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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왜 국민을 “돈의 노예”로 타락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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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5> 유신 쿠데타, 스물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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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1967년 대선을 지난번에 살펴봤다. 이해 총선은 어떠했나.

서중석 :
1967년 6월 8일에 치러진 이해 총선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모든 선거를 통틀어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와 함께 제일 나쁜 선거, 잘못된 선거, 타락한 선거라는 얘기를 듣고 있다. 3.15선거는 관권과 폭력이 동원되고 투·개표 부정이 아주 심했던 선거라면 6.8선거는 관권에다가 금권, 선심 공약, 행락 문제가 심했던 타락 선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3.15선거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서슬 퍼런 권력의 위압에 유권자들이 주눅이 들어서 3인조, 9인조 식으로 선거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6.8선거 때는 그와 양상이 달랐다. 유권자의 마음을 아주 심하게 타락시켜놨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돈 받아먹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선심 공약과 행락이 넘쳐났다. 그런 걸 유권자 스스로 요구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이냐고 할 만큼 유권자 의식이 없었다는 점에서 6.8선거는 정말 잘못된, 3.15선거와는 또 다른 면에서 아주 잘못되고 혼탁한 부정 선거였다.


그래서 후유증도 심했다. 3.15선거는 4월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는데, 6.8선거는 그해 연말까지 무려 반년 동안이나 국회를 공전시키고 정국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거센 학생 시위를 불러일으켰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한 6.8선거의 실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우선 맨 처음에 이 선거에서는 옥중 출마가 많아 화제가 됐다.


옥중 출마 3인방…군축 주장한 서민호, 박정희 정면 비판한 장준하·오재영

▲ 장준하(왼쪽, 1975년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어떤 이들이 옥중 출마를 했나..


서중석: 서민호, 장준하,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도 여러 번 나왔던 오재영이 모두 옥중 출마를 했다. 서민호는 무엇 때문에 감옥소에 들어갔느냐. 이 사람은 1967년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사퇴했는데,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군축을 주장하고 “심적으로는 인정치 않으나 북괴를 현실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서민호는 1966년에 언론인 교류, 서신 교환 같은 남북 교류를 하자는 등의 주장을 했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보석으로 출감한 후 군축, “북괴를 현실적으로는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해 다시 구속된 것이다.


장준하는 “박정희 씨는 동남아와 미국을 다녀와서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을 것을 구상했다”, 그리고 “박정희 씨야말로 우리나라 밀수 왕초다”라고 얘기했다가 구속됐다. 첫 번째 이야기는 청부 전쟁이라는 비판, 그러니까 청부를 받아 우리 군대가 베트남에 간 것이라는 비판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랬는데, 한국에서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이 그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사퇴하는 사건도 나고 그런다. (김영삼 집권기인 1995년 5월 김숙희 교육부 장관은 한 강연에서 “6.25는 명분 없는 동족상잔이고 월남전에는 용병으로 참전”했다고 이야기했다가 전격 해임됐다. <편집자>) “밀수 왕초”라고 한 건 표현은 과격한데, 나중에 이병철 큰아들 이맹희가 한국비료 밀수 사건에 대해 쓴 글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어쨌건 장준하는 이러한 발언들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오재영은 일제 시대에 박정희가 장교였다는 이야기를 한 게 문제가 됐다. 대선 기간에 “일군(日軍) 장교 시절” 운운하다가, 박정희 후보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감옥소에 간 것이다. (구속영장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5월 8일 자에 따르면, 오재영은 대선 때 10여 차례의 지방 유세를 통해 “공화당 후보 박정희 씨는 일본군 장교 시절 독립군을 학살했으며 사직공원 부정 불하도 잘 봐줬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가 선거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됐다. <편집자>)


프레시안 :박정희 집권기에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문제 삼은 오재영은 어떤 사람이었나.


서중석 : 오재영 정도 되니까 그런 얘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걸로 인기를 끈 사람이다. 1963년 대선에서는 추풍회 후보로 나와서 3등을 했다. 그러면서 화제가 됐다. 그런데 한 달 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4등을 했다. 대선에선 3등을 하고 총선에선 지역구에서 4등을 한 거다. 하여튼 재미난 사람이었다. 정치적 쇼를 많이 한 사람이다.


