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나의 스승 56] 학생들과의 색다른 ‘친일파’ 수업
▲ 한국사 수업시간 퍼즐놀이에 빠진 아이들 ‘국정 vs 검정교과서 비교하며 한국사 바로 알기 퍼즐’을 모둠별로 풀게 했는데, 어려웠는지 인터넷의 도움을 받고도 쩔쩔매는 모습이었다. | |
ⓒ 서부원 |
이번에 출제할 기말시험 1번 문제는 모든 아이들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보기 다섯 개 중에 ‘을사 5적’이 아닌 인물을 가려내는 쉬운 문제다. 그냥 ‘보너스’ 문제인 셈이다. 사실 단순 암기능력을 확인하는 아주 저급한 유형의 문제지만, 나름의 출제 의도는 있다. ‘숨은 친일파를 찾자’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친일파 이완용을 위한 변명’이랄 수도 있겠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국권을 팔아넘긴 ‘을사 5적’에 대해서는 교과서마다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완용 등’으로 두루뭉수리 소개할 뿐 그 다섯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적시한 경우는 드물다. 이완용은 친일파의 ‘대표 명사’가 되어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름이지만, 그로 인해 다른 수많은 친일파들이 그의 뒤로 숨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닌 게 아니라, 한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죽은 이완용이 억울해할 것 같아요. ‘다른 친일파들은 이름도 모르면서, 왜 자기만 못살게 구느냐’고 하지 않겠어요? 수천, 수만의 친일파들이 저지른 악행을 그 혼자 덤터기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짐’을 덜어주자면, 다른 친일파들의 민족 반역 행위에 대해 더 잘 알아야할 것 같아요.”
곧장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이완용을 제외하고 친일파 하면 떠오르는 사람 말해보라고.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 소설가 이광수 정도를 언급하는 아이가 교실에 한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어느 잡지에서 읽은 게 전부라는데, 친일파의 민족 반역 행위에 대해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기억은 없다고 했다. 친일파 하면, 아이들이 죽으나 사나 이완용만 떠올리는 이유다.
사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들만 수십 명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단원 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을 다룬 단락에서 고작 몇 줄 서술돼 있을 뿐, 교과서 그 어디에도 친일파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민특위 활동의 ‘단골’ 사진인 김연수와 최린 등이 오랏줄에 묶여 체포돼 끌려가는 사진이 사실상 전부다.
친일파 행적 묻는 수능 문제 있었던가?
주지하다시피, 당시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 중의 일부를 공산주의자라는 구실로 구속시켰고,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혐의로 악질 친일 경찰 등이 체포되자 이승만 대통령의 묵인 속에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마저 벌어졌다. 결국 반민특위는 활동 기간마저 축소되면서 해체 수순을 밟게 되고, 친일파 청산은 다음 세대로 미뤄졌다.
과문한 탓인지, 친일파의 민족 반역 행위에 대해 묻는 수능 시험 문제가 출제된 기억이 없다. 기껏해야 을사조약이나 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의 매국 행위에 대한 것일 뿐, 정작 중요한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반공투사로의 변모 과정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지금껏 17년 동안 아이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온 나 역시도 학교 시험에 내본 적이 전혀 없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듯하다. 근현대사보다 전근대사 부분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로 미루어, 외려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거칠게 말하면, 친일파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검정 체제로 전환되면서 친일파의 작품들이 교과서에서 대거 빠져나갔는데, 국정교과서 바람을 타고 시나브로 ‘복권’될지도 모르겠다.
▲ ‘시즌3’ 숨은 친일파 찾기 시험문제지 아이들은 ‘위인’인 줄로만 알았던 인물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놀라워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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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바람’대로 이완용의 ‘짐’을 덜어주기로 했다. 방법을 고민하다 ‘숨은 친일파 찾기’ 문제를 출제해 번외 시험을 보기로 했다. 일단 현행 교과서에 실린 인물들 중 친일파를 골라냈다. 기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는가 여부다. 교과서에는 그들의 친일 행적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무심히 공부하다 보면 자칫 ‘위인’으로 여겨질 위험이 다분하다.
