원들 중에서 강성, 그러니까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여 강경 투쟁을 벌이고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아주 혹독하게 당했다. 이 사람들이 호되게 당했다는 얘기가 처음에는 구전으로 떠돌았는데, 10.17쿠데타 후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가 1975년 2월 28일 폭로됐고 그 내용이 <동아일보>에 자세히 실렸다.
10.17쿠데타 당시 야당 의원이었던 이들은 이날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 양일동 통일당 총재 등 여러 사람이 입회한 가운데 뉴서울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고문 정치 종식을 위한 선언’이라는 회견문을 발표했다. 유신 쿠데타 당시 신민당 의원이던 사람들 중 13명이 연명한 선언이었다. 이때 김영삼계인 최형우 의원이 “온 국민이 피해자가 되어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는 갈릴레오를 더 이상 한 사람이라도 만들지 않기 위해 고문 사태를 폭로한다”며 회견문을 읽었다. 이들에 대한 고문 내용은 이경재 기자가 쓴 <유신 쿠데타>의 관련 부분을 많이 참고했는데, 이 회견에서 최형우 의원은 갈릴레오를 예로 들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1972년 10월 이후의 한국 사회에는 마치 나치가 남긴 저 유명한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확대판처럼 공포의 유령이 전국을 배회했다. 전 국민을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식 독재의 울타리로 몰아넣어 복종만을 강요하는 비인간적, 반민주적 처사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 우리는 다하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는 글로 이 회견을 마친다. ‘억압자를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프레시안 : 이들은 어떻게 고문당했나. 언론을 그토록 옥죈 유신 체제에서 야당 의원들의 고문 피해 사실을 신문에서 상세히 다룬 것도 인상적이다.
서중석 : 19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맹렬히 싸우지 않았나. 그 결과 1974년 연말부터는 사실에 충실한 기사를 상당히 쓸 수 있었다. 그렇게 언론 자유를 지키고자 분투했던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1975년 3월 대거 해고되는데, 그분들이 그 직후 결성한 게 바로 동아투위다. 어쨌건 신민당 의원이던 이들이 고문 폭로 회견을 한 시점은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뜻을 모은 언론인들이 아직 <동아일보>에 있을 때였고, 그 신문에 고문 내용이 상세히 실린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감옥에 들어가 있던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이 1975년 2월 바로 이때 대거 석방된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 사람들은 구속된 후 심하게 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한다. <동아일보>는 이들의 석방 사실은 물론이고 고문 폭로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김지하도 이때 풀려나는데, 석방된 후 김지하는 인혁당 관계자들이 창자가 빠져나올 정도로 지독하게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폭로했다.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 등은 1975년 2월 15일 밤 풀려났다. <동아일보>는 김지하의 글 ‘고행…1974’를 같은 달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게재했다. 이 글에는 김지하가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수감된 하재완과 감옥에서 통방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 하고 하 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시우?” 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 하고 하 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하고 하 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 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 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 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그러나 아무리 참아도 하재완은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다. 유신 체제 최대의 조작극으로 꼽히는 인혁당 사건 재판은 처음부터 정치 재판이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하재완을 비롯한 인혁당 관계자 8명은 억울하게 처형당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2012년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라고 발언하며 위험한 논란을 자초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얼마나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지는 다음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날 시체 8구 중 단지 3구의 시체만 가족들에게 넘겨졌다. 다른 3구는 나중에 인계되었으나, 2구는 끝내 가족 동의도 없이 화장되었다. 최종 두 사람의 경우 극심한 고문을 당해 엉망이 된 그들 시신이 공개되는 걸 당국이 꺼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 둘은 죽기 전에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70년대 민주화 운동> 중) <편집자>)