다시 6.8선거로 돌아오면 공화당은 전국구 1번에 정구영, 2번에는 3선 개헌 때 당 의장 서리를 맡게 되는 윤치영, 3번에 백두진을 배치했다. 신민당에서는 그전에 민중당 당수였던 박순천을 전국구 1번에 배치하고 2번은 김도연으로 하는 등 거물들을 배치했다.


이 선거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건 곧 드러났다. 있을 수가 없는 관권 선거였다. 3.15선거가 제일 크게 문제가 된 건 관권 선거라는 데 있었다. 그야말로 관권을 총동원해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그런데 6.8선거에서도 관권 선거가 아주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이때는 대통령까지 나섰다. 3.15선거 때는 그런 건 없었다. 그리고 3.15선거 때는, 국무위원들이 동원됐다고 하더라도 6.8선거 때 박정희 정권이 한 것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선심 공약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고위 공무원들의 선거 운동 지원을 대놓고 밀어붙인 박정희 정권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6.8선거에 어떤 자세로 임했나.


서중석 : 5월 9일 정부는 6.8선거에서 정부 고위층이 공화당 후보의 선거 운동을 지원할 방침을 세웠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국무총리, 행정 각 부 장관, 처장, 원·부·처의 차관, 그리고 기획조정실장 같은 사람들이 선거 기간 중 특정 후보를 지지, 추천하는 지방 유세를 벌일 수 있는, 즉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대통령 선거법 시행령 및 국회의원 선거법 시행령을 고쳤다. 한마디로 고위 공무원들이 직접 여당 지지 유세를 하고 다니겠다는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런 나라가 전 세계 어디에 있겠느냐 싶을 정도였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나 각 부 장관들이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직접 하고 다닐 수가 있느냐, 이 말이다. 상관이 그렇게 하고 다닐 경우 그 밑에 있는 공무원들은 어떻게 되겠나.


그에 앞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미 4월 27일 전체 회의를 열고, “선거 운동 기간 중 국무위원이 국정을 위한 지방 출장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 추천,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건 대통령 선거법에 위배된다”고 해석했다. 당연한 해석 아닌가. 그런데 정부에서 5월 9일 고친 시행령을 보면, 이건 지방 출장 정도가 아니었다. 5월 13일 중앙선관위는 다시 전체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선거법에 따라 국회의원과 지방 의회 의원을 제외한 모든 공무원의 선거 운동을 금지하고 있는 만큼 일반직은 물론 별정직 공무원도 선거 운동을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해석을 했다. 이때 지방 의회는 있지도 않았지만 법에는 그렇게 돼 있었다. 아울러 중앙선관위는 ‘국무회의의 시행령 개정안은 부당하다’고 공식 견해를 밝혔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짓을 국무회의에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보면 꼭 몇 달 전에 일어난 사태가 생각난다. 도대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이 세월호 특별법 취지에 맞는 건가? 그런데 대통령은 어떤 태도를 취했고, 그래서 여당 원내대표 유승민은 어떻게 됐나? 그런 것들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이다.


프레시안 : 중앙선관위의 해석을 박정희 정권 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였을 것 같진 않다. 어떤 태도를 취했나.


