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3> 유신 쿠데타, 스물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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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박정희가 유신 체제로 가는 데 중요한 길목으로 꼽히는 1971년 대선을 지난번에 살펴봤다. 이번에는 박정희가 장기 집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고 얘기되는 1969년 3선 개헌을 짚었으면 한다. 3선 개헌은 박정희에게 어떤 의미였다고 보나.
서중석 :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하고 비상대권을 행사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3선 개헌이라고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 ‘3선 개헌에서 박정희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나도 그런 말을 쓰고 있고 다른 사람도 쓴 경우가 있다. 그랬을 경우 이 루비콘강이 뭐냐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이 어떤 의미로 썼는지까지는 잘 모르지만 난 ‘3선 개헌은 강권 체제, 장기 집권을 위한 박정희의 의지가 구체화된 것이다. 그걸 루비콘강을 건넌 것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한다.
3선 개헌 파동이 일어날 때 ‘영구 집권을 가능케 할 정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소문이 일각에서 돌기는 했다. 그리고 이경재 기자가 쓴 책에는 맨 처음 3선 개헌안이 정부, 여당에서 거론될 때 박정희는 대통령 임기를 통일 시까지 또는 그게 안 되면 6년제로 늘릴 것을 주장했지만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할 수 없이, 한 번 더 하는 임기를 4년으로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긴 한다. 그런데 사실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박정희는 한 번 쥔 권력은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3선 개헌 같은 경우가 그런 생각을 훨씬 더 구체화하고 확실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5.16쿠데타 때부터 박정희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킨 날 ‘혁명 공약’ 6개 항을 비행기에서 뿌리고 세상에 널리 알렸다. 거기에는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정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돼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고치기 직전, 그러니까 5.16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의 이름이다. 아무튼 박정희는 이렇게 약속했고, 그해 8월에는 국내외의 압력이 작용한 것이긴 하지만 ‘1963년 여름에 민정 이양을 하겠다’고 또 공약했다. 그리고 1963년에는 2.18 성명을 내고 ‘나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그러면서 정치 지도자, 국방부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등을 쭉 참석하게 해서 국민 전체에 대한 서약으로 2.27 선서를 했다. 이때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 나라 민주 정치를 길이 발전시키고 자유민주주의의 영생을 다짐하는 길은 군이 여하히 정치적 중립을 견지할 것이냐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겠다”고 선서하고, 자신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혁명 공약’ 같은 것을 학생들한테 달달 외우게 하지 않았나. 공무원한테도 외우게 했고, 모든 국민이 귀가 아프게 들어야 했다. ‘혁명 공약’은 물론이고 민정 불참 성명과 선서는 그야말로 공약 아닌가. 박정희는 그런 걸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런데 난 그렇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본다.
프레시안 :그렇게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혁명 공약’ 6항을 모든 국민이 철저히 인식하도록 자기들 스스로 만들었고 또 민정 이양도 약속하지 않았나. 쿠데타가 일어난 지 불과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1961년 8월에는 민정 이양 시기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공약했다. 그런데 그때 민정 이양 약속을 함과 동시에 뒤로는 중앙정보부를 이용해 비밀리에, 밀실에서 나중에 공화당으로 알려지는 거대 조직을 만들고 있지 않았느냐, 이 말이다. 국민들한테 ‘혁명 공약’과 ‘1963년 여름 민정 이양’이라는 발표를 통해 약속을 해놓고는, 더욱이 계엄으로 모든 정치인의 손을 묶고 어떤 정치 활동도 불가능하게 해놓고는, 자신들은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되는 짓을 한 것이다. 2.27 선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2.27 선서 후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63년 3월 15일 친위 부대들이 군정 연장을 요구하며 유례없는 군인 데모를 하자, 박정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다음 날(3월 16일) ‘군정 4년 연장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지 않았나. 그런 식으로 2.18 성명과 2.27 선서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국민 앞에서 한 약속에 대해 ‘내게 그건 약속이 아니다. 얼마든지 헌신짝처럼 뒤집어엎을 수 있다’, 이런 태도를 취한 것 아닌가. 어떻게 그런 식의 발상,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아무튼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 3일 윤보선 대통령이 기자 회견에서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을 <동아일보>에서 1면에 보도하자, 5.16쿠데타 세력이 <동아일보> 관계자들을 붙잡아갔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윤 대통령 비서관까지 최고회의로 불러 추궁하면서 박정희 의장이 “우리가 목숨을 내걸고 한 혁명인데 누구에게 함부로 정권을 내주라고 한다는 말인가”라고 흥분했다고 한다. 바로 이게 박정희의 본심이었음이 틀림없다.
