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문 정국 속 재조명된 <친일인명사전> 50년 전 역사에 배신당한 문학연구자가 쓴 집요한 기록 <친일문학론>이 주는 기시감
▲ <친일인명사전>을 좌편향으로 매도한 <조선일보> 11월9일치 기사. |
누구인가, 이들은. 장관 300명 중 249명. 국회의장단 32명 중 22명. 고위급 군인·경찰 48명 중 42명. 일제강점기 친일 또는 반민족 행위를 했던 이들이다. 이승만·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의 집권 기간(1948~60, 1961~79)인 30년치 통계다. 이것은 사실이다.
무엇인가, 이것은. ‘반대한민국 단체 ‘친일 사전’ 왜 세금으로 뿌리나’. 11월9일치 <조선일보> 사설 제목이다. 서울시교육청이 12월부터 서울 중·고교 500여 곳에 <친일인명사전>을 배포하겠다고 밝힌 것을 겨냥한 사설이다. 이 신문은 같은 날 3면에 ‘좌편향 단체의 ‘친일인명사전’, 학교에 배포한다는 서울교육청’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도 실었다. 이것은 사실인가.
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일보>의 보도에 강하게 반발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독립운동사나 친일·반민족 역사를 규명하는 게 좌편향·반대한민국인가. 그렇다면 친일·독재를 하면 친대한민국인가 묻고 싶다. 좌편향이라고 공격하려면 그 증거를 가져오라”고 반박했다.
김동인·노천명·이광수·이효석·주요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문이 <친일인명사전>까지 번졌다. <친일인명사전>을 말하려면 <친일문학론>(1966)을 말해야 한다. <친일문학론>은 <친일인명사전>의 뿌리이자 정신적 기둥이기 때문이다.
50년 전이다. 1965년 6월22일 국민의 반대를 무시하고, “제2의 이완용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라는 말로 밀어붙인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친일문학론>이 나온 계기다. 이 책의 지은이는 임종국(1929~89). 임종국은 경남 창녕 출신의 시인이었다. 고려대 정치학과 졸업 뒤 1959년 <문학예술>에 ‘비’(碑)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는 문학연구자이기도 했다. 1966년 간행된 <이상 전집>은 작가 이상을 다룬 최초의 연구서다. 그는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아끼는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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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 전집>을 집필하면서 임종국이 발견한 게 있었다. 당시 유명 작가·평론가·교수들 다수가 일제 때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친일 이력에 침묵하는 ‘과거 세탁’의 담합이 횡행하던 그 시절, 그는 어떻게 진실을 알았을까. 어떻게 그는 ‘친일 문제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을까.
1950년대 일제강점기 문서가 가장 많이 보관돼 있던 곳은 고려대 도서관이었다. 그는 모교인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학생들이 그를 도서관 직원으로 착각해 대출 신청을 했던 것은 물론 도서관 직원들이 그에게 사무실을 맡기고 퇴근할 정도였다. 먼지 가득한 서고에서 그는 일제의 관보 35년치(2만 장 이상)를 모두 복사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0년치를 직접 손으로 베껴 기록했다. 발행됐던 잡지들도 샅샅이 훑었다. 그리고 카드와 노트에 진실을 적었다.
원고지 2천 장 분량이지만 불과 8개월 만에 탈고한 <친일문학론>은 임종국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 역사를 흔드는 일대 지진과도 같았다. 기록 원칙 또한 1mm의 나태를 허용치 않았다. 이 책에서 임종국은 자신의 부친 임문호의 친일 행위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임문호는 일제 치하에서 천도교 시국대처부 총무와 국민총력 천도교연맹 이사를 맡아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부친 임문호는 아들의 집필 정신을 인정하고 격려했다. 임문호는 훗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임종국 과업 이어 11일 만에 5억원 모금
▲ 1960년대부터 홀로 친일파 연구를 수행한 임종국 선생의 생전 모습. 2009년 을 편찬해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5년부터 ‘임종국상’을 제정해 민족사 바로잡기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
<친일문학론>에는 김동인·김동환·김억·노천명·모윤숙·백철·이광수·이효석·정비석·주요한·채만식·최재서 등의 작가·비평가들이 일제에 협력·찬양하는 글을 쓰거나 강연한 행적이 사료에 근거해 드러나 있다. 1919년 삼일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썼던 최남선, 1948년 제헌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 등의 친일 행각도 폭로됐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친일문학론> 서문에서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작게는 자기의 신념을 보존하지 못하고 크게는 대중과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묵계를 배반할 가능성에 대하여 이 책은 하나의 생생하고 신랄한 조서”라고 평한 이유다. <친일문학론>은 일제 때 반민족 행위를 한 문필가들을 추적해 작성한 ‘역사의 공소장’이었고 ‘탐사 저널리즘’의 효시와 다름없었다.
이후에도 임종국은 살아생전 10여 권의 책과 수많은 자료를 남겼다. 모두 일제의 한국 침략사 또는 친일 인사들의 일제 부역 행위를 사료에 근거해 파헤친 것들이다. 특히 두 소장 학자와 함께 계획한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사>는 필생의 과업이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는 폐기종으로 1989년 숨졌다. 지난 11월12일은 그의 26주기 기일이었다.
