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기고] ‘독립공원’ 이름을 바꿔야한다.

2166


[한국NGO신문] 김정권 = 이 글은 필자가 서울시의회 초청으로 의회의사당에서 했던 광복60주년기념 특강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진실’의 내용을 요약, 보완한 것이다. 당시 상고역사는 물론 근대사마저도 진실과 얼마나 동떨어지게 거짓말로 꾸민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나서 고쳐나가야 한다고 외쳤었다.


이제 꼭 10년이 지나 광복70주년이 되었는데도 고쳐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그것은 진실을 덮으려는 세력이 집권층에 스며들어 겹겹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NGO신문을 통하여 고발한다.


매국집단 독립협회가 되살아나고 있다.


필자는 광복60주년을 맞이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열의 넋을 기리려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거기에는 조선총독부가 붙여준 ‘독립’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고, 친일파 두목으로 매국노의 상징이 된 이완용이 친필로 쓴 ‘독립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일전쟁 일본승전기념 개선문”이 서있었다. 일인이 돈을 주면서 ‘조선에서도 청일전쟁승전기념탑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하자 독립협회가 모금을 하고 보태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우고 “독립문”이라 명명했다는 것이다.


▲ 독립문 민족NGO편집장


당시 일본에서는 대륙의 제국 청나라를 이겼다는 승전분위기로 들끓었으며, 참전용사가 있는 마을마다 탑을 세우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갔다가 이제 친일파로 돌아선 이완용이와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갔다가 이중첩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역적 서재필이 만나서 실세운동단체로 만든 것이 독립협회였다.


결국 그 독립협회는 신세계의 신기루 속에서 매국노 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므로 소위 일본식 “일한합병”이라는 공을 세우고, 3일 후에 9월1일자 독립협회의 회장단 모두가 총독부로부터 엄청난 돈과 함께 국회의원급 이상의 감투와 백작 또는 공작이라는 신분상승 혜택을 받은 신귀족 매국노그룹이 탄생했던 것이다.


▲ 이완용이 쓴 ‘독립문’ 현판 민족NGO편집장


독립협회 회장이 초대 이완용(매국노 대표), 2대 윤치호(대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 국적을 가졌던 윤웅렬의 아들 이토 지코(伊東致昊 : 윤씨 성을 버리고 이토 히로부미의 성을 따름)라는 윤치호 등 열거하기는 지면이 아까운자들이었을 보면 그 성격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의가 있거든 이완용의 패밀리로서 민족지성의 추앙을 받고 있는 이어령씨가 제시 했으면 좋겠다.


이토록 국민을 기만하는 시대적 명칭의 ‘독립공원’에는 반국가반민족홍보조형물들을 세워 놓음으로서 친일매국노의 문관 정치인 출신 대표자 이완용의 독립협회기념구조물 ‘독립문’과 부왜역적으로서 무관 정치인출신 대표자 서재필의 화려한 동상을 주체로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부왜역적과 광복투쟁 애국자를 혼동하게 하는 독립공원


독립공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침략총독부의 강점과 맞서서 투쟁을 하다가 구속당하고 고문당했으며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면서 애국심과 자주민족정신을 되새겨보도록 하기 위하여’ 그 광복투사들이 고생한 현장인 서대문형무소 터를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만들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당시 역적의 무리 중에 지성인을 포섭한 독립협회는 “일본이 청나라를 이기고 우리를 독립시켜준 것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청나라 사신들을 맞이하던 서대문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1897)을 세웠고, 서민들을 포섭하여 이런 분위기의 대중화를 시도하였던 ‘일진회(一進會)’는 숭례문의 성을 헐고 “일본군이 승리하고 돌아온 것을 삼가 환영한다.”는 의미가 담긴 봉영문(奉迎門, 1907년)을 세웠다. 이 두 개의 개선문은 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독립협회가 우리나라를 들어 일본에 바치는 소위 합방을 전제로 한 집단이라면 일진회는 일천황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집단이었다.


