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검은 사제’가 몸으로 쓴 역사

578


‘가장 위험한 곳으로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포스터에 적힌 꼭 그대로다. 정의구현사제단을 꾸려온 지난 41년은 함세웅 신부가 위험을 무릅쓰며 통과해온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함세웅 신부(73)는 한국 민주화와 인권의 상징이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된 이래 41년간 ‘정의 구현’이 하느님의 근원적 뜻임을 설파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 국정교과서 추진 등을 비판하며 정부의 잘못에 가차 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민주주의 국민행동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11월13일 금요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함세웅 신부와 주진우 <시사IN> 기자가 진행하는 ‘현대사 콘서트’가 열렸다. 400여 명이 모여 현대사를 논한 뜨거운 현장을 지면에 옮긴다. 부산(11월27일), 대구(11월28일), 대전(12월11일), 광주(12월12일)에서도 ‘거리의 신부’와 ‘탐사보도 전문기자’를 만날 수 있다.


▲ ⓒ시사IN 신선영 : 11월13일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함세웅 신부(왼쪽)와 주진우 기자의 ‘현대사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400여 명의 청중이 모였다.



주진우(주): 기자가 된 게 후회스럽다. 그래도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거였다. 그중에서도 함세웅 신부님을 만난 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 함 신부님이 걸어온 길을 되짚으면서 우리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나누고 싶다.


함세웅(함):
명동성당은 1987년 6월항쟁 당시 5박6일 동안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1만명 이상의 시민이 항쟁한 장소다. 오늘 11월13일은 인권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의 45주기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돌리려는 이들을 꾸짖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주:
함세웅 신부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


함:
모범생이었다. 용산중학교 3학년 때 성당에서 복사(가톨릭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사람)를 맡아 했다. 이후 사제 후보 양성 기숙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새벽 5시에 기상해 밤 9시 반에 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딱 한 번, 고2 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민하다가 서울대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하느님은 내 마음을 아실 거라고 판단했다. 법과 제도를 넘어선 신학적 판단을 고2 때 했다(웃음).


주:
1965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셨다.


함:
우리나라의 교회와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유학 중인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돼 박정희의 영구 집권 발판이 마련되었다. 김대중 선생이 납치되고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민청학련·인혁당 사건이 터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1973년 6월 귀국했다.


주:
사제로서 사회활동에 나선 계기가 있었나?


함:
1974년 긴급조치 1∼4호가 발동됐다. 나는 당시 어린 사제였기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원주·인천 지역의 또래 사제 30여 명이 앞장서서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석방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 주교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석 달 뒤 순교자의 달인 9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만들어졌다. 유신체제가 신학적·성서적·인간학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제의 이름으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함:
사제단은 회원도, 회칙도, 정관도 없지만 ‘모여라’ 하면 모이는 공동체다. 전두환 정권 당시, 안기부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해체를 요구했다. 그게 안 되면 이름만 바꿔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되물었다. ‘‘천주교’를 뭘로 바꿉니까?'(웃음) ‘‘정의 구현’은 하느님의 가장 대표적인 뜻이고, ‘사제단’은 제가 만든 이름이 아니잖아요. 바티칸에 가서 요청하세요.'(웃음)


주:
고문은 안 받았나?(웃음)


함:
한국에서는 이 정도는 고문 축에도 안 낀다.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정도 돼야지. 폭행 고문은 당하지 않았는데, 들어가자마자 욕하고, 사제 복장 떼고, 옷 벗기고 그랬다.


주:
무섭지 않았나?


▲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제공 : 1987년 6월1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의구현사제단 시위.



함:
무서운데, 그럴 때는 화살기도를 드린다. 기도 화살을 하늘에 슝 쏘면 하느님께 바로 전달된다(웃음). 주 기자는 그런 기도를 못 바쳐서 고생을 많이 한다(웃음).


주:
저는 끌려가면 ‘화살욕’을 합니다(웃음).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처음으로 투옥되셨는데.


함:
3월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 사제단 신부가 공동 집전하고 신자 2000여 명이 참석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김승훈 신부가 강론하고 개신교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문정현 신부가 김지하 어머니의 호소문을 낭독하고 마무리 기도 형식으로 서울여대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기념미사는 조용히 끝났는데, 일주일 뒤 느닷없이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11명을 구속했다. 나중에 검거한 자들에게 들었는데, 선언이 있은 날, 박정희가 편안하게 술 마시고 있다가 김대중이 선언에 참여했다는 보고를 받고 흥분하면서 전부 다 구속하라고 명령했다는 거다. 재야 민주 진영에 정치 보복을 감행한 셈이었다.


주:
감옥 생활은 어땠나?


함:
정보부에서 밤을 지새우고 서대문구치소에 갔다. 가진 거라곤 성경 한 권밖에 없었다. 마침 김대중 선생이 있어서 칫솔을 사려고 1000원을 빌렸다. 그랬더니 5000원 주시더라. 대신 성경을 달라고 하셨다. 감옥살이 2년은 성서와 신학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감옥은 내게 공부방이자 수련소였다.


주:
감옥 다녀오고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추위를 많이 타시더라. 여름에도 옷을 많이 껴입는다. 여름에 신부님과 차로 이동하면 ‘주 기자, 에어컨 켜도 돼’라고 하고는 ’29℃까지 낮춰도 돼’라고 하신다(웃음).


함:
나이가 든 만큼 때가 묻는데, 나는 주 기자를 만나면서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정직·꿈·지혜 같은 배움이 떠오른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이들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인간이 좀 덜됐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도록 우리가 기도를 하자. 흥분하면 내 건강이 나빠지니까, 그저 잘 관찰하고 일기를 쓰는 게 좋다. 그게 역사다. 역사를 쓰고 있는 거다. ‘미래에 국정교과서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줘야지’ 하면서 새누리당의 나쁜 짓을 잘 관찰하시라. 미래와 이야기하는 이들은 현실을 잘 극복할 수 있다.(박수)



<약력>

194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 그레고리안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창립.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장·이사장(현). 기쁨과희망 사목연구원 원장(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현).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현)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2015-11-26> 시사인

☞기사원문: ‘검은 사제’가 몸으로 쓴 역사

※참고기사

☞블로그[ 꼼지락꼼지락 ..]: 15.11.13 함세웅 신부와 주진우 기자의 현대사 콘서트_첫 번째 이야기 [역사]

☞경향신문: 약자들의 구원자·치유자·해방자
(2014.09.27)

☞서울신문: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2013.03.11)


☞서울신문: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하) 함세웅 (2013.03.18)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