▲ 1975년 2월 17일 자 <동아일보> 3면. 15일 밤 석방된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 등의 목소리를 담은 “내 신념 누가 꺾으랴”라는 제목의 기사로 면 전체를 채웠다. 이날 <동아일보>는 3면뿐만 아니라 전 지면을 이들의 석방 관련 기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전체 8면 중 1면에 머리기사를 포함해 2건, 7면에 3건의 기사를 실었다. 2면 사설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5면에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게재하고, 6면에는 석방 순간의 사진들과 더불어 1974년에 10개월 동안 긴급 조치 위반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이들의 최후 진술을 정리한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그런 상황에서 유신 쿠데타 당시 신민당 의원이었던 13명이 고문 피해를 폭로했고, 그 내용이 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고문 내용이 워낙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중 몇 사람의 예만 간략히 짚어보자. 이 부분에는 김충식 기자가 취재한 내용도 들어 있는데, 먼저 최형우를 살펴보자. 최형우는 1972년 10월 17일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 며칠 후 영등포에 있던 군부대에 끌려갔다. 야당 의원들을 끌고 간 기관은 보안사인데, 그러면 최형우는 왜 끌려갔느냐. 유신 쿠데타가 나기 전인 1972년 7월 임시 국회를 앞두고 최형우는 우연히 한 기자에게서 ‘지금 모종의 개헌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새 헌법을 한태연, 갈봉근 교수와 청와대 특보 몇 사람이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당히 믿을 만한 쪽에서 나온 정보였기 때문에 최형우는 국회 본회의에서 총리에게 질문하는 형식으로 그 얘기를 했다. “본 의원은 한 모, 갈 모 교수와 청와대 측근들이 모여 프랑스의 드골식 헌법과 유사한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 시안을 현재 구상 중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 이런 개헌 사태가 벌어진다면 총리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이때 최형우가 유신 쿠데타의 내막까지 잘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 최형우를 10.17쿠데타 후 잡아다가 ‘그 발언 내용을 누가 제보했느냐’고 추궁하면서 고문한 것이다. 물론 최형우를 확실히 누르기 위해 이런 고문을 했을 텐데, 김충식 기자의 책에 실린 그 고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고문은 광기에 가까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벗겼다. 두 손을 모아 무릎을 끌어안고 깍지 끼게 한 뒤 포승으로 묶었다. 각목을 최형우의 팔과 다리 사이에 끼워 양편 책상 사이에 통닭 바비큐처럼 매달았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숨이 막혀 어쩔 수 없이 물을 들이켜야 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시멘트 바닥에 팽개쳤다. 잠을 재우지 않고 구타하며 전기 고문도 가했다. ‘제보자를 대라. 김영삼의 조직을 불어라’라고 요구했다. 핀셋으로 국부를 잡아당기고 툭툭 치며 굴욕감을 주었다.” 최형우는 이런 식으로 고문을 당했다.
1950년대에 민주당 대표였던 조병옥의 큰아들인 조윤형 이 사람은 용산에 있던 모 기관, 이건 보안사일 텐데 어쨌건 그곳 수사과에 끌려갔다. 거기서 잠 안 재우기, 전신 구타를 72시간 동안 계속 당했다. 고문 목적은 무언가를 수뢰했다고, 즉 어디선가 돈을 받아먹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는데, 겁을 주기 위해 그랬던 것일 것이다. 그런데 조윤형의 경우 정권에 밉보일 만한 다른 건이 있었다.
정인숙 사건 거론한 조윤형·김상현, 10.17쿠데타 후 고문 표적으로 전락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정인숙 사건이라는 게 1970년에 나지 않나. 그해 3월 17일 밤 25세이던 정인숙이라는 여인이 서울 강변3로에서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데, 이게 그 유명한 정인숙 사건으로 비화된다. 정인숙 여인이 편력한 사람들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그리고 박정희의 여자관계를 수발했다고 하는 박종규 경호실장, 정일권을 포함해 제3공화국 요인들이 다수 거론됐는데, 정인숙 수첩은 요인들 백서처럼 보인다고 그 당시 신문에 나고 그랬다. 엄청나게 큰 사회적 사건이었다.
정인숙 사건이 났을 때 조윤형은 뭘 했느냐. 1970년 5월 국회 본회의에서 조윤형 의원은 정인숙 사건을 풍자한 노래 가사를 소개했다. 노랫말은 이렇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 /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가사를 고친 건데, 가사를 이렇게 고친 그 노래가 대학 축제 같은 데에서 나오고 그랬다고 돼 있다.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는 건 국무총리이던 정일권을 가리킨다. 정인숙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누구냐가 그때 참 화제였다. 하여튼 조 의원은 가사를 2절까지 다 소개한 다음에 국무총리 정일권을 가리키며 “내가 존경하는 정 총리입니다만 지금 세상에서는 모두 다 이 양반의 아들이라고 그런다”,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술렁였는데 조 의원은 살인 사건 수사에 강력범 담당 검사가 아닌 공안 검사가 나선 점, 정 여인이 회수 여권을 발급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청부 살인 의혹이 있다면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수 여권은 복수 여권으로 당시 일반인이 발급받기 어려웠는데, 정 여인은 이걸 갖고 있었다.
