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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측, 대선 지면 야당 후보 쏴 죽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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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4> 유신 쿠데타, 스물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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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1967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박정희 쪽에서 3선 개헌 의지를 확고하게 갖고 임했음을 알 수 있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3선 개헌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1967년 선거를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1967년은 대선과 총선이 있었던 해인데, 1년 내내 시끄러웠다. 총선이 끝난 후 정국이 아주 어지러웠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해이기도 한데 1년 내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때였다. 대선을 이해 5월 3일에 치르는데, 이미 1967년 선거 때 언론이 얼마나 무기력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프레시안 :
어떤 사례인가.

서중석 :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다. 대통령 선거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도 있고 하니까 야당인 신민당에서 ‘신문이 잘 좀 해달라’는 뜻으로 신문의 날에 “정부 기관원이”, 이건 주로 중앙정보부원을 가리킬 텐데, “언론 기관에 상주하면서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의 언론 탄압에 대한 소명서를 국제신문인협회(IPI)에 제출하고 한국신문발행인협회,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에 격려문을 보내기로 했다. 선거를 앞둔 때였는데, 야당에서 이렇게 하자 <조선일보>에서 사설로 ‘언론 단체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다. 정부 기관원이 언론 기관에 상주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악선전이니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중앙일보>, <대한일보>, <경향신문>도 비슷한 논조로 야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4대 신문으로 자유당 집권기에 이야기되던 4개 신문이 1960년대 중반에 오면 많이 바뀌게 된다. <한국일보> 사주는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고, <경향신문>은 경매 처분을 당하고, <조선일보>는 코리아나호텔을 짓게 되고, 4대 신문으로 불린 건 아니지만 <중앙일보>도 제대로 된 논조를 펴기 어려웠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때 <신아일보>, <동아일보>만 우회적으로 야당의 발표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돼 있다. 기관원들이라는 게 언론 기관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는 천하가 다 아는 건데, 언론이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짓을 할 만큼 제 이야기를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이 무렵 야당은 어떠했나.


서중석: 이때 야당은 언론 못지않게 무기력했고, 내부 싸움 같은 것 때문에 난장판이었다.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운동으로 6.3 계엄을 맞은 1964년 제1야당인 민정당은 유진산 문제 때문에 아주 심한 내분에 장기간 휩싸이게 된다. 1964년 8월 언론윤리위원회법 통과 문제를 계기로 진산 파동이 일어나는데, 이때부터 1년에 걸쳐 이 싸움이 계속 일어난다. 1965년에 한일협정 저지 투쟁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아주 심한 불협화음이 계속 나온 것도 제1야당의 양대 세력이던 윤보선 세력과 유진산 세력이 계속 싸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진산을 민정당에서 간신히 제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싸움이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야당을 통합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일면서 1965년 6월 민정당과, 옛날 민주당 신파 즉 장면 정권 인사 일부가 만든 민주당, 이 두 당이 통합해 민중당이 됐다. 그런데 대표 최고위원으로 윤보선이 아니라 뜻밖에도 민주당 소수파 쪽인 박순천이 선출됐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민정당 내 진산계가 이쪽에 표를 던져서 윤보선한테 맛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윤보선은 가만있었느냐. 물론 그렇지 않았다. 민중당에 있던 한일협정 반대 강경파를 이끌고 탈당해서 1966년 3월 신한당을 만들었다. 그런데 196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지 않았나. 그러니 좋든 싫든 민중당과 신한당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둘은 원수 사이처럼 돼 있었기 때문에 단일화를 모색하기는커녕 아주 험한 감정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결국 민중당은 유진오를 영입해 1966년 10월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유진오는 헌법학자로 고려대 총장을 10년 넘게 한 사람이다. 사실 유진오는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초대 본부장도 했다. 그러면서 군사 정권하고 관계가 밀접했던 사람이다. 어쨌건 야심도 있고, 민중당에는 마땅한 사람도 없고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민중당에서 유진오를 영입한 후 딱한 일이 벌어졌다. 국민이 유진오를 모른다, 이 말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유진오 하면 누구인지 알지만, 일반 국민들 중에는 유진오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인지도가 낮았다. 민중당으로서는 큰일이 난 것이다. 신한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윤보선이 또 나올 텐데 민중당이 유진오를 그대로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가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딱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1967년에 들어서면서 ‘안 된다. 단일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장준하가 주선해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 이범석 이렇게 네 사람이 모였다. 4자 회담이라고 불린 이걸 두 차례 열었다. 결국 1967년 2월 4자 회담 두 번째 회의에서 ‘통합 야당을 만든다. 대통령 후보는 윤보선, 당수는 유진오로 한다’는 데 합의를 봤다. 그러고는 바로 이어서 통합 야당인 신민당을 발족하게 된다.


