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방송>(KBS) 이병도 기자가 지난달 말 <한겨레>와 만나 다큐멘터리 <훈장>이 방송에 나가지 못한 과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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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인물로 본 2015년
④ 불방 다큐 ‘훈장’ 제작한 KBS 기자 이병도
야심찬 기획이었다. 한국 현대사를 포괄하는 주제, 이제껏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새로운 정보, 한국 사회의 오래된 이념적 논쟁 구도의 반영…. 저널리스트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한 요소들이 가득했다. 한국방송(KBS) 탐사보도팀이 기획한 2부작 다큐멘터리 <훈장>에 대한 얘기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훈장>은 광복 70년이었던 올해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훈장>은 여전히 내부 ‘데스킹’(내용 손질) 과정에 있고, 물리적으로 볼 때 올해 안에는 전파를 타기 힘들 전망이다. 지난 10월 제작진은 “사실상 ‘불방’ 수순을 밟고 있다”는 성명까지 내며 방송을 촉구했지만, 그 사이 사장이 바뀌는 통에 실질적으로 진전된 것은 없다. 지난달 말 <훈장> 제작진 가운데 한 명인 이병도 한국방송 기자를 만났다. 지난 7월 한국방송 기자협회장으로 선출된 이 기자는 전례에 따라 현재에는 디지털뉴스부에 속해 있다. 그는 <훈장> ‘불방’ 논란에 대해 “방송일이 미뤄지고 검열에 가까운 데스킹이 이뤄지는 등 모든 과정이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그 뒤에는 이른바 ‘민감한 문제’에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회사 쪽의 행태가 있었다”고 비판했다.
서훈기록 72만건 입수·분석하니
친일 인사·간첩조작 수사관들 훈장
‘그럴수도’ ‘부적절’ 두 시선 균형노력
자꾸 방송 미뤄 방영촉구 호소문
그때부터 전례없는 데스킹 시작
“백선엽·박정희 내용 들어내라”
친일과 훈장편 1/3이나 ‘방송불가’
간첩과 훈장편 한홍구 인터뷰 빼라
■ <훈장>은 어떤 프로그램? 탐사보도팀이 ‘훈장’이란 아이템에 착안한 것은 2013년이었다. 훈장은 국가가 주는 최고의 영예인데, 과거 정부들이 각각 어떤 사람들에게 훈장을 줬는지 살펴보면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초 자료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2013년 행정자치부에 서훈 내역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는데, ‘개인정보’라면서 비공개 결정을 하더군요. 소송을 제기해 올해 1월에야 대법원에서 ‘공개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소송까지 벌여 받아낸 자료는 무려 66만여건이었다. 그나마 서훈 사유 등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아, 다른 경로로 6만여건의 자료를 추가로 입수했다. 전체 72만여건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친일 행적을 보인 인사들과 ‘간첩조작’ 사건의 수사관들이 대거 훈장을 받은 사실이 주된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간첩과 훈장’(1편), ‘친일과 훈장’(2편)이라는 2부작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군사독재 시절 무고한 사람들이 불법적인 연행과 고문 등으로 간첩으로 만들어졌는데, ‘간첩과 훈장’편에서는 이런 일을 벌인 사람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부적절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친일과 훈장’편은 기획 취지가 조금 다릅니다. 예컨대 서정주 시인의 경우 일제 징병을 찬양하는 시를 쓰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지만, 문학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죠. 이에 대해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는 관점과 “공이 과를 넘을 수 없다”는 관점이 엇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친일 행적자들의 훈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대립된 두 가지 시선을 균형있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간첩과 훈장’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에 많았고, ‘친일과 훈장’에 해당하는 사례들은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에 많았다고 한다. 집권 기간이 길었던 박정희 정권 때의 사례가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석연치 않은 이유로 연기, 또 연기 5월말께 <훈장> 2부작은 6·7월에 각각 한 편씩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6월 초 ‘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방송 예정일이 7월로 밀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훈장>은 ‘방송 예정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제작진도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6월24일 한국방송 <뉴스9>의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보도가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분위기가 심상찮게 바뀌었다고 한다. 보수단체들이 한국방송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인호 한국방송 이사장은 이 보도를 문제삼기 위한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이 기자는 “7월 초에 ‘아이템 순서가 바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고 그 뒤에 보니 <훈장>이 ‘방송 예정 리스트’에서 사라져 있었다”고 말했다.