이날 김상현 의원도 정인숙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윤형 의원이 이야기를 하고 나서 김상현 의원이 나서서 또 물었다. “정 여인에 관계된 사람이 26명이나 된다고 하고 ‘정 총리가 관계됐다. 박 대통령이 관계됐다’, 이렇게까지 얘기가 돌아다닌다. 그런 판에 법무부 장관이 자진 보고하는 것이야말로 (…) 도둑이 제 발 저린 격 아니냐.” 이 시기에 조윤형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국정에 관한 질의를 하기도 전에 이호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정인숙 사건에 대해 장황하게 먼저 보고하는 특이한 모습이 나타났는데, 김상현 의원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니냐’고 지적한 것이다.
조윤형하고 김상현은 나중에 구속돼서 감옥소 생활을 꽤 하게 된다. 김상현은 김대중의 오른팔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인데, 이 사람 사례는 좀 특이하다.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고 시간이 꽤 지났을 때, 그러니까 1972년 11월에 보안사에 끌려간다. ‘유신 헌법을 지지해달라’고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요구하자 김상현은 ‘말도 안 된다’고 거부했다. 그것에 이어 중앙정보부에서도 같은 요구를 했다고 한다. 결국 11월 21일 김상현은 용산의 모 기관, 그러니까 조윤형이 끌려갔던 그쪽으로 끌려갔다. 기관원들은 밤 11시부터 김상현을 지하실로 데려가 나체로 만든 다음 손을 묶어 무릎에 끼우고 두 다리 사이에 끼워 거꾸로 매달고 조서를 받기 시작했다. 주요 심문 내용은 김대중을 위한 정치 자금 루트, 김대중과 그의 군 관계 조직 및 친분 관계, 정부를 비판하는 이유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달 29일 풀려날 때까지 김상현은 용산의 모 기관에서 고문을 당하면서 취조를 받았다. 그렇게 당한 탓에, 풀려날 때 발이 부풀어 구두를 신지 못했고 결국 보안사 요원들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한 달 후인 12월말 김상현은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조윤형, 조연하 등과 함께 전격 구속됐다. 김상현과 조윤형, 조연하는 1974년 12월 9일 가석방으로 풀려날 때까지 2년간 옥살이를 했다.
무지막지한 구타, 물고문, 잠 안 재우기…야만의 민낯 드러낸 유신 정권
프레시안 :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회에서는 법전에 적힌 어떤 죄목보다도 괘씸죄가 무거운 죄라는 이야기를 세간에서 하기도 하는데, 청와대 관련설까지 나돌던 마당에 정인숙 사건을 그런 식으로 거론한 것 자체가 괘씸죄에 해당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의원들은 어떠했나.
서중석 : 이세규는 군인 출신인데, 이경재 책에는 사단장 시절에 한신 장군과 함께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돼 있다. 이 사람은 10.17쿠데타 다음 날 밤 10시, 영등포에 있던 구6관구 헌병 중대로 끌려갔다. 당시에 고문할 때 보안사는 여러 군데로 나눠서 했다. 6관구는 1961년 5.16쿠데타 때 박정희 세력이 제1지휘소로 삼았고 박정희가 김재춘과 만나서 부대를 출동시킨 그 6관구 사령부를 말하는데, 나중에 사령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 하여튼 기관원들은 이세규를 구6관구 헌병 중대로 끌고 가서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최형우가 당한 물고문을 이 사람도 당한 것이다. 뭇매도 때렸다. 고문 목적은 ‘군 내부의 조직 관계를 털어놓아라. 실미도 사건 발생 직후 그 진상을 발표했는데, 어떤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 이런 것을 캐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이세규는 이때 고문을 심하게 당해 허리를 다쳤다. 그래서 그 후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10.17쿠데타 지지 성명을 내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5일간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나는데, 그 후에도 6번이나 더 끌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돈을 줄 테니 해외여행을 다녀와라’는 등의 제안을 하며 유신 쿠데타를 지지하도록 설득했지만 이세규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정계 일선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다.