서중석 : 권오병은 욕을 참 많이 얻어먹던 사람이라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이때는 법무부 장관이었다. 권오병은 중앙선관위의 이런 견해에 대해 “개정된 선거법 시행령이 모법(母法)에 위배된다고 해석한 것은 행정부의 준입법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다”라고 중앙선관위를 비난했다. 몇 달 전 누가 한 이야기하고 비슷하지 않나? 권오병이니까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 그러자 사광욱 중앙선거위원장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라는 데는 선거 업무를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선거 운동원 및 연설원들의 한계를 규정지어야 하며 개정 선거법의 시행령에 대해 충분히 논의할 권한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도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이러면서 이게 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하니까 박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은 선거 유세에 나서지 말라’고 국무총리한테 지시하고, 자신도 선거 유세에 나서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서 뭐라고 또 이야기했느냐 하면, 선거법 시행령 개정 시비에서 정부 견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대통령이나 고위 공무원들, 별정직 공무원들이 선거 운동에 나선다? 이런 주장은 이승만 대통령 때보다 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박 대통령은 선거 운동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더니만, 5월 18일부터 지방 순회 시찰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5.15선거에서 시찰에 나선 것하고 명칭이 같다. 그때 이승만 후보도 참 이상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자기는 유세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시찰을 갔다. ‘나처럼 대단한 사람은 선거 유세 같은 데 안 나서는 것이다’, 이런 뜻을 담아 유세가 아니라 시찰을 하겠다고 한 것 아니겠나. 이 대통령이 그때 각 지역을 다니면서 연설한 것하고 비슷한 모습을 박 대통령도 1967년에 보였다. 박 대통령은 수원시 행정을 시찰하면서 수원의 기관장 및 유지들에게 수원을 관광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천명했다. 천안에 가서는, 천안의 상수도 건설에 소요되는 200만 달러 규모의 차관 계획을 세우면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다고 천명하는 한편 플라스틱 조화 공장 건립을 추진하라고 시 당국에 지시했다. 이 얼마나 확실하게 선심 공약을 하고 다닌 건가. 청와대 대변인은 “지방 시찰을 계속하는 것이 온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속에서 중앙선관위가 얼마나 시달렸겠나. 모처 등 그런 압박을 가할 만한 기관들이 있지 않았나. 이때쯤 돼서 중앙선관위는 대통령, 국무위원 등의 선거 운동 지원 문제에 대해 이틀에 걸쳐 전체 회의를 다시, 여러 차례 열었다. 그래서 논의하고 또 논의했는데, 그전에 한 해석을 다 뒤집고 5월 21일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만은 선거 유세를 포함한 국회의원 선거법상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것도 그전의 해석과는 너무도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니까 크게 의아할 수 있지만, 그러면 국무위원들은 선거 운동 지원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도 않았다.

3선 개헌에 필요한 의석 확보,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은 왜 그토록 무리한 행보를 한 것인가.


서중석 : 윤보선은 야당 후보 지원 유세에서 “부정 선거로 재집권하게 된 박 정권은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의 3차 중임을 위한 개헌선을 확보하려고 헌법 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압력을 가하는 등 또 다른 부정 선거를 꾀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개헌선 확보, 그게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것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문에서는 ‘선거 분위기가 저조하다. 열띠지 않다’고 5월 하순에 이르도록 보도했다. 예컨대 서울에서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합동 정견 발표회가 열렸는데, 놀랍게도 한 번 열릴 때 동원된 청중이 평균 700명 정도밖에 안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선거는 유사 이래 찾아보기 어려운 관권 선거에다가 선심 공약에 타락한 여러 가지 면을 그야말로 백화점식이라고 할까, 종합적으로 보여줬다. 투표를 일주일 앞두고 한 신문은 1면 톱기사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후보자들이 첫째, 향연 및 금품 제공 등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고 있고 둘째, 지방 사업 공약을 남발하고 있고 셋째, 간교한 득표 작전을 펴고 있고 넷째, 국무위원들의 이례적인 지방 출장으로 빚어진 공무원의 동요, 관권 개입 시비로 말미암아 역대 총선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례없는 이상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이 선거에서 선심 공약이 난무하고 금품을 대량 살포하고 향연 같은 걸 크게 베푸는 대규모 금권 선거가 치러진 데는 이유가 있다.


프레시안 : 왜 그랬던 것인가.