끝없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보통 시사 프로그램은 최소 한 달 전에 방송일이 정해진다. 방송일이 먼저 정해지면 취재, 영상 촬영 등 제작을 진행하고 방송일 열흘 전쯤에 데스킹을 받는다. 6월께 이미 제작을 거의 완료한 <훈장>은 팀장의 데스킹까지도 끝낸 상태였지만, 방송일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방송 예정 리스트에서 빠진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방송을 내달라’고 하자, ‘8월에는 한 달 내내 광복 특별기획이 잡혀 있어서 어렵다’고 했어요. 그 뒤 8월 하순께 다시 문제 제기를 했더니, 이번에는 ‘9월 한 달 동안 경제살리기 시리즈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제작진은 9월8일 사내게시판에 호소문을 올리고, “조속한 방송을 촉구”했다. 호소문은 2000여건의 조회수와 240여건의 추천을 기록하는 등 사내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 때문인지 열흘 뒤인 9월18일부터 시사제작부장이 주관하는 데스킹 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 “방송 예정도 없이 데스킹, 비상식적이었다” 그러나 2시간씩 10차례나 이뤄진 데스킹 회의는 제작진에게 또다른 ‘고역’이었다고 한다. 이 기자는 “데스킹이 아니라 ‘내부 검열’에 가까웠다”고 했다. 데스크는 ‘친일과 훈장’편을 주로 문제 삼았다. 이 기자는 “예컨대 데스크는 ‘백선엽·박정희 등이 받은 훈장은 한국전쟁 때 세운 공으로 받은 무공훈장으로 친일 행적과는 상관이 없다’며 빼라고 지시했다. 한국 정부가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인들에게 훈장을 준 사실도 빼자고 했다“고 했다. 특히 이승만·박정희 관련 부분은 방송에서 언급되는 것 자체를 꺼리는 태도가 보였다”고 했다. 전체 원고의 3분의 1 가량이 ‘방송 불가’ 통보를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기획 의도 자체가 친일 행적자의 훈장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라고 맞섰다.
‘간첩과 훈장’편에 대해서는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간첩이 아니란 보장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조작’이란 표현을 쓰지 말라고 주문했다. 취재원 가운데 하나였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위원)의 인터뷰를 빼라는 주문까지 나왔다. 마침 보수단체, 언론 등이 한 교수에 대해 “대통령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며 공격을 쏟아붓던 시기였다.
이 기자는 인터뷰 도중 “데스크의 정당한 데스킹 권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언론사가 조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데스킹은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제작진의 의도가 있다면 데스크의 의도도 있는 겁니다. 좋은 방송을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서로 의도가 달라서 논쟁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훈장>의 경우엔 방송일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 검열에 가까운 데스킹이 이뤄지는 등 전체적인 과정 자체가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었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 “공영방송, ‘다양한 목소리’ 전해야” 무엇보다도 이 기자는 이번 데스킹 과정이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눈치 보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납득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승만·박정희 관련된 부분에 대해 되도록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해가려 하는 등 정치사회적인 논란을 최소화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것이다. 또 회사 쪽의 이런 행태가 공영방송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했다. 그런 차원에서 <훈장>의 경험은 공영방송 내부의 현실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자는 우리 사회 전체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공영방송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중요한 배경으로 꼽았다.
“이명박 정부 이후부터 점점 ‘비상식’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행태들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공영방송은 힘에 눌린 작은 목소리까지 껴안는 ‘다양한 목소리’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재벌 회장도, 옆집 아저씨도, 산동네 아주머니도 똑같은 수신료를 내고 있고, 그것이 공영방송의 핵심이라는 점을 우리 구성원들이 다함께 마음 속에 새겨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훈장> 데스킹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지난 11월 데스크가 내려보낸 최종 원고에 대해 제작진이 ‘내용에 동의하기 힘들다’고 반발해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11월23일 고대영 사장이 새로 취임한 뒤로 대대적인 인사 발령이 났다. 이 기자는 인터뷰를 한 뒤 최근 “국장·부장 등 데스크들이 유임했기 때문에, <훈장>이 이른 시일 안에 방송될 수 있도록 이분들과 다시 성실하게 논의를 해보려고 한다”고 밝혀왔다.
그는 “지난해 ‘청와대 방송 개입’ 문제로 길환영 사장의 해임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방송 내부에서 많은 반성과 앞으로 잘해보자는 논의가 많았다. 한국방송에서 새롭게 주된 자리를 맡으실 분들 역시 당시 그런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으니, 그분들께서 앞으로 그런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실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 속에는 믿음보다 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2015-12-20>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