앞에서 말한 공화당 사전 조직, 물론 그때는 공화당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이긴 하지만, 어쨌건 그러한 사전 조직과 더불어 4대 의혹 사건도 꼭 같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본다. 그 당시 군사 정권의 실책으로 말미암아 경제가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그 경제를 더 망치는 4대 의혹 사건까지 저질러가면서 국민, 정치인들을 다 묶어놓고 사전 조직을 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이 말이다.
프레시안 : 이제 비상대권 부분을 살펴봤으면 한다. 박정희 측에서는 언제부터 비상대권 행사를 준비했나.
서중석 : 박정희 쪽에서 총통제를 연구 중이라는 건 3선 개헌 이후 나오기 시작하는 말이지만, 한 자료를 보면 비상대권을 모색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여러 대학생들이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박정희, 김종필의 정치 이념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일이 일어났다. 5월 말이 되면 학생들이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가고, 31일이 되면 데모가 격화된다. 그때 이효상 국회의장, 장경순 국회 부의장, 김성곤이 김종필의 외유를 박정희한테 요구했다. 박정희는 바로 김종필한테 당 의장직 사표를 받겠다고 답했다. 그러고 나서 즉각, 5월 31일 당일 사표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 공화당 의원이 110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70명이 김종필 당 의장 사퇴 반대 서명을 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공화당 주류가 확고히 김종필 중심으로 돼 있었고 김종필이 당을 이끄는 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되자 박정희는 사표를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김종필한테 오히려 ‘공화당 당무 전반을 통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종필은 6인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위원회에서 공화당 당무에 관한 여러 안을 짜도록 한 것이다. 그때 김종필은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규정하고 있는 프랑스 드골 헌법을 참조해서 우리도 대통령한테 비상대권을 주는 헌법 개정을 검토해보라’고 이 위원회에 지시했다. 도대체 제3공화국 헌법을 공포한 지 채 2년도 안됐고, 민정이 출범한 지 불과 1년도 안된 시점인데 개헌을 하겠다? 그것도 비상대권을 대통령한테 부여하는 개헌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공화당 초대 총재였고 당 의장도 하게 되는 공화당 원로 정구영은 김종필이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6.3 계엄 선포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실 당시 계엄까지 선포해서 막아야 할 정도의 시위가 아니었는데 박정희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계기로 계엄을 선포한 것이라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지 않나. 그런데 정구영 회고록에 따르면, 김종필이 박정희와 함께 1964년 6월 3일 계엄을 선포할 것을 결정하고 더 나아가서 비상대권 등 장기적인 정치 운영을 구상했다고 한다. 난 여기서 샤를 드골 대통령 관련 부분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박정희와 드골은 닮은꼴? 삶도, 활동도 너무나 달랐다
프레시안 : 드골과 박정희를 비교하는 연구나 글을 때때로 접할 수 있는데, 그 논조가 다양하다. 예컨대 강력한 지도자로서 국가를 부흥시켰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은꼴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1969년 국민 투표에서 패배하자 약속대로 사임한 것 등을 근거로 드골은 박정희와는 달랐다는 견해도 있다. 어떻게 보나.