이종남은 10.17쿠데타 소식을 듣고 숨어 지내다가 10월 21일 자정 무렵 연행됐다. 이 사람도 이세규와 마찬가지로 구6관구 헌병 중대로 끌려갔다. 기관원들은 “넌 살아서 못 갈 줄 알아. 널 죽이되 실컷 고통을 주고 죽일 것이다”, 이렇게 위협하면서 이종남을 고문했다. 벌거벗긴 채 시멘트 바닥에 쓰러뜨려놓고 물을 적신 모포로 감싼 다음 마구 때렸다. 이어서 손목에 수건을 감아 포승줄로 묶고 무릎 아래로 내리고는 긴 장대를 끼워 두 탁자 사이에 올려놓고는 물을 먹였다. 물고문을 한 것이다. 결국 이종남은 실신했는데, 깨어나 보니까 군의관이 진찰을 하고 있었다. 22일과 23일 밤에도 물고문 같은 게 3차례 반복됐다고 그런다. 그 후에도 계속 ‘돈을 얻어먹은 걸 불어라’, 이렇게 강요하면서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이 사람은 일고여덟 차례 정도 기절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왜 밉보였느냐. 이종남은 1972년 8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놀랍게도 박동선 문제를 거론했다. “박동선이라는 자가 미국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대통령의 특사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또 미국 대사로 내정을 받았다’고 하면서 미국에다 유령 회사를 만들어가지고 미국에서 쌀 사오는 것을 (…) 독점했다. 그래 가지고 (…) 수백만 불을 벌었다는 것이다. (…) 내가 듣기에는 우리 정부 모 고위층이 그 사람하고 결탁해가지고 양곡을 독점해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 왜 이런 사람에게 조치를 못 취하나? 결국 대통령의 권한이 크고 세력이 세니까 거기에 관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발언을 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박동선 사건을 터뜨리는 때는 1976년 10월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박동선 관련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워싱턴포스트>보다 4년 2개월 전에 그 문제를 지적했다. 사실 이종남의 박동선 관련 발언이 당시 주목을 받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발언에 뜨끔한 사람들이 있지 않았겠나. 이종남은 이때 박동선 문제와 더불어 재벌들에 대한 특혜 융자 등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10.17쿠데타 후 끌려가 고문당한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이 사람은 8일 만에 풀려나긴 하지만, 1973년 1월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구속된 후 장염, 위염, 고혈압, 혈변, 복부 팽창증이 악화돼 고생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다니며 재판을 받았는데,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한 명 더 살펴보자. 강근호 의원은 1972년 10월 23일 용산의 모 기관으로 끌려갔다. 기관원들은 강근호의 옷을 다 벗기고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러고 나서 세 명이 한 팀을 이뤄 모두 10개 팀이 번갈아가면서 강근호를 의자에 앉혀놓고 잠을 재우지 않은 채 심문했다. 어떤 때는 좁은 공간에 조명 장치를 아주 강렬하게 해놓고 잠을 못 자게 했다. 승강기에 태워 조종사처럼 벨트를 묶은 다음에 고속으로 위아래로 오르내리게 하기도 했다. 6일 밤낮을 그렇게 시달린 강근호는 결국 환각 상태에 빠졌고, 마지막에는 머리를 맞아 완전히 의식 불명이 됐다. 그러자 기관원들은 강근호에게 링거와 강심제를 놓았는데,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송곳으로 발바닥을 찔러댔다고 한다. 그랬는데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자, 이들은 강근호를 구급차에 실어 어떤 사령부 의무실로 옮겼다. 강근호는 그때 당한 고문으로 대퇴부 골절 신경통을 앓게 돼 결국 다리를 절게 됐고, 그래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13명 중 몇 명의 고문 피해 사례를 짤막하게 살펴봤는데, 이 사람들은 최형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김대중계로 분류된 이들이었다. 김대중이 당시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볼 만하다. 그런데 10.17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10개월 후인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서도 시사를 해주겠지만 ‘야당 의원들이 헌법 기관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끌려가서 고문당할 수 있느냐’, 이런 이야기는 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인 1971년 10.2 항명 파동 때 대통령 부인의 오빠까지 기관에 끌려가고 공화당 의원들이 고문을 당하는 판국 아니었나.
손봐줄 야당 의원 명단 만들어 건넨 박정희
프레시안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고문은 ‘끔찍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학한 범죄다. 그에 관한 자료를 읽거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나는데, 피해 당사자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수의 가해자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참회, 반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목사로 변신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자신이 한 건 고문이 아니라 심문, “일종의 예술”이었으며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에 더해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근안 같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는 건 과거에 그런 고문 기술자들을 부추기고 그들이 마음껏 고문을 자행할 수 있게 해준 세력이 여전히 막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세력은 아마도 야만의 시대를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겠지만, 시민 다수의 눈으로 보면 그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거대한 퇴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야만의 시대의 참모습을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야당 의원들에 대한 고문은 누가 지시한 것인가.
