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4.3, 5.18, 위안부…’역사’를 찾기 위한 투쟁

506


[기고] 역사교과서, 역사인식, 그리고 시민의식 ③


일제 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사상 유례없는 장기성, 지속성, 강인성을 자랑하며 결국 한국 사회를 민주화의 도정 위에 올려놓았지만 민족해방운동이나 민주화운동 그 어느 것이나 해당 시점에서는 동시대사로서 자유롭게 분석될 수 없었고, 심지어는 공개적인 대화의 화제로도 삼을 수 없었다.


일제 식민지기에 발간된 신문과 잡지를 보면 가끔 ‘■■’와 같이 활판을 거꾸로 조판해서 인쇄한 ‘벽돌문자’를 발견하게 된다. 검열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미처 다른 단어로 교체하지 못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교체하지 않은 채 인쇄했기 때문이다. 전후 문맥과 앞뒤 내용을 따져보면 주로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관한 기사, 당시 정치, 사회, 경제에 관한 비판 기사에서 많이 발견되고, 대체로 ‘민족주의’, ‘제국주의’, ‘민족’, ‘계급’, ‘사회’, ‘쟁의’, ‘파업’ 같은 단어들이다.


이와 같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고, 자기 사회에 대한 분석 대신 무지와 외면을 강요받았던 것이 식민지 조선의 지적·정신적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장기간 시정되지 않았다. 이승만 극우반공독재체제로부터 시작해 1970년대의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국내 역사학계의 민족해방운동사 서술의 하한은 3·1운동이었고, 최초의 식민지기 사회주의운동사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집필되고, 출간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만 해도 이른바 ‘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사실상 사전검열을 통해 기사들을 보도한 것이 한국의 언론 상황이었다. 식민지, 분단, 독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의 세월은 자기 사회의 현실과 역사조차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식민지, 분단, 독재가 강요한 무지와 왜곡을 극복하는 데 지성계와 학계의 노력, 그 일부로서 역사학계의 노력이 한몫했지만 그것을 사회적 차원에서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량의 성장이었다. 민주화운동의 발전과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대중적 차원에서 기억의 복원과 역사의식의 심화와 확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당대사 내지 동시대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였다. 광주항쟁에 대한 독재정권과 어용언론의 날조와 왜곡을 뚫고 광주항쟁의 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사태’가 아닌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성격을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광주항쟁 이후 봄마다 연례행사처럼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반복된 ‘광주를 잊지 말라’는 구호였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 학계에서 근현대사 연구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분단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의 진전과 근현대사 연구의 활성화는 민중 자신의 손으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분단, 독재에 의한 희생자들의 역사적 복권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제주4·3의 경우 4·3 연구 자체가 불가피하게 4·3이 남긴 역사적·현실적 과제의 해결을 촉진했고, 역으로 후자의 해결은 4·3 연구의 심화와 대중적 차원에서 역사의식의 확대를 돕는 작용을 했다. 제주도민들의 4·3 진상규명 요구는 전국적인 연대운동으로 발전했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 ‘4·3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또 노근리사건을 시작으로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이 희생자 유가족은 물론 시민운동 단체들의 참여하에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포괄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


어느 경우나 희생자 유가족들과 시민운동 단체들의 진상규명과 복권 요구가 국민적 공감을 얻고, 결국에는 국가기구가 이를 조사해서 진실 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 조치를 공식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민초들의 잊히지 않기 위한 투쟁은 대중들이 자신의 힘으로 역사에 대한 망각을 불식시켜갔음을 보여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노근리 사건, 제주4·3은 피해자들에게는 개인적 사건이었겠지만 그 성격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피해자들은 개인적 보상보다 과거사 정리의 차원에서 해결을 요구했고, 또 집단적인 운동의 형태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는 5·6공 청산이라는 국면적 필요성도 한몫했지만 과거사 청산에 입각한 현대사 재검토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화했고, 그 흐름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져서 위의 과거사관련 위원회들은 물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약 4년 6개월여 조사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를 4부 25권 2만1000여 쪽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로 발간했다.


비슷한 시기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총 3권, 3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인명사전>을 출간했다. 이 사전은 애초 민간에서 진행되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지원되던 정부예산이 국회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전액 삭감되자 네티즌들의 호소에 따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운동으로 채워진 성금에 의지해 만들었다. 이 성금모금을 처음 발의한 계층은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인 네티즌들이었고, 그 캠페인은 친일부역자들의 반민족행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사의 구조를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즉, 그 캠페인은 이제 친일잔재 청산이 역사적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위에서 진상규명을 목표로 하였고,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의 개혁이나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식과 역사의식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시민의 역사의식은 교실과 교과서에 제한된 적이 없고, 현실이라는 보다 큰 교실 속에서 인식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시민들 스스로 민주사회의 주인이자 역사적 주체로서 자기인식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한국의 37개 여성단체와 개인이 모여서 결성한 이 단체는 이후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청하였다. 이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1992년 1월부터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기 시작한 수요 집회가 이미 1200회를 넘어섰다. 이 운동은 일본 시민단체와 연계를 통해 국제적 운동으로 발전했고, 1998년 8월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운동은 2000년 12월 동경에서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 개최로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전쟁책임 문제에 대해 천황에게 직접 그 책임을 묻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 시작된 역사 복원운동이 한국 내에 머물지 않고 동아시아 시민연대라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으로 확대되고, 또 세계인권운동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과거사에 대한 한국 사회 나름의 역사적 성찰이 동아시아 차원에서 평화 의지를 확산하는데 기여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자기정체성을 확보하면서 국제사회와 연대의 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내일을 여는 역사>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정용욱 서울대학교 교수

<2015-12-09> 프레시안

☞기사원문: 4.3, 5.18, 위안부…’역사’를 찾기 위한 투쟁

※관련기사

☞프레시안: 교과서에서 ‘5.16’은 언제 ‘군사 정변’이 됐나? (12.06)

☞프레시안: 박근혜, 지극한 ‘효심’에서 국민 ‘혼’ 개조로 (12.04)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