서중석: 박정희 쪽에서는 1964년 이때도 드골 헌법을 참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나중에 유신 쿠데타를 하기 전에도 프랑스 드골 헌법, 그리고 스페인 프랑코와 대만 장개석(장제스)의 총통제를 연구하기 위해 헌법학자 등을 보낸 것으로 나온다. 심지어 유신 체제 때도 ‘드골 헌법을 참조했다’고 국회에서 답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드골 헌법에 대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 난 그것도 의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골이 활동하고 살았던 것하고 박정희가 활동하고 살았던 것은 차이가 나도 너무나 극단적인 차이가 나지 않나.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독일은 폴란드를 순식간에 짓밟은 다음에 서유럽 쪽으로 군대를 돌려서 프랑스의 엄청난 대군을 불과 5주 만에 무력화하면서 프랑스를 굴복시키지 않나. 그에 따라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한 비시 정권이 만들어진다. 그때 드골 장군은 비시 정권을 용납할 수 없는 반역 정권으로 규정하고,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독일과 싸우면서 프랑스의 위신을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 무렵 박정희는 일본 천황한테 충성을 바치겠다는 혈서까지 보내면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건 드골과 차이가 나도 너무나 나는 모습 아닌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은 영광스럽게 파리를 탈환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면서 프랑스는 연합국 진영의 4대국 중 하나로서 독일을 점령했다. 그리고 유엔이 만들어질 때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 이사국 중 하나가 됐다. 그야말로 프랑스 사람들한테 드골은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다. (2005년 프랑스 국영 2TV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실시한 투표 결과는 그러한 점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이 투표에서 드골은 1위를 차지했다. 덧붙이면 나폴레옹은 16위, 잔다르크는 31위를 기록했다. <편집자>) 드골의 이런 모습은 해방을 맞았을 때 박정희가 느꼈을 착잡함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자신의 운이라고 할까, 출세의 모든 것을 일본 제국의 흥륭에 걸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그렇게 만주로 간 것 아니냐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해방을 맞았을 때 그 모든 게 깨진 것 아닌가. 이건 드골이 나치 독일의 패망을 맞을 때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
그리고 드골은 비시 정권 인사들을 처단했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던 페탱 원수에게마저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나. 페탱은 그 후 감형되지만, 비시 정권의 여러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비시 정권 협력자도 대대적으로 처단했다. 그런데 한국은 어땠나.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적 침략 전쟁에 관련된 자들은 역시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건데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프랑스와는 다른 역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드골은 영광스러운 프랑스로 가게 하는 이런 여러 조치를 취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래서 2.27 선서가 나오거나 민정 이양 시기에 ‘혁명 공약대로 박정희는 군에 복귀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제일 많이 끄집어낸 인물이 드골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쪽에서는 비상대권을 가지려고 할 때 꼭 ‘드골 헌법을 참조하려 한다’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자료에 나온다.
프레시안 : 드골은 1958년 정계에 복귀하지 않았나.
서중석 : 1950년대 후반기에 프랑스가 얼마나 곤경에 처했으면 드골을 다시 불러내 대권을 줬겠나. 그 시기에 알제리 민족 해방 전쟁(1954∼1962)이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에 대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이 1960년대 말에 부닥치는 것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하게, 알제리 문제로 프랑스가 분열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위기 상황에 프랑스가 처하는데, 그중 하나는 알제리에 파견된 프랑스 군대가 ‘알제리 독립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걸 허용하면 우리가 가만있지 않겠다’고 나온 것이었다. 이런 엄청난 위기, 프랑스 역사상 보기 드물었던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를 다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드골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초야에 있던 드골을 다시 나오게 한 것이었다.