서중석 : 야당 의원들을 그런 식으로 손본 건 대통령이 직접 내린 지시에 따른 것이다. 김충식 기자가 쓴 책에 의하면, 유신 쿠데타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알게 된 건 1972년 9월 2일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강창성을 불러서 ‘이제 유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고 ‘그때 가만 놔둬서는 안 될 자들, 질 나쁜 야당 의원’이라고 본 15명의 명단을 넘긴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쓴 명단이라고 하는데, 강창성은 ’15명은 좀 많다. 윤길중, 박한상, 이기택, 김상현, 이세규는 제외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강창성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박정희가 ‘이세규는 안 돼’라고 했다고 그런다. 박정희로서는 이세규가 실미도 사건에 대해 폭로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고, 군인 출신이 어떻게 김대중계가 될 수 있느냐는 불만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중에 몇 명이 더 들어가고 하면서, 1975년 2월 28일 고문 피해를 폭로하는 13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김상현도 처음에는 강창성이 명단에서 빼자고 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실제로는 호되게 당하지 않았나. 어쨌건 명단을 받아든 강창성은 10.17쿠데타 후 윤길중과 박한상을 먼저 불러 ‘유신을 지지하라’고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 유신을 지지할 수는 없다’, 이렇게 나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강창성은 김상현에게도 ‘유신을 지지하라’고 했지만 김상현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그 후 윤길중, 박한상의 경우 그냥 놔뒀지만, 김상현은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감옥소에서도 살게 했다.
프레시안 : 입법 활동을 충실히 하는 것과 더불어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고유한 역할이다. 실미도 사건을 예로 들면 정부에서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가 크게 터지자 허위 발표를 하고 진상을 은폐했다. 그런 상황에서 진상을 밝히고 그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게 하는 것은 국회의원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부문에 걸쳐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뽑고 세비를 주는 건데, 그와 반대로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탄압했다는 건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잡아간 후 ‘뇌물을 받은 것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는 모습이 거듭 나타나는데, 수뢰 문제를 지렛대 삼아 압박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서중석 : 야당 의원들을 나중에 감옥소에 집어넣을 때 수뢰 문제를 많이 활용했다. 감옥소에 살게는 해야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걸고넘어지기 좋은 게 돈 문제라고 보고 그 방식을 쓴 것이다.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돈을 받게 돼 있고, 또 끌려간 사람들은 활동이 아주 많은 사람들 아니었나. 최형우, 조윤형, 김상현 같은 사람들은 김영삼, 김대중을 이어 차기 보스 또는 대통령 후보감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처리한 것이다. 그때 제일 좋은 방법이 바로 수뢰였다.
그런 식으로 주요 강성 야당 의원들을 고문하고 손봤는데, 나머지 의원들 중 상당수에 대해서는 가택 연금을 실시했다. 미국 방문 중 10.17쿠데타 소식을 들은 김영삼도 귀국 후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 재미난 일화가 있다. 야당 당수였던 유진산네 집에도 군인들을 보내 가택 연금을 시켜줘야 하는데 박정희 정권 쪽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진산이 고위 당국자한테 전화를 했다. “여보, 날 진짜 왕사쿠라 만들려 그러는 거야? 왜 정치를 그렇게 몰라? 왜 우리 집에만 보초가 없느냔 말야?” 그래서 할 수 없이 군에서 파견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나. 유진산 집만 멀쩡하게 놔두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여당과 은밀히 타협한다고 해서 그렇지 않아도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던 유진산인데, 그런 유진산을 가택 연금 대상에서 빼면 정말 왕사쿠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되지 않았겠나.
하여튼 10.17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야당 의원 13명이 집중적으로 고문을 당하던 때에 중앙정보부 정치 담당 3국장이 야당 의원들을 불렀다. 유신을 지지하고 옛날 야당처럼 하지 않겠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김충식 기자의 책을 보면, 처음에는 상당수가 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불려간 야당 의원들로서는 ‘유신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를 포기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인한테는 정치 포기처럼 힘든 게 없는 것 아닌가. 유신 체제에서 야당 의원을 지낸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김충식 책에 나온다. “일본에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의원은 떨어지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 정치인은 선거 승리와 의원직에 연연한다. (…) 더군다나 박 정권이 싫다고 정치를 그만둔다면 당장 거꾸로 매달거나 약점을 찾는 뒷조사가 들어올 테니 손들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은 악평을 얻더라도 신문에 자기 이름이 한 줄이라도 나오는 게 좋고 부음란에만 이름이 안 나오면 된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나. 그러면서 처음에 버티던 야당 의원들 중 몇 명이 도장을 찍었다고 하니까 대부분이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기왕에 도장을 찍을 거면 빨리 찍는 게 낫지 않느냐, 구태여 미움을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렇게 했다고 그런다.
