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국정교과서 집필과 관련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 날 오후 그동안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그렇게 감추려고 하던 국정교과서 집필진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한 것이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국편은 ‘국정교과서 편찬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본인이 사퇴의사를 밝혔다’는 이유로 이 사람을 집필진에서 빼기로 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과시간이 끝난 지 한참 지난 한밤중에 집필자를 전격적으로 사퇴시키다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자진사퇴의 이유가 ‘이름이 공개되어서’라는 대목에서는 어처구니가 없기조차 하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전광석화처럼 집필진에서 내쫓긴 이 사람은 원래 역사를 가르치던 교사가 아니라 고등학교에서 상업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자원해서 한국사를 가르친 것은 불과 아홉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역사교사로서는 초보라고 할 수 있다. 국편에서 집필자를 공모할 때 내세운 기준에 따르면 “교육경력 5년 이상의 중등학교 교원”이 집필자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경력은 역사교과서 집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 수업 경력 5년 이상의 역사교사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국편은 자격도 되지 않는 사람을 집필자로 선정한 셈이다.
12월 10일의 소동은 교육부장관이 말한 ‘최고의 필진’ 가운데 아직도 복면을 벗지 않은 나머지 집필진의 수준도 대동소이할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유수한 한국사 전공 학자와 교사 가운데 국가가 나서서 끌어 모은 집필진의 실체라는 게 이 정도 수준이라니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국편이 지난 달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학계의 명망 높은 전문가로 집필진을 구성함으로써 최신 연구결과 등 역사적 통설을 충분히 검토·반영”할 수 있도록 집필진을 구성하였다는 주장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쏟아지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국정화를 추진한다며 마치 무슨 큰 자랑인양 떠들어대더니, 정작 IS무장조직을 능가하는 밀실공작과 복면명단으로 국정교과서 작업을 진행해 국민의 지탄을 받아왔다. 모든 것이 비밀에 붙여진 극비 군사작전처럼 진행되다가 이름만 공개되어도 사퇴처리를 했다. 집필자 이름이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국정교과서 추진에 지장이 생긴다니, 이 정도면 국정교과서가 아니라 ‘극비문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미 현 정권은 역사교과서 집필에 국방부를 참가시켜 전사편찬과 역사교과서의 경계마저 무너뜨렸다. 그것도 부족해 대통령이 나서서 기업들이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를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경제 분야가 집필되면 국가기관 혹은 민간의 경제단체에게 검토를 맡기겠다고 한다. 현 정권이 장악한 산하 국가 기관과 전국경제인연합이나 상공회의소와 같은 재벌이나 기업을 이익을 옹호하는 단체에게 역사교과서 사후 검열까지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헌법적 가치를 담은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대 국민 선전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복면집필에 기대어 특정 정당이나 개인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교과서를 제멋대로 뜯어고치고 교과서를 정치도구화 하는 역사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을 세뇌시킴으로써 장기집권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추악한 정치놀음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복면 뒤에 숨은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전원 공개하고 친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쿠데타를 즉각 멈추어야 할 것이다.<끝>
2015년 12월 11일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