‘다시 나가서 사태를 수습하려면 대권을 받아야 한다’고 드골이 요구해서 드골한테 대권을 부여했다. 그러고 나서 드골은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든다.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헌법이었다. 이걸 국민 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고, 바로 이어서 ‘알제리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하는 길이다’라는 모습을 보였다. 나치 협력자, 비시 정권 협력자들을 처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알제리에 있던 프랑스 군대가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고 1961년 반란을 일으키자, 드골은 바로 엄격히 대처했다. 라울 살랑 장군에게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하면서 반란을 해결했다. (라울 살랑은 알제리 민족 해방 전쟁 초기에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을 지냈다. 알제리 독립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곳곳에서 테러를 자행한 우익 비밀 군사 조직 OAS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1961년 ‘프랑스인의 알제리’를 내세우며 드골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62년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68년 6월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알제리 민족 해방 전쟁 기간 중 드골을 암살하려 했던 다른 극우 인사들도 이때 함께 사면됐다. 드골이 이들을 사면한 시점은 1968년 5월 68혁명이 일어난 직후다. 당시 이는 68혁명 발발 후 총선을 앞둔 시점에 우파 총단결을 노리고 단행한 특별 사면으로 받아들여졌다. <편집자>)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프랑스의 제5공화국 헌법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그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그리고 박정희가 드골과 비교가 되는 인물인가. 드골뿐만 아니라 그 이후 프랑스의 어떤 대통령도 박정희처럼 의회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약화시키려 한 적이 있느냐, 이 말이다.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려 한 적이 있느냐, 이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알제리 문제처럼 정말 중대한 사태가 날 때에만 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정치가 그야말로 ‘이건 안 된다’, 이런 상태로 갈 때에만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어땠나. 틈만 나면 ‘드골 헌법을 참조하겠다’고 하면서 강력한 강권 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걸 연구하도록 사람을 보내고 그러지 않았나. 정말 역설적인 일 아닌가. 이처럼 드골과 박정희는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없고 반대 중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도, 박정희 쪽에서 틈만 나면 드골 헌법을 들먹이는 걸 볼 때 난 맘이 참 안 좋다.
김종필은 왜 또다시 외유를 떠나야 했나
프레시안 : 앞에서 이야기한 1964년 상황을 조금 더 짚었으면 한다. 그해 6월 김종필은 결국 외유를 떠나게 된다. 1963년 2월 첫 번째 외유를 떠난 지 1년 4개월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다. 사표 반려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이때 왜 다시 외유를 떠나게 된 것인가.
서중석 : 김종필은 외유를 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떠나는 그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 외유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합참의장이던 김종오 등 육군 수뇌부하고 각 군의 책임 있는 3성 장성들이 모여서 김종필 제거를 위한 비상수단을 계획했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군에서는 김종필을 참 미워했다. 군정 때 최고회의 내에서도 얼마나 반발이 컸나. 공화당 사전 조직 같은 것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정말 크게 반발하지 않았나. 어쨌건 이 계획에 의하면 김종필 자택을 습격해 김종필과 그의 주요 참모를 체포한다고까지 돼 있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외유를 보내자’고 해가지고 온건한 방법을 채택해 박 대통령한테 강력히 건의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6.3 계엄으로 계엄군을 끌고 나온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수경사령관 김진위 소장, 그리고 김재규 소장과 정봉욱 소장, 다 아주 깐깐하기로 유명하고 군에서는 신망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김재규는 박정희한테 사랑받았다. 이 사람들이 ‘김종필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 6.3사태가 일어나서, 다시 말해 한일 회담 반대 운동 때문에 계엄을 한 건데 김종필이 바로 그 문제를 일으킨 자 아니냐’고 하면서 김종필을 내보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의 공직 사퇴와 외유를 요구했고, 박 대통령이 그렇게 했다는 설이 있다.
하여튼,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박정희는 강력한 강권 발동이 필요하다고 상당 기간 역설했다. 강권이라는 말 자체에 ‘강력한’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는데 어째서 그 앞에 ‘강력한’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박정희가 쓴 글에 그렇게 나온다.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이름으로 발표된 <지도자 도(道)>라는 글에서 이걸 아주 강력히 역설했다. 이미 그때부터 박정희는 이런 강권 발동, 강력한 비상대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3년 대선 때 박정희 후보 쪽에서 기대했던 것에 비해 표가 적게 나오면서 간신히 당선되지 않았나. 그건 많은 국민이 ‘당신은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데, 박정희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아니겠나.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건 괜찮다’고 생각한 점은 이승만하고 똑같다.
공화당 원로 정구영의 눈에 비친 3선 개헌과 박정희
프레시안 : 박정희는 3선 개헌 결심을 언제 굳혔나.
