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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에 나치 문양…박정희 집권기에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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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7> 유신 쿠데타, 서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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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6.8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한창이던 1967년 7월 8일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동백림 사건,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7월 8일 중앙정보부는 동독에 속한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삼아 북괴를 드나들면서 간첩 활동을 한 학계·문화계 인사, 언론인, 공무원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적발됐다고 발표했다. 이게 동백림 사건이다. 서독이나 프랑스에 유학했던 학계·문화계 인사, 언론인, 공무원 등 한국에서는 엘리트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동베를린의 북괴 대남 공작 거점을 통해 북괴와 접선하고 평양까지 드나들면서 북괴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의 적화를 꾀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유명한 사람이 많이 끼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7월 11일 제2차 발표 때 중앙정보부는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지도 교수였던 서울대 황성모 교수, 그리고 민비연 초대 회장 이종률, 2대 회장 김중태, 3대 회장 현승일, 회원이던 김도현, 5대 회장 박지동, 초대 총무 박범진, 나중에 다들 국회의원을 하거나 유명한 인물이 되는데 이 사람들이 황 교수 주도로 정부 전복을 꾀했다고 공표했다. ‘황 교수는 1950년대 말 독일에 유학했을 때 북괴에 포섭됐고, 귀국 후에는 민비연 지도 교수가 돼 학생 시위를 선동했는데 그 배후가 북한이다’, 이런 식으로 각본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생 시위는 1964년에 일어나 6.3운동에 이른 한일 회담 반대 시위를 주로 가리킨다. 이게 유명한 제3차 민비연 사건이다.

프레시안 : 북한과 접촉했다는 부분이 사실이어서인지 아직까지도 동백림 하면 간첩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중앙정보부 발표대로 이들은 간첩이었나?

서중석 : 간첩단 사건이라고 신문에서 많이 보도했고 중앙정보부에서도 간첩이라고 하고 그랬는데, 동백림 사건에 관련된 사람이 아주 많다. 그중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개인별로 따져도 간첩 활동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북한에 갔다 온 건 사실이지만 그건 간첩 활동과는 다른 것이다. 기본적으로 간첩 활동은 남한에 와서 해야 하는 건데, 이 사람들 중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유럽에 있었다. 간첩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뿐 아니라 간첩단이라고 하면 같이, 공동으로 뭔가를 모의해서 한 것이라는 말인데 이 사람들은 공동으로, 같이 뭔가를 한 게 없다. 개인적으로 동베를린에서 돈을 받거나 한 건 있어도, 그리고 평양에 갔다 온 건 있어도 몇 사람이 모여서 같이 무언가를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음악가 윤이상 부부와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응로 화백 부부도 혐의자로 발표됐다. 그 이외에도 천상병 시인, 이 사람은 간첩 불고지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은 특히 체포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

‘청와대 친서’ 거짓말에 속아 고문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계적인 음악가


프레시안 : 체포 과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체포가 아주 극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고, 당사자를 속여 끌고 온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체포 과정이 크게 논란이 됐다. 6월 20일 이후 해외에서 붙잡혀 온 사람이 서독에서 16명, 프랑스에서 8명, 미국에서 3명, 영국에서 2명, 오스트리아에서 1명 등 무려 30명이나 됐다. 당시 한국 지식인, 문화인 가운데 일류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동베를린 사건으로 체포됐다고 볼 수 있다.


체포 과정을 보면 최덕신 서독 주재 대사도 모르게 작전이 시작된 것으로 돼 있다. 윤이상의 경우 ‘박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왔다. 8.15 행사에 당신이 초대받았다’고 말한 사람에게 속아서 오게 됐다. 윤이상, 이응로 모두 이런 식이었다. 특정 장소로 오라는 모 기관의 말에 속아서 갔다가, 그곳에서 서독 본 주재 한국 대사관까지 강제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상당수는 기관원과 같이 가는 것에 응하지 않는다면 여권이나 대한민국 시민권을 뺏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고 응했고, 또 한국의 가족이 당할 피해 같은 것 때문에 응하고 그랬다.


천상병 시인, 이 양반은 이 사건으로 몸이 더 나빠져서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기이한 행동이 참 안타까운 모습으로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그랬다. 이 사람은 중앙정보부에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 어떤 관계인지 자백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3번이나 전기 고문을 당했다. 몇 번이나 까무러치고 그랬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잡혀간 지 6개월 만에 나온 후에도 행려병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행려병자 비슷한 취급을 오래 받았다. 내가 <신동아>에 있을 때 <신동아> 부장이던 사람하고 천 시인이 친구였는데, 천 시인이 다리를 비틀며 회사에 찾아와 친구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그랬던 게 기억난다.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분류돼 병원에 있을 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인들은 천 시인이 어딘가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시간이 더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지인들은 천상병 유고 시집을 발간한다. 그런데 얼마 후 천 시인은 병원에서 나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유고 시집이 나온 특이한 사례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집을 낸 천상병은 고문과 가난으로 고통받았음에도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으로 표현한 ‘귀천’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시를 남기고 1993년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프레시안 :
천상병 시인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휘말린 다른 사람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나.