서중석 : 수원을 관광 도시로 발전시키겠다고 천명하고 천안에 플라스틱 조화 공장 건립을 추진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지 않았나.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각종 공장을 지어준다, 다리를 놔준다, 아스팔트를 깔아준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됐다, 이 말이다. 뭐냐 하면 울산에서 정유 공장이 돌아가니까 아스팔트를 깔 수 있는 재료가 나오는 것이고, 또 여기저기 건설을 할 수 있는 경제 발전기로 한국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선심 공약을, 물론 다 지키지는 못하고 일부밖에 못 지킨다고 하더라도 막 할 수 있는 시대적인 면은 있었다. 1988년 선거까지 21년 동안 이런 선심 공약이 많이 먹혔다. 1988년쯤 가면 웬만한 데는 아스팔트를 깔고 다리도 놓을 만한 데는 놓게 되면서 상황이 다소 달라지는데, 어쨌건 이런 점을 하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6.8선거 때 여당 쪽에서 막대한 선거 자금이 돌았는데, 그것도 충분히 이유가 있었다. 역대 선거를 쭉 살펴보면, 1967년 이때부터 돈을 많이 쓸 수 있었다. 예전에 한국은 빈곤한 나라 아니었나. 이전에 부정 선거를 할 때 왜 주로 폭력을 동원했느냐 하면, 돈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부족하니까 주먹으로, 곤봉으로 한 것이다. 경찰하고 깡패를 동원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게 바로 1950년대 선거였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으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부정 선거를 저질러야 하겠는데 돈이 충분치 않았다. 그때는 돈이 나올 곳이 별로 없었다. 그런 걸 충분히 낼 만한 기업이 얼마나 됐겠나.


그래도 상당한 현금이, 그것도 달러로 나오는 유일한 곳이 있었다. 텅스텐 즉 중석을 캐던 상동광산이었다. 텅스텐은 미국이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로 하는 것 아니었나. 그래서 잘 사갔다. 중석 달러가 1950년대에 여러 번 정치 자금으로 문제가 된 게 바로 그 때문이다. 장면 정부도 이것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실제로 장면 정부가 여기서 큰 부정을 저지른 건 없었다. 5.16쿠데타 세력이 그걸 얼마나 캤나. 그렇지만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건 못 찾아냈다. 그런 건 안 나왔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50년대에 정치 자금을 끌어내는 제일 유력한 데가 어디였느냐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군, 그중에서도 육군이었다. 육군은 미국의 엄청난 원조 물자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쌍팔(88)년’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단기로 ‘쌍팔년’이니까 서기로는 1955년(단기 4288년)인데, 이런 말까지 나왔다는 건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이때 얼마나 많은 미군 물자가 부산항에 도착했는가를 말해준다. 다른 말로 하면 빼먹을 게 얼마나 많이 생겼겠나. “‘쌍팔년’도에 돈 못 번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그랬다.


그래서 자유당 고위 간부들은 정치 자금을 끌어낼 수 있는 곳으로 육군을 주시했다. 이기붕이 직접 육군 참모총장한테 ‘돈 얼마 가져와라’, 이럴 정도였다. 그러면서 한때 육군이 자유당 선거 자금을 대는 데 톡톡히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거기 말고는 덩치 큰 선거 자금을 끌어들일 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64∼1965년경부터 일본에서 돈이 들어오지 않나. 한일협정이 타결되기 전부터 돈이 들어왔다. 1965년 한일협정이 타결되면서 또 큰돈이 들어왔다. 아울러 월남에서도 돈이 들어왔다. 여러 군데에서 돈이 돌기 시작하고, 또 국내외 기업체들한테 돈을 내도록 한 것 아니겠나. 1967년 선거가 돈이 많이 돈 선거가 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인 환경이 작용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돈을 써도 되는 건가.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킨 6.8 타락 선거…그 후유증도 심했다


프레시안 : 1967년 당시 금권 선거 풍조,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서중석 : 금권 선거와 관련해 당시 신문에 이렇게 보도됐다. “경찰서장, 군수, 구청장이 직접 선거 운동에 나서서 동장과 경찰들에게 현금과 쌀, 밀가루를 주고서 주민들한테 나눠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500원, 1000원 현금이 든 돈 봉투가 공공연하게 돌려졌다.” 어떻게 경찰서장, 군수, 구청장이 직접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참 알 수가 없다. 또 한 신문에는 향응 제공 및 자금 살포 작전은 주로 부녀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어서 향토 미풍 시비로 번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돈과 표를 직결시켜 선거에 임하도록 하는 풍조, ‘유권자는 당연히 돈을 받아야 한다. 뜯어먹어야 한다. 잔칫돈, 향응비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풍조를 일으킬 만큼 유권자를 타락시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거에서 이런 심한 타락상이 유별나게 눈에 띈 게 놀이였다. 이게 나중에는 관광지에 끌고 다니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유원지부터 선거의 타락상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후보자들은 주로 부녀자들로 하여금 그룹을 짓게 해서 유원지로 놀이를 가게 하고 인근 관광지로 여행을 시켰다. 방방곡곡 유원지라는 유원지에서는 밤새도록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췄다. 그러면서 밤을 새우고 그랬다. 그 근처 길거리에서까지 술에 잔뜩 취해 춤추고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전국이 술에 취한 상태가 됐다. 그와 더불어 ‘막걸리 홍수’가 일어났다.