그렇지만 신민당 내부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서로 반목하는 이질적인 세력들이 1967년 대선, 총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당으로 된 것 아니었나.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67년 대선은 역대 대통령 선거 가운데 제일 재미없는 선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보선이라는 사람이 무슨 청신한 느낌을 주느냐, 이 말이다. 나이도 나이지만 한민당 시절부터 활동한 사람 아닌가. 새로운 맛 또는 패기 같은 걸 찾기가 아주 어려운 사람이었다. 거기에다가 신민당 내부는 혼란, 혼돈 상태였다. 그런 속에서 대선을 치르게 됐으니 얼마나 재미없는 대선이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남 몰표에 힘입어 다시 윤보선 누른 박정희


프레시안 :1963년에 이어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윤보선이 다시 맞붙었다. 각각 어떤 전략을 구사했나.


서중석 : 정부는 5월 3일을 대통령 선거일로 발표했다. 공화당에서는 “여러분의 명랑한 생활과 보다 편리한 살림을 위해 민주공화당은 황소처럼 힘차게 일하겠습니다”, 이런 표어를 내세웠다. 신민당은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바로잡자”, 이걸 표어로 내세웠다. 공화당은 주로 농촌과 중소 도시에서 붐을 일으키고, 농촌 표 이탈을 방지하면서 대도시 표를 잠식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대도시에서는 야당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신민당은 반대로 대도시에서 붐을 일으키고 그걸 전국으로 확산해 도시 표를 얻는 데 중점을 뒀다. 농촌에서는 조직으로 보나 선거 자금으로 보나 여러 가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4월 1일 신민당이 첫 유세를 광주에서 했다.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씨와 그를 둘러싼 3대 공적(公敵)을 제외하고는 박 씨와 3000만의 대결”이라고 이 선거를 규정했다. 3대 공적은 정보 정치, 매판 특권 재벌, 부패 권력분자를 말한다. 이 선거가 영 재미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책 대결이라고 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후보는 자기 자랑을 주로 했다. ‘우리 정권이 들어서서 국위 선양을 했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경제 발전이 이뤄졌다’ 또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됐다’ 같은 걸 내세웠다. 그러면서, 지역 차별 문제가 이때 등장하고 있어서 그랬겠지만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이때도 국회의장 이효상은 공화당 유세장에서 지역 차별 발언을 하고 다녔다. 고질적인 망국병이라고 하는 극심한 지역주의, 이건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1950년대나 1960년대 전반까지는 없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가 발전했는데, 그 발전이 경인 지방하고 경상도 쪽에서 주로 이뤄지면서 지역 차별 문제가 등장하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같은 것도 호남 쪽에서 봤을 때는 ‘우리 쪽에는 아스팔트 길 하나 제대로 내주지 않고 있지 않느냐’고 반발하며 경부고속도로를 고운 눈으로만 보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지역 차별이 어떠했는가를 인구 이동으로 보면 1960년 말 영남 인구는 819만4000명으로 돼 있다. 부산까지 포함한 수치다. 호남 인구는 594만8000명이었다. 5.16쿠데타가 나기 직전에 이랬는데, 1980년 말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이 붕괴한 다음 해에는 영남 인구가 1142만9000명으로 나온다. 박정희 정권 18년을 포함한 20년 사이에 323만5000명이 증가한 것이다. 1980년 말 호남 쪽 인구는 606만5000명이었다. 20년 사이에 11만7000명밖에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적인 인구 증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그러니까 호남 쪽에서는 사람이 계속 빠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공장도 별로 없고 살기도 어려우니 떠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호남선 복선화 문제에서도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선거일을 며칠 앞둔 4월 29일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그런데 그게 완성된 건 김대중 정권이 끝난 그해(2003년)였다. 박정희가 공약한 지 36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내가 사는 곳이 국도 1번 지역이다. 서울에서 목포 사이의 길인데, 거기에 아스팔트가 다 깔리는 데 20년 정도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선거 때마다 조금씩 깔더라. 선거가 끝나면 중단했다가 다시 선거철이 오면 또 공사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국도 1번이라고 하는 데를 그렇게 하더라. 그러니까 호남 사람들로서는 ‘우리 쪽이 차별을 너무 심하게 받는다’는 생각을 경제가 발전하고 있던 1966∼1967년경부터 갖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 호남선 복선화 송정-무안 임성역 구간 개통식이 끝난 후 새마을호가 무안 일로역에 진입하는 모습(2001년 12월 17일). 1967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공약한 호남선 복선화는 36년 후인 2003년에야 완공됐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1967년 대선 결과, 어떤 식으로 나타났나.