서중석 : 잡혀 온 사람들은 고문을 많이 당했다. 대표적으로 음악가 윤이상이 당한 경우를 한 번 보자. 6월 17일 낯선 사람이 윤이상에게 전화를 해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대통령께서 보낸 친서를 전달해야 하니 이 호텔로 나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 가니까, ‘본국 대사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윤이상을 끌고 간 것이다.


윤이상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처음에는 윤이상이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기관원은 윤이상의 허리 쪽을 발로 차고 무릎과 정강이를 밟아 뭉개면서 무릎을 꿇게 하고 그러면서 계속 고문했다. “너는 북조선의 간첩이야.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노동당원이야”라며 윤이상한테 이 내용을 쓰라고 강요했다. 모서리가 뾰족하고 두꺼운 각목으로 윤이상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때려 쓰러뜨렸다. 이런 매타작이 계속됐다. 그뿐만 아니라 1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통나무에 윤이상을 매달고, 팔다리를 둥글고 긴 나무에 묶은 다음 얼굴에 젖은 천을 씌웠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의 물을 천 위에 막 부어대면 천이 입과 코에 달라붙어서 숨쉬기도 어렵고 기절하게 되는데, 이런 물고문으로 윤이상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그런 후에는 다시 결박을 풀어서 바닥에 눕힌 다음 의사가 주사를 놓아 깨어나면 또 매달아서 물고문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이상은 어린 시절 고향 통영의 어른들이 송아지나 돼지를 잡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통나무에 매달린 모습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권 때 나도 이걸 당했는데, 그때 나 역시 꼭 그런 생각이 들더라. 돼지를 매달듯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까. 하여튼 주사를 7번 정도 놓은 뒤 고문자들은 윤이상을 잠시 쉬게 한 후 계속해서 자기들이 쓰라는 대로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 동백림 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은 이응로, 윤이상, 천상병을 기리는 ‘동백림 3인의 거장’ 행사(2006년 7월 20일, 서대문형무소). ⓒ연합뉴스

대법원의 용기 있는 판결과 괴벽보 사건


프레시안 : 동백림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서중석 : 이 사건이 국제적인 사안으로까지 크게 확대된 건 체포 과정 때문에도 그렇게 됐지만 외교 문제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서독과 차관 문제라든가 광부와 간호사 문제 등 여러 사안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는데, 서독 정부가 서독에서 붙잡아 간 사람 16명 전원 귀환을 요구하면서 외교 문제로 번졌다. 자국 영토에서 수십 명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간 것을 주권 침해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서독 지식인들이 특히 윤이상 문제로 들고일어나 외무성에 강력히 항의한 점도 작용해 서독 정부로서도 그렇게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심 재판은 1967년 12월에 열렸다. 피고인 34명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조영수와 정규명에게는 사형, 윤이상, 정하룡 등 4명에게는 무기 징역 등의 형을 선고했다. 방청석이 100여 명의 국내외 기자로 붐볐는데 그중 20여 명은 외국 기자였다. 공판이 정말 공정하게 진행되는가를 보기 위해 독일에서 대학 교수와 정부 대표 등 10여 명의 외국인도 내한해 재판을 참관했다.


1심이 끝났을 때 서독 정부는 공정한 재판과 감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은 정규명의 사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서독에서 붙잡아 간 피의자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1968년 4월에 선고된 2심 판결에서 윤이상은 무기 징역에서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됐다. 다른 피고들은 대개 1심과 비슷한 형을 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참 대단한 판결을 하게 된다.


프레시안 : 대법원은 어떤 판결을 내렸나.


서중석 : 1968년 7월 30일 대법원 형사 3부는 정규명 등 중형을 받은 12명에 대해, 여기에는 윤이상도 포함되는데, “원심이 간첩죄와 잠입죄를 적용한 것은 법 적용의 잘못이며 증거 없이 사실을 인정, 중형을 선고하는 등 양형 부당의 잘못이 있다”고 판시해 서울고법에 환송했다.


이런 판결이 나오자 대법원 판결을 심하게 비난하는 벽보, 삐라 같은 게 서울 시내 여러 군데에 등장했다. 애국시민회라는 이름으로 동백림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판사들을 겨냥해 “김일성의 앞잡이 김치걸·주운화 판사 등을 처단하라”, “북괴의 복마전인 사법부를 갈아내자”, “합법이란 미명 아래 북괴 장단에 춤추는 빨갱이를 잡아내자” 등 격렬한 내용을 담은 벽보를 국회 의사당, 정동 법원 입구 등 여러 곳에 붙였다. 또 조성기 판사, 이 사람은 대법원 판사는 아니고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동백림 사건을 맡은 사람인데, 이 조성기 판사에게 그런 내용의 벽보, 이걸 격문이라고 하는데, 그리고 삐라가 등기 우편으로 송달됐다. 이런 괴벽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신민당이나 몇몇 일간지에 괴편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이것에 대해 10·5구락부의 김익준 의원이 한 발언도 문제가 됐다. 1967년 6.8 부정 선거 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동원 등 4명이 제명을 자청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김익준은 그 네 명 중 한 사람인데, 괴벽보에 대해 이자가 “반공정신에 입각한 정의의 포스터다”라고 발언해 말썽을 일으켰다. (이때 김익준은 “(동백림 사건) 관련 피고는 재판 여부 없이 총살해야 한다”, “대법원 판사는 김일성이가 임명했느냐 대한민국이 임명했느냐 할 적에 답변할 자료가 없다고 본다”는 무지막지한 주장도 했다. <편집자>)