후보자들의 돈으로 이뤄지는 유권자들의 이러한 행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6월 3일, 선거 닷새 전인 이때 대구 수성국민학교 어린이들이 유원지 정화 궐기 대회를 열고 “우리 어머니들을 술 취하게 하지 말라”, “엄마 아빠, 술 먹고 춤추지 마세요”라고 외치는 기가 막힌 장면이 나타날 뻔했다. 궐기 대회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이날 대회가 실제로 열리지는 않았지만, 이 내용이 신문에까지 나고 그랬다. 이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 (<동아일보> 1967년 6월 3일 자에 따르면, 수성국민학교 5·6학년 학생 1000명은 “엄마 아빠, 술 먹고 춤추지 마세요” 등의 플래카드 문안을 준비해 등교했다. 오전 수업만 하는 토요일이었지만, 학생들은 오후 1시로 예정된 궐기 대회를 위해 다들 도시락까지 준비해 학교에 왔다. 그러나 학교 당국이 막아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편집자>)


<동아연감>은 이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유권자들은 대가 없는 표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 공공연히 금품을 요구했다. 무섭고 괴이한 이상 정신 상태가 전염병처럼 만연돼 퍼져 가고 있다. 가치를 상실한 돈의 노예들이 소돔의 천년성을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야릇한 정신 상태가 전염병처럼 퍼져 가는 속에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재일 교포 김재화 구속 사건이다. 1963년 국회의원 선거법에서 전국구 비례 대표제를 만든 이유를 전에 설명한 적이 있지 않나. 한마디로 여당이 안정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여당한테 무조건 비례 대표 반절을 주게 돼 있었다. 더군다나 제1당의 득표율이 50퍼센트 이상이면 비례 대표 의석의 3분의 2를 주게 돼 있었다. 그런데 야당이 1967년부터 ‘우리한테는 돈이 없는데 이 비례 대표제를 활용할 수 있다. 이걸 돈으로 맞바꿀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뭐냐 하면 ‘비례 대표 명단에만 올려놓으면 자동적으로 몇 명은 당선된다. 그런데 공짜로 당선시킬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돈을 받자’, 이렇게 된 것이다.


이건 명백히 법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자기들이 한 짓이 있지 않나. 비례 대표제를 자기들한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야당이 그렇게 하는 걸 강하게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면서 1967년 이 선거부터 1990년대 초 정도까지 비례 대표 후보자는 돈을 냈다. 이 선거에서 자금 고갈 상태에 빠진 신민당은 당선이 확실한 14번까지 당원이면 2000만 원, 비당원이면 300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재일 동포 김재화는 비례 대표 10번이었다. 이 사람은 비당원이었으니까 돈을 얼마 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중앙정보부가 보기에 재일 교포는 얼마나 때려잡기가 쉬운 존재였나.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 시절 정보 기관에서 재일 교포 쪽을 가지고 많은 간첩 사건을 발표하지 않았나. 재일 교포를 대상으로 간첩단 사건만 만든 건 아니었는데, 이때도 당국에서는 ‘조총련계 돈을 받았다’고 하면서 김재화를 바로 구속해버렸다. 중앙정보부는 ‘김재화가 조총련 계열에 포섭돼 신민당 비례 대표로 등록된 게 드러났다’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이때 ‘조총련’이라고 하지 않고 ‘조총련 계열’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수사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김재화 건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느냐. 선거가 일주일밖에 안 남은 때인 6월 1일, 신민당 중앙당 경리 장부가 압수됐고 신민당 거래 은행에서 자금 인출이 거부됐다. 신민당은 일시에 돈이 동결되고 만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당 간부들을 조사한다면서 잇따라 소환했다. 그래서 신민당이 마비가 됐다. 선거에서 마지막이 아주 중요한데, 전열을 제대로 갖출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김재화는 나중에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고, 그래서 1971년 신민당 전국구로 다시 나오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프레시안 : 금권 선거 부분을 조금 더 짚었으면 한다. 1967년 6.8선거에서 돈을 매개로 한 타락이 그토록 심했다면 그 후유증도 꽤 오래갔을 것 같다. 어떠했나.