과거 국정교과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무슨 까닭에서인지, 현 검정 체제에서조차 친일 행위에 대한 서술은 매우 빈약하다. 흔히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 ‘공’과 ‘과’의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반역한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잣대다.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의 작가라는 ‘공’ 때문에, ‘천황폐하 계신 곳에 정성 모아 요배드리며,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딸들은 몸뻬 입고 공장과 농장으로 나서라’는 친일파 이광수의 ‘과’에 너그러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 국정교과서에 실린 인물들의 친일 행적을 문제로 만들 요량이었다. 그런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어떤 인물을 넣고 뺄지 고민스럽기까지 했다. 현행 검정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만으로도 그 수가 차고도 넘쳐 시험문제의 ‘재료’로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를 만들면서 ‘슬펐던’ 건, 일제강점기 단원에 나오는 이름을 무작위로 골라 <친일인명사전>에서 찾아보면 웬만하면 다 있다는 점이다. 얼추 둘 중 하나 꼴이다.
관료와 군인, 경찰, 언론인, 기업가, 역사학자, 소설가, 시인, 화가, 가수, 심지어 종교인에 이르기까지 친일파가 득세하지 않은 분야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식민지 시절이니 일제에 부역한 그들이 권세를 누리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광복 후 70년도 더 지난 지금 후세가 쓴 교과서에서조차 친일파들의 이름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교과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더욱이 그들의 행적이 교묘히 감춰진 채.
집필진들이 의도적으로 친일파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면, 역사적 가치를 깊이 따져보고 엄선해 교과서에 실었을 것이다. 곧, 문학작품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뭐든 그들은 틀림없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가치를 우러르기는커녕 인정할 수조차 없는 건, 그 ‘업적’들 모두가 그들이 친일 행위로 얻은 부와 기회에 기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익숙한 이름 스무 명을 추려냈다.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런 후 동일 인물에 대해 교과서와 <친일인명사전>의 서술을 발췌해 함께 문제의 보기로 제시하고, 그가 누구인지 물었다. 어차피 수업시간을 활용한 번외 시험으로, 교과서를 펴놓고 찾아 풀어보게 하려는 것이니, 누가 몇 개를 맞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풀면서 아이들은 적잖이 놀라워했다. 명색이 우리나라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지은 사람이 친일파였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말하는가 하면, 친일파의 숫자보다 그들의 행적을 읽고는 ‘빨아도 너무 빨아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다. 참고로, ‘빤다’는 건 ‘아부한다’는 뜻의 아이들 은어다.
서가 한복판, 아이들 눈에 잘 띄도록 친일인명사전 비치한 이유
그런가 하면, 한 아이는 친일파가 어떻게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느냐며 믿기 어렵다고 했다. 또, 친일에서 친미로 옷을 갈아입고, 다시 군사독재정권에 영합하며 승승장구한 한 법관의 약력을 읽으면서는 ‘이완용의 아바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교과서에 찔끔 다루고 마는 당시 반민특위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과제였는지를 문제를 풀며 깨달아가고 있었다.
불과 20문항인 데다 교과서의 해당 단원을 뒤적이다 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인데도, 아이들이 바쁠 것 없이 정독하며 풀어선지 한 시간이 꼬박 걸렸다. 시험을 끝내고 나서 몇 문제 맞혔는지 말하거나 점수를 서로 비교하려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며, 하나같이 뿌듯해했다. 아이들의 소감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젠 이완용 말고 친일파의 이름을 스무 명도 더 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이 남긴 행적을 읽어보니 죄질이 정말 나쁜 것 같아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했다는 그들의 변명은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어요.”
“아무리 교과서라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고 비판적으로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친일인명사전을 종종 읽어봐야겠어요. 지금껏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많이 반성하게 됐어요.”
“지금은 어렵겠지만, 대학에 가서 친일파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시험문제를 만드는 데 꼬박 하루 밤낮이 걸렸지만, 아이들의 한 뼘 더 성장한 모습을 보노라니 몇 갑절 보상 받은 기분이 들었다. 정부의 국정교과서 강행으로 시작된 내 나름의 저항에 스스로 대견함을 느낀다. 벌써부터 다음은 뭘 만들어볼까 구상 중이다. 당장은 서지분류법을 무시하고 도서관의 서가 한복판에 아이들의 눈에 잘 띄도록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했다.
서부원 기자
<2015-11-2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숨은 친일파 찾기’, 고등학생들이 난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