서중석: 박정희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인지 그걸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정구영 회고록을 참조하면 이런 건 나온다. 김종필을 외유 보내고 정구영을 공화당 의장으로 임명하는데, 1966년 11월에 정구영이 박정희를 찾아갔다. “주위에서 3선 개헌을 거론하겠지만”, 1966년 11월이면 미래를 보는 정치인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71년에 평화적 정권 교체가 돼야 합니다.” 이렇게 강력히 권고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 후인 1967년 3월 8일 면담을 할 때 정구영은 지난번에 박정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또 물어봤다. 그랬더니만 박정희가 “1971년 선거에는 안 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이건 좀 이상한 답변 아냐?’ 정구영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고 한다. 3선 개헌을 안 하겠다면, 3선 개헌 문제가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거부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렇게 답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간신들이 ‘3선 개헌을 하라’고 이야기하더라도 박정희는 그렇게 대답해야 할 터인데, 그게 아니라 헌법에 당연히 3선이 금지돼 있는데도 “1971년 선거에는 안 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얘기한 것이다. 이건 3선 개헌을 할 뜻이 있다는 걸 얘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 말고도 정구영은 한 가지 예를 더 들었다.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1965년 12월에 6대 국회 제2기 국회의장 선거가 있었다. 1963년 민정 이양이 되면서 박정희는 국회의장으로 이효상을 선택했다. 당시 정구영을 국회의장에 앉혀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는데도, 정계에서 듣도 보도 못한 인물로 여겨지던 이효상을 국회의장으로 만든 것이다. 이효상은 대구 출신으로 교수를 했던 사람이다. 어쨌건 그렇게 해서 국회의장이 된 이효상의 2년 임기가 끝나면서 1965년 12월에 다시 선거를 하게 된 것이다.
공화당 내부 표결까지 합쳐서 말한 것 같은데, 이때 표결을 무려 7차례나 했다고 정구영은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즈음 박 대통령은 처음에 정구영을 국회의장으로 내정하겠다고 하다가, 이효상에게 한 번 더 맡기겠다고 다시 결정을 내렸다. 정구영은 김종필과 함께 공화당을 만들고 초대 총재를 지낸 사람 아닌가. 김종필에 대한 반발이 워낙 크니까 김종필계 주류에서 정구영을 내세웠던 것인데, 이효상에게 다시 맡기겠다니 하니 주류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그해 12월에 국회의장 선거를 하는데 정구영이 69표, 이효상이 55표를 얻었다. 어느 누구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다시 투표를 해야 했다.
그런데 정구영이 14표를 더 많이 얻지 않았나. 이건 공화당에서 박 대통령 의사에 어긋나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항명을 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충격을 받았다. 어쨌든 항명을 한 것이니까 당직자들이 청와대로 사죄를 하러 갔지만, 이후락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고 해서 못 만났다. 김종필도 청와대에 갔지만 헛걸음질을 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 투표를 같은 달에 했는데, 이효상이 88표를 얻어 가까스로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건 야당이 협력해줬기 때문이다. 야당 표 40표 가운데 30표 정도가, 그런 데에는 귀신같던 사람인 김성곤이 주선했겠지만, 이효상을 찍도록 한 것이었다. 야당이 3선 개헌 문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정구영을 찍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었는데, 결국 이효상 선출에 협력해버린 것이다. 김성곤이 뭔가 찔러주지 않았겠나.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
프레시안 : 이효상은 1971년 대선 때까지 거듭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명색이 학자 출신인데도 지극히 질이 낮은 언사를 공공연히 썼다. 차기 국회의장으로 처음에 정구영을 내정한다는 뜻을 밝혔던 박정희는 왜 이런 이효상으로 교체한 것인가.
서중석 : 정구영을 이효상으로 바꾼 게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건 정구영은 틀림없이 3선 개헌에 반대할 사람이라고 봤기 때문 아니겠나. 물론 국회의장 임기는 2년이고 3선 개헌을 언제 할지는 불분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꼭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국회의장은 적어도 국회를 이끌어가는 데 어떤 분위기를 만들 수는 있는 자리다. 이걸 보더라도 이때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겠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1967년에 치러진 선거, 특히 총선을 보면 이건 3선 개헌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아주 확고하게 갖고 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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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12-06>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와 드골은 닮은꼴? 달라도 너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