서중석 : 이때부터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이 관광지, 유원지로 막 다녔다. 버스를 대절해서 다녔는데, 그 돈을 누가 댔겠나. 그러면서, 대선도 그런 게 많았지만 총선은 관광 선거가 된다. 이건 1988년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식으로 관광버스 타고 다니는 걸 199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다. 예컨대 돈이 있는 지구당 같은 데서는 선거철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여러 지역을 다녀야 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런 게 당연한 관행으로 돼버리는 식으로, 20세기 말까지 한국 사회가 그렇게 갔다. 그렇게 가게 만든 단초가 바로 1967년 6.8 타락 선거였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술에 취해 밤새도록 춤추는 것을 그때 보면서 기가 막히더라. 똑같은 율동을 밤새도록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러나 싶더라. 나중에는 선거가 아닌 때도 그런 모습이 많이 보였다. 일각에서는 모 정당에 공공연하게 요청하는 일도 생기고 그랬다. 곤봉으로 두들겨 패는 식으로 폭력으로 내리누르고 경찰들이 째려보던 1950년대 선거, 그래서 기가 죽어서 투표장에 들어가던 때와는 다르게 6.8선거는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킨 선거였다. 정말 심한 금권, 향응, 타락 선거였다.


그것보다 더 표에 작용한 건 선심 공약이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대통령, 국무위원들이 전국에 시찰이나 지방 출장을 다녔다. 그래서 ‘공무원의 여당 사병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야당이 비난했다고 신문에 나고 그랬다. 또 공화당 후보들은 지방 산업 공약을 남발했다. 신문에서 ‘그 공약을 다 합치면 몇 년간 예산 전부를 그 공약을 이행하는 데에만 써도 모자란다’고 할 정도로 방대했다. 도무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여당 후보들이 이런 공약을 막 하고 다니니까 야당 측도 할 수 없이, 지킬 수 없는 공약들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방 의원 선거 같은 인상마저 주고 있다. 이게 무슨 전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선거냐’,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관권 선거의 한 양상으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 때 있었던 일이 또 생겨났다. 뭐냐 하면 산림법을 최대한 악용하는 것이었다. 전에 없던 과잉 단속이 막 벌어져서 한 군내에서 산림법 위반으로 입건된 게 200여 건에 이르기도 했다. ‘큰 나무 벤 자는 탈 없고’라는 제목의 당시 신문 기사 같은 걸 보면 이런 얘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박정희 정권이 빚어낸 해괴한 삼위일체·오위일체 선거


프레시안 : 금권이 난무한 6.8선거에서 공화당이 뿌린 돈의 규모가 밝혀졌나.


서중석 : 그건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1971년 대선 때에는 한 해 국가 예산의 10퍼센트가 넘는 600억 원 내지 7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선거 자금을 박정희 후보 쪽에서 썼다고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나. 김충식 기자가 그 부분을 열심히 취재해서 당시 여당 고위층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선거 자금 규모가 그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인데, 1967년 선거의 경우 그렇지가 않다. 1967년 이때는 자신들이 엄청나게 쓴 돈의 총액을 여당에서도 정확히 알기는 했을까 싶기도 하다.