▲ 독립공원 원경(사진출처=국가보훈처 블로그) 민족NGO편집장


일진회가 세운 봉영문


서대문 형무소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광복투쟁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을 했던 곳이고, 독립협회의 독립문과 서재필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준 데 감사하여 나라를 들어 일본에 합병시키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같은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고, 그 전에는 ‘일본이 독립시켜준 것에 감사’하는 활동이므로 전혀 성격이 다르다.


이 두 사건 관련자들을 한 공원에 모아놓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독립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으므로 많은 시민들에게 독립문이나 독립협회, 서재필 등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과 관련된 것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공원의 이름을 바꾸거나 ‘우국열사관’과 ‘반역매국노관’으로 구분하여 국민들이 옥석을 가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준 일본에 감사사자는 의미의 ‘독립’


좀 더 따져보자. 1895년 친일파의 계략과 신고에 의하여 전봉준이 처형을 당함으로서 동학혁명군은 대패하였으나, 동학혁명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계획된 작전에 의해서 대거 밀려들어왔던 일본군대가 항일투쟁을 벌이던 의병들을 토벌하였고 이에 걸림돌이었던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이긴 전쟁이었다. 친일적이던 독립협회는 정부의 예산을 빼내어 친일조직기관지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독립신문 보급조직을 통해서 일본인들의 거점 확보를 도우며 신고체제로 활용하여 지방 어느 곳에서나 의병활동의 조짐이 나타나는 대로 즉시 신고를 받아 일본기무처의 의해서 무자비하게 처리하였다.


이같이 기고만장한 친일 독립협회는 패전한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친일 독립협회의 이름을 넣어서 ‘독립문’이라는 현판으로 청일전쟁 일본승전 기념개선문 겸 독립협회의 세를 과시하는 구조물을 보란 듯이 세웠던 것이다.


이때의 ‘독립’이라는 말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주었다’는 의미의 독립인데 오늘날의 시민들은 이러한 사건의 진상을 모르고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나아가 ‘골수 친일파 이완용과 서재필이 망국의 앞날을 내다보고 미리 독립정신을 고취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 독립문을 세우고 기공식을 그렇게도 화려하게 거행하였던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1890년대 후반에 국민을 속이던 짓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의 책임이다.


▲ 서재필 동상 민족NGO편집장


독립공원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더니 이제는 한국 최초의 국적포기자이며 가짜박사로 나타나 친일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인을 지낸 미국인 첩자 ‘필립 제이슨’(舊名 서재필)의 동상이 손을 번쩍 들고 버티어 서있었다. 조국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수많은 우국지사 원혼들이 아직도 어두컴컴한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기세등등하게 지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필립이 만든 독립신문은 의병들을 ‘비적(匪賊, 산적과 유사)’ 또는 ‘비도(匪徒, 떼도둑)’라고 보도를 하여 대중들이 항일운동에 동요하지 말도록 여론을 조작하여 의병활동을 원천봉쇄하려고 했던 반민족 친일기관지였다. 심지어 ‘일본 돈을 쓰자’든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나라로부터 우리나라를 독립시켜준 일본에 감사를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까지 보도를 하여 하루빨리 일본에 붙자는 여론을 조장했던 부왜역적 신문이었다. 이런 신문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언론계와 정부 인사들의 의식에도 문제가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본인들이 미리 준비한 광복투사 감옥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소위 조선침략의 전초기지로서 한국사회 침투작전을 할 때 서재필 등 미리 조련된 친일결사 계몽대원 70여명(일본이 조선침략을 위하여 事前에 官紳視察團 12명外 군사 정치 문화 등 분야별로 61명을 선발해서 일본으로 불러들여 특수공작원으로 훈련시켜서 침투시켰던 자들)으로 하여금 ‘일본당(개화독립당으로도 부름)’을 만들어 세를 키우도록 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개화와 조선독립의 명분을 내세우며 청나라배격운동을 하고 수구파를 몰아내면서 일본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도록 하는 데 역할을 다 했었다.