서중석: 선거 결과 경상도 쪽에서 대대적으로 박정희 후보를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5월 3일 투표 결과 박정희 후보는 568만여 표, 윤보선 후보는 452만여 표로 116만여 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이 선거는 동서 선거였다. 서쪽인 서울, 경기, 충남, 전북, 전남에서는 윤 후보 표가 많이 나오고 동쪽에서는 전부 박 후보가 표를 많이 얻었다. 추풍령을 경계로 선을 그은 형태로 딱 나뉜다고들 한다. 동서 선거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이 선거도 가만히 보면, 우선 경상남북도를 합치면 박 후보가 윤 후보보다 119만여 표를 더 얻었다. 두 사람의 전체 표차보다도 경상남북도에서 난 표차가 더 컸다. 거기에다가 부산까지 합쳐놓으면 그 차이는 136만여 표가 된다. 전체 표차보다 20만 표나 더 큰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선거에서도 결국 경상도에서 대대적으로 찍어주지 않았다면 박정희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겠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거 과정에서 ‘야당이 이길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중앙정보부에서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보선이 당선되면 저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1963년에는 밀가루 대통령, 1967년에는 경상도 대통령”


프레시안 : 1967년 대선 당시 야당은 비실비실했고 후보도 다른 때에 비해 약체이지 않았나.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왜 그런 계획을 세운 것인가.


서중석 : 민심은 여전히 박정희를 외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런 것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한 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동서 선거 아닌가. 야당과 윤보선 후보가 그런 상태였는데도 서쪽에선 다 이겼다. 이게 뭘 말하는 것이겠나.


아무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1967년 대선 투표일을 앞두고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를 불렀다. 감찰실장은 중앙정보부의 주요 간부이자 높은 자리였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방준모한테 김형욱은 “만일 개표 결과가 윤보선 당선 쪽으로 기울어지면 저격해라. 총으로 쏘아 죽여라”, 이렇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의 재선 전망이 확실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나. 그래서 방준모 감찰실장은 서울 안국동의 윤보선 집 안방이 내려다보이는 덕성여고 2층에 저격수를 1명 배치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박정희가 당선돼 윤보선 저격 계획은 접은 것으로 돼 있다. 김충식의 책을 보면, 방준모가 그렇게 이야기한 걸로 나온다. (1963년 대선 때도 박정희 세력은 설령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개표 초기 박정희와 윤보선이 엎치락뒤치락하자, 5.16쿠데타 세력 중 일부는 개표 중단, 표 바꿔치기, 군대 출동 및 선거 무효 선언 등을 모의했다. 이는 그들이 국민과 야당에게 순순히 권력을 내놓을 생각 같은 건 손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와 관련, 1971년 대선에서 만약 개표 결과 김대중이 박정희를 앞섰을 경우 박정희 쪽에서 이를 인정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의 오른팔이던 김상현과 박정희의 충복이던 윤필용의 대화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은 걸 시사해준다. 유신 쿠데타 후 김상현은 고문을 당하고 수감됐는데, 1973년 윤필용 사건이 터지며 몰락한 윤필용도 같은 교도소에 수감됐다. 김충식에 따르면, 거기서 김상현은 1971년 대선에서 만약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충복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느냐고 윤필용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필용은 곧바로 뜨르륵 소리를 내며 기관총 쏘는 시늉을 했다고 한다. <편집자>)


이 선거에서 집권당은 거대한 조직과 막대한 자금을 갖고 있었다. 여론 매체의 홍보에서도 여당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 당시 신문들은 무력한 존재 내지 친여적인 세력이어서 문제점을 제대로 비판하거나 지적하는 기사를 쓰기가 어려웠다. 반면 신민당은 조직도, 돈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특히 민중당계하고 신한당계가 아주 사이가 나빠서 선거 도중에도 각 지구당 내부에서조차 반목을 계속하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고 당시 신문에 나온다.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 같은 것을 야당이 갖고 있지 않았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서쪽 지역에서는 다 윤보선이 박정희보다 표를 많이 얻었다는 것은 박정희 후보가 그다지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걸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윤보선 같은 사람이 연이어 대선에 나와 그렇게 무력한 모습을 보였는데도, 더욱이 야당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얼마나 박정희 후보가 별 지지를 못 받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형욱 회고록을 보면 1960년대 대선에 대한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1963년에는 밀가루 대통령에서 1967년에는 경상도 대통령이라…, 그 말도 무리는 아니로군.”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이렇게 이야기할 만큼 경상도 표가 많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 경제에서 상당히 눈에 띄는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가 당선된 것이라고 써놓고 있는데, 그렇다면 어째서 서쪽 지역에서는 다 윤보선 표가 많았는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영남 쪽에서는 단순한 지역주의만은 아니고, 울산 공단 같은 것이 가동되면서 해안을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도 경상도 쪽에서 박정희에게 표를 많이 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 전체로 봐서는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경제 발전이 크게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생각이 많지 않아 1967년 대선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 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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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12-09>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측, 대선 지면 야당 후보 쏴 죽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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