공화당 원로인 정구영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6.8선거 당시 삼위일체 선거, 오위일체 선거가 있었다고 돼 있다. 6.8 부정 선거 이후에 큰 문제가 발생하니까 정구영이 직접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서 정치적 해결을 하라고 요구했다. 내각을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거를 지휘한 내무부 장관 엄민영과 문교부 장관 권오병, 법무부 장관, 농림부 장관, 재무부 장관 이렇게 5명은 바꿔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얼마나 노골적인 관권 선거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양반은 이때 대통령한테 이렇게 얘기했다.


“야당이나 국민들이 이번 선거를 삼위일체 선거니 오위일체 선거니 말합니다. 삼위일체는 군수 이하 일선 행정 관리, 경찰서장, 세무서장, 농협이나 영림서의 선거 운동을 말하는 겁니다. 군수와 경찰서장은 내무부 산하이고, 세무서장은 재무부, 영림서장은 농림부 산하 아닙니까. 이 3개 부서가 산하 공무원을 동원한 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시골 가면 파출소 순사가 무섭습니다. 농민들이 그들의 미움을 받거나 이들 기관과 등지고는 살지 못합니다. 친구끼리 화투 놀이를 해도 도박했다고 잡아들이면 꼼짝 못하고, 산에 가서 마른 나무를 주어와도 산림법 위반으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이런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공무원이 선거 간섭을 했다고 해서 삼위일체라고 하는 겁니다. 오위일체는 여기에다 학교 교직원과 검찰을 추가한 것입니다. 교직원의 선거 이용도 일반화된 일입니다. 심지어 시골 국민학교 교직원들까지 어린 아동들에게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이 허다한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검찰도 일선에서 능동적으로 선거 사범을 파헤치고 경찰들을 이 방면에 동원해야 하는데, 선거 기간 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선거가 끝난 후에도 여당 쪽 선거 사범은 애써 눈감아주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의 3부에다 문교와 법무를 합치면 5부 즉 오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다섯 명의 장관을 갈아치워야 합니다.” (영림서는 지방의 산림 행정을 맡았던 부서로 1998년 지방산림관리청으로 이름이 바뀐다. 본래 농림부 산하였는데, 6.8선거 직후인 1967년 8월 산림청 산하로 소속이 바뀌었다. <편집자>)


정구영이 이렇게 진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은 “지나친 타락 선거였다는 점도 인정해”라고 하면서 “그런데 야당이 너무 심하게 나오는 것 아냐?”라고 이야기했다고 그런다.


겹치는 이야기이지만 공무원 동원에 대한 다른 기록도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각지에 파견돼 있었다. 그 사람들이 선거 운동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중앙 관서 사람들 그리고 국영 기업체 임직원 같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됐다고 한다. 다들 연고지에 가서 공화당 선거 운동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 지시에 따라 내려온 사람들이 지방에서 서로 계속 만나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세무서장, 농협 조합장, 영림서장까지 공화당 선거 운동을 해야 했다. 세상에나, 농협 조합장까지 끌어내서 여당 선거 운동을 하게 하는 세상이었다.


이 선거에서는 간교한 선거 운동 행태도 눈에 많이 띄었는데, 그런 것들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줬다 뺏기, 상대 진영을 교란하기 위한 인신공격 등의 수법으로 고도로 지능화한 득표 전략을 세워 사실상 선거법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경지로 선거 분위기를 몰아넣고 있다. 별의별 간교한 짓을 다 벌이고 있다’고 신문에 보도되고 그랬다. 그런데 전국에서 이런 타락 선거 문제가 제일 심각한 지역으로 집중적으로 주목받고, 최대 열전 지대이자 이상 과열 지구라는 평가를 받은 데가 있었다.


김대중 떨어뜨리려 목포에서 선심 공약 쏟아낸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어디인가.