유신 체제에서 야당 의원으로 산다는 것
프레시안 : 유신 체제 말기에 박정희가 “유신 체제 아래에서 이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고 국회에 들어갔는데 이제 와서 유신 체제를 부정하느냐”며 야당 의원들을 비난하곤 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쿠데타로 헌법을 거듭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민정 이양 과정 등에서 숱하게 말 바꾸기를 했던 박정희가 그런 식으로 야당을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예컨대 상당수 야당 의원들이 유신 쿠데타 직후 ‘유신 지지’ 도장을 찍어준 것 등은 박정희에게 그런 식의 힐난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제도권 정치인에게 드높은 지조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유신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도장까지 찍은 건 너무 비굴한 짓 아닌가 싶다.
서중석 : 유신 체제에서 국회의원을 하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그렇게 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그러면서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고 한 건 더러운 짓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꼭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건가 하는 점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신 체제의 최대 약점 중 하나가 바로 야당의 존재, 복수 정당의 존재였다고 내가 예전에 이야기했는데, 국회의원이라는 게 묘한 자리다. 이렇게 개 끌려가듯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수염도 뽑히고 그랬지만, 그와 달리 아무리 유신 체제라고 하더라도 국회의원이라고 하면 그렇게 무시하지는 못하는 면도 상당 부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야당성을 어느 정도 지니면서 야당 의원으로 나아가겠다는 각오만 돼 있다면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것 자체를 꼭 ‘비겁하다. 더러운 짓이다’, 그렇게만 얘기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야당 의원이라는 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는 상관없이 야당 성향의 발언을 해야 표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자유당 때도 그랬고 1960년대에도 그랬다. 물론 유신 체제에서 야당 의원은 굉장히 조심해야 했고, 유신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하기가 매우 어렵긴 했다. 1975년 10월 유신 독재를 비판했다가 의원직을 내놓게 되는 김옥선 의원 같은 경우가 있긴 했으나 그건 특별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시기에도 야당 국회의원들은 뭔가 여당과 정권 쪽을 비판하고 나서야 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분위기가 형성되면, 선명 야당을 외칠 수 있는 것이었다. 가령 1974년에 김영삼이 그러한 선명 야당을 주장하면서 당 총재가 되지 않나. 특히 다시 당 총재가 되는 1979년에 김영삼은 박정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데, 이때 아주 희한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프레시안 : 어떤 모습인가.
서중석 : 1979년 김영삼이 다시 신민당 총재가 되자, 박정희 정권 쪽에서는 김영삼 쪽을 완전히 매장시키기 위해 김영삼을 총재직에서 내쫓게 하고 총재 직무 대행이라는 자를 있게 했다. 그 사람이 신민당 총재를 대행하게 했다. (신민당 총재 직무 대행을 맡은 사람은 정운갑이다. 충북 도지사를 지낸 새누리당 의원 정우택의 아버지다. <편집자>) 그랬는데도 야당 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총재 직무 대행 쪽으로 가는 대신 김영삼 쪽에 줄을 서버렸다. 무시무시하고 살벌한 유신 말기였는데도, 그리고 권력이 밀어주는 쪽으로 가는 게 안전해 보였는데도 그런 선택을 했다.
지진이 나기 전 어떤 짐승들은 미리 알고 피한다고 하지 않나. 그와 비슷하게 야당 의원들도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러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어떤 본능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들 그런다. 물론 야당 의원들 중에도 나쁜 자들이 많지만 그런 자들까지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하여튼 어느 정도 야당 성향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의정 활동을 하려던 사람이라면, 유신 체제라 하더라도 선거에 나간 것을 그렇게 심하게 타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유신 쿠데타 직후 야당을 꼼짝 못하게 해놨다. 이때 야당 영수는 유진산이었는데, 10.17쿠데타 후 적어도 초기에는 유신 체제에 도전한다는 건 야당 정치인들이 꿈도 못 꿨고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세력조차 나올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스물일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김덕련 전 기자
<2015-11-12> 프레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