임오군란과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그때마다 계산되고 계획된 일본군대를 대거 강제 진입시키고는 개화독립당(일본당) 출신들의 활동력을 이용하여 청일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친일 정치사회운동을 하게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전하고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장악된 뒤에는 강제 한일합방을 결행하려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준비 일환의 시설로서 친일각료들을 종용하여 일제가 건설하게 하였던 것이 경성감옥 즉 서대문형무소였다. 그들의 작전대로 막상 강제 한일합방을 결행하였을 때는 항일투쟁을 하는 저항 세력이 또 다시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그럴 때 애국지사들과 항일저항세력들을 모조리 잡아 가둘 수 있는 시설을 미리 준비하는 차원에서 건설했으므로 당시 전국의 감옥 규모와 수용 능력의 167%나 되는 시설로서 단일 감옥으로는 유래 없이 거대한 설계를 하였던 것이고 한일합방 15년 전부터 서둘러 짓도록 종용하였던 것이다.


당시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였던 당국자인 우리정부에서는 그런 저의도 모른 채, “왜 경성감옥을 이렇게 크게 지으라 하느냐?” “재정이 바닥났는데 무리해서 서두를 필요가 있느냐?”는 등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결국 일본 측과 친일세력의 강압에 의해서 짖고야 말았던 것인데, ‘독립문’을 준공한지 13년 만에 ‘독립문’을 세운 독립협회회원들의 활약에 의해서 우리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독립문’을 건립했던 ‘독립협회회원’출신들은 일본의 왕으로부터 백작과 남작 등 최고의 귀족으로서 훈장과 돈과 보직을 받아 일제하의 친일 독립협회 세상이 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는 우리의 항일애국지사들과 나라를 위하고 부당한 국권침탈을 규탄했던 의인들이 줄줄이 끌려가 가두어지기 시작하여 꽉꽉 들어차게 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이미 없어진 우리 정부의 관료들은 ‘서대문형무소가 조선의 식민지화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흉계의 시설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의 활용도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 공포의 경성감옥소 및 서대문형무소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독립문’은 청일전쟁의 일본승전기념 개선문으로서 조선총독부가 경성부 토목과에 책임을 주어 1928년 10월부터 한 달간 보수공사를 하여 영구히 보존하도록 하였었다.


광복 70년, 이제는 이름을 바꾸고 옥석 가리는 공원으로!


이제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으니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새롭게 손을 보아야 한다. 공원의 이름도 ‘독립공원’은 소극적인 반청 또는 항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광복공원’이라고 하면 한 때 강점을 당하여 국권을 상신하였지만 되찾으려는 애국심의 발로가 있어서 결국 승리하였으며, ‘이제 광복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확실히 들 수 있을 것이다.


‘독립공원’을 ‘광복공원’으로 이름만 개칭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내부도 부왜역적(일본인들에 붙어서 나라를 잃게 도와준 역적무리들)과 광복투쟁 애국자들을 확실히 구분하여 재배치함으로써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고 민족혼이 인류애의 정체성으로 당당하게 도약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매국노의 허상으로 남아있는 독립문을 해체하든가 아니면 이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국민에게 홍보하여 나라를 일제식민지로 팔아먹은 국치의 조형물로 교육적 상징물이 되도록 상세한 설명서를 붙여서 구석으로 옮겨서 ‘부왜역적관’으로 유지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부왜역적 돈벌레 필립 제이슨(서재필)의 동상은 지금처럼 크게 있을 가치가 전혀 없다. 따라서 철거하고 작게 만들어 독립신문 보도내용을 포함한 그의 친일과 매국행적을 부각시켜 교육목적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권/역사의병대 총사령

<2015-12-10> 한국NGO신문

☞기사원문: [기고] ‘독립공원’ 이름을 바꿔야한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