<조선일보>가 지목한 <친일인명사전>은 민족사의 그늘을 용기 있게 파헤친 임종국의 뜻을 잇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1989년 임종국의 상가에 모인 지인들은 그 자리에서 의기투합했다. 1년3개월 뒤 반민족문제연구소(지금의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됐다. 연구소는 임종국이 남긴 친일 인명 행적 카드 1만5천 점과 문헌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94년 8월에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수십억원에 이르는 편찬 비용 마련이 길을 가로막았다. 진전을 보지 못하던 사전 편찬 작업은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전국 교수 1만인 선언’을 기점으로 활력을 되찾았다.
사전 편찬 작업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2001년 역사학을 중심으로 학계에서 150여 명이 참여해 편찬 실무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3년 국회에서 정부 지원 예산 5억원을 모두 삭감했다. 2003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사위원회를 차례로 폐지했다. 반동의 시대였다.
그러던 2004년 초 누리꾼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모금 운동이 놀라운 반전을 끌어냈다. 단 11일 만에 목표액 5억원을 채우고 이후 7억원까지 기금이 조성된 것이다. 이후 2009년 11월 2800여 쪽 분량의 3권짜리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18년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며 만들어진 사전은 그날 백범 김구의 묘에 바쳐졌다. 사전에 실린 친일 인사는 4389명에 이르며, 이들 가운데 김성수(<동아일보> 설립자)와 장지연(<황성신문> 주필),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 등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20명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전에서 정의한 친일파는 “1905년 을사늑약 전후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이다. 수록 대상자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매국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을 탄압한 민족반역자, 그리고 식민통치기구의 하수인 또는 이를 미화·선전한 부일협력자다. 선정 원칙은 자발적·적극적 친일이었는지가 중심이었으며, 엄격한 증거주의에 따랐다.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2008년 4월 4776명의 수록 대상자를 선정한 뒤 1년6개월 동안 이의신청 접수와 재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4389명을 확정했다.
<친일인명사전> 모바일 앱, 성경보다 많이 팔려
▲ 만주군 장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과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 이들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의 공소장’이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
사전에 등재된 인물의 후손들이 발간을 막기 위한 소송도 이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남 박지만씨를 비롯해 모두 6건의 배포 또는 게재 금지 가처분소송과 본안 소송이 진행됐다. 그러나 6건 모두 원고들이 패소했거나 신청 자체를 취하했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사법부가 사전과 연구소의 객관성·엄밀성을 모두 인정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사전은 지금까지 5쇄를 찍었고 7500질(1질 3권) 정도를 판매했다. 시민들에게 사전을 돌려주겠다는 뜻으로 만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1만원)은 지금까지 1만7천여 건 팔렸다. 애플 앱스토어에서는 성경보다 앞선 판매 순위 1위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서도 사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표 집필자로 끌어들였던 신형식과 최몽룡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스승인 이병도와 신석호 모두 사전에 등재된 친일 인사다. 신석호는 식민사관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으며, 1940년 11월 열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를 받았다. 기원 2600년은 일본 왕족의 ‘유구한 법통’과 순혈주의를 숭앙하는 단적인 표현이다. 신석호는 이병도와 함께 1968년 독립유공자 상훈심사회 위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신석호의 수제자로 일컫는 이가 김정배 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9년 만주군에 지원하기 위해 쓴 ‘혈서 군관 지원서’도 사전에 기록돼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박 대통령은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말했다.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하면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박 대통령의 말을 통박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자유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고 세계만방에 선포하는 것이다. 친일, 군부독재, 반통일, 재벌 독점·수탈을 옹호하기 위해 국정교과서를 하겠다는 것이다. 올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박근혜처럼 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의 뜻을 기려 2005년부터 ‘임종국상’을 시상하고 있다. 올해 언론 부문 수상작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의 ‘친일과 망각’ 4부작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역사를 증거하는 문헌 250만 건 등을 전시하는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가칭) 건립을 추진 중이며 시민 성금을 기다리고 있다. 시민역사관은 내년 말 개관할 참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 집필자들의 스승도…
<친일문학론>의 서문 ‘자화상’에서 임종국은 해방 직후 17살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얘! 너 그, 김구 선생이라는 이가 중국 사람이래!”
“그래? 중국 사람이 뭘 하러 조선엘 오지?”
“이런 짜아식! 임마 것두 몰라! 정치하러 온대.”
“정치? 그럼 우린 중국한테 멕히니?”
임종국은 뒤이어 적었다. “식민지 교육 밑에서,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만 알았을 뿐 한번 회의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어를 제외한 모든 관념, 이것을 나는 해방 후에 얻었고 민족이라는 관념도 해방 후에 싹튼 생각이었다. 이제 <친일문학론>을 쓰면서 나는 나를 그토록 천치로 만들어준 그 무렵의 일체를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민지 교육에 갇혀 민족의 정체성조차 흐릿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었다.
임종국은 말했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 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학론>이라는 토양에서 자란 거대한 ‘사실의 나무’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2015-11-16> 한겨레21
☞기사원문:
“역사는 꾸며서는 안 될 혼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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