서중석 : 목포였다. 김대중과 체신부 장관을 했던 공화당 후보 김병삼이 맞붙은 지역이다. 박 대통령은 5월 26일 목포에 직접 갔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를 지원하는 첫 번째 유세를 목포에서 했다. 그 전날(25일)에는 목포에서 임시 국무회의라고 불린 회의를 열었다.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등 지역 개발 사업에 관계된 국무위원들을 불러 “호남 지방 푸대접 인상을 씻어주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라”고 했다. 또한 “목포 부두 정비 사업에 소요되는 2억1500만 원 중에서 1억700만 원을 중앙에서 지원하라”, 이렇게 직접 지시했다. 당시 이건 상당히 큰돈이었다. (이에 더해 박정희 대통령은 국유지인 삼학도의 관리권을 목포에 이관하겠다고 약속하고 영산강 개발 및 각종 공장 건립도 검토하겠다는 등의 선심 공약을 쏟아냈다. <편집자>)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유세에서 “정국 안정이 필요한데 목포에서는 과거 20년 동안 야당 의원만 되지 않았느냐. 이번만은 여당 의원을 선출해 지역 사회 발전에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공화당 총재이던 박 대통령은 “야당이 ‘헌법을 개정해 종신 대통령제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때도 이 이야기가 나온 건데, “이번 국회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되더라도 대통령 3선이 금지된 현행 헌법을 개정할 생각이 없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신민당은 박 대통령의 목포 유세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목포는 엄청난 열전 지대이자 이상한 과열 지구로 떠올랐다. 실력자들이 대거 출동해서 지원하는 지역이 돼버렸다. 박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엄민영 내무부 장관, 이후락 비서실장한테 김대중과 김영삼이 출마한 지역을 비롯해 7군데를 정책 지구로 정해주고, 반드시 떨어뜨리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중에서 특히 한 지역이 격돌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선거를 이틀 앞두고 목포에서는 신민당 유세장에 모였던 청중이 데모를 했다. 대구에서는 입후보자 초상화 화형식도 벌어졌다. 충남 천안과 보령에서는 선거 운동 차량을 파괴하는 난폭한 사건이 일어났다. 선거 전전날인 6월 6일까지 전국에서 1318명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입건되고 그중 14명이 구속됐는데, 입후보자 입건만도 235명이나 돼서 전 출마자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매수 행위를 한 후보자도 110명이나 됐다. 부정 선거범은 6월 7일 오후에 1643명으로 부쩍 늘어났다. 이전 총선의 5배나 된다고 한 신문은 보도했다. 목포에서는 선거 전날인 이날 밤 김대중 후보 유세가 끝난 뒤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했다. 부산의 김영삼 후보 유세장에 모여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행진했다.


프레시안 : 김대중 등 7명을 찍어서 떨어뜨리라고 한 건 1954년 5.20선거 때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 등에게 취한 조치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각각 사사오입 개헌과 3선 개헌에 필요한 국회 의석을 확보하고자 눈에 불을 켠 시기에 그런 조치를 취했다는 점도 비슷한 것 같다.


서중석 : 1954년 그때는 이승만 쪽에서 3명(조봉암, 신익희, 오위영)을 떨어뜨리라고 한 것으로 돼 있다. 오위영은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내각 책임제에 앞장서며 이승만을 몹시 괴롭혔다고 자유당 쪽에서 본 사람이다. 조봉암과 신익희의 경우 1956년 대선에 나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이승만 쪽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자신에게 도전해 정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리려 한 셈이다. 박정희 쪽에서 1967년에 김대중, 김영삼을 떨어뜨리려 한 것에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은 당시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김영삼과 함께 나중에 뭔가 할 인물이다’, 이렇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40대 기수론을 들고 전면에 나서지 않나.


하여튼 도대체 6.8선거 같은 선거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 건가. 박정희는 3.15 부정 선거를 비난한 것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걸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3.15 부정 선거보다 더 비열한, 더 타락한 선거를 이 6.8선거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앞장서서 한 것 아닌가. 그런 면이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가.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참 무서운 것이, 남들이 잘못한 것은 그 몇 배, 몇 백 배로 부풀려 강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한 잘못은 다 합리화하는 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장면 정권에 대해 특히 그랬지만, 장면 정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야당이 뭔가를 잘못했다고 하면 아주 강렬한 비난을 퍼붓지 않았나.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내가 하는 건 다 국가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여긴 측면이 보인다. 이런 식의 사고가 정말 무섭다고 난 본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서른 여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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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12-13>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정권은 왜 국민을 “돈의 노예”로 타락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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