동백림 사건을 심의한 대법원의 최윤모 판사는 건강과 경제 사정 등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최 판사의 사표는 법조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갔다. 임기가 5년 7개월이나 남았는데, 동백림 사건 판결 후 갑자기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편집자>) 놀라운 일은, 이런 괴벽보 사건은 전에도 있던 일이지만 언론 쪽에서도 대법원 판결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용기 있는, 놀라운, 훌륭한 판결이라고 했을 터인데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언론과 수사 당국은 대법원 판결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물론 검찰과 중앙정보부는 대법원 판결이 공산당에 맞서 싸우는 자신들의 임무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울러 괴벽보에 대해 야당이 관계 장관을 불러 배후 관계를 추궁하면서 범인 색출을 독촉했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피고들은 간첩 조항이 없이는 적절한 처벌이 불가능한데 대법원이 간첩 개념을 너무 좁게 해석하고 있다. 만일 대법원의 법 해석이 사법적으로 옳다면 남한의 안보를 보장하고 있는 법령들을 고쳐야 하기 때문에 안보 위협이 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서 대법원이 남한 현실에 맞지 않는 판결을 했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간첩단 사건”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그랬다. 1950년대에도 극우 신문들은 조봉암·진보당 사건이나 근로인민당 재건위 사건이나 이른바 간첩 사건 같은 것에 대해 극우적 성향을 보여줬는데, 1960년대에도 단지 정권 또는 중앙정보부 같은 데서만 강한 반공주의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언론도 일정하게 맞장구를 치는 면이 있었다. 그만큼 이 시기에 반공주의가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법원 판결이 보여줬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1968년 12월 5일 재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날 재판에서는 검찰이 공소장 변경을 한 공소 사실을 전부 유죄로 인정해 정규명과 정하룡은 사형, 조영수는 무기 징역, 임석훈과 어준은 징역 15년에 자격 정지 15년, 윤이상 등은 징역 10년에 자격 정지 10년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서독 정부와 지식인들은 계속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여러 가지 요구를 했다. 몇 년 전 외교부에서 1970년대 외교 문서를 공개한 게 있는데, 여기에는 동백림 사건에 대한 여러 문서도 포함돼 있었다.


공개 외교 문서에 담긴 동백림 사건

ⓒ오월의봄


프레시안 : 그 문서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본국과 서독 사이에 끼여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던 최덕신 서독 주재 대사가 1967년 7월 6일 최규하 외무부 장관한테 “주독 특명 전권 대사로서 이곳에서 더 복무하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못 된다. 즉시 귀국하도록 하명이 있기를 앙망한다”고 하면서 빨리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법원 판결 직후인 1968년 8월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정부가 행사에 한국 대사를 초청하자 좌익 학생들이 항의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때 일부 학생은 태극기에 나치 표지를 붙여 게양했다고 문서에 나온다. 재항소심 재판이 열린 1968년 12월 5일에는 독일 학생 40여 명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석방하라”며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에 난입했다. 40분간 대사관은 완전히 데모대의 폭력에 노출됐고, 독일 학생들이 기물을 파손하고 공관 간판에 붉은 페인트를 칠했다고 대사관이 외무부에 보고한 문서도 있다.


그리고 1969년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파울 프랑크 외무부 제1정치국장을 특사로 한국에 보냈다. 서독 대통령의 특사가 ‘형이 확정된 2명은 15일 이내에 석방하고 재판 계류 중인 윤이상 등 4명은 1971년 말까지 풀어준다’는 비밀 합의를 한국 정부와 한 것으로 이 공개 문서에는 적혀 있다.


지금 이야기한 것처럼 1969년 1월 서독 정부는 외무성 고위층을 특사로 파견해 여러 현안을 논의했다. 그래서 윤이상은 1969년 2월 24일 형이 확정된 후 형 집행 정지로 출감했다. 이응로 화백도 이어서 출감했다.


프레시안 :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후 윤이상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윤이상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장자>를 테마로 그전에 작곡하고 있었던 오페라 ‘나비의 꿈’ 마지막 부분을 작곡했다. 먼저 출감한 부인 이수자가 이걸 가지고 서독에 갔다. 윤이상의 형이 확정되기 전날인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 시립 오페라 극장에서 ‘나비의 꿈’ 첫 번째 공연을 했다. 윤이상을 대신해 부인이 참석, 관객들의 환호에 답했다. 서독의 많은 신문은 이 오페라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관객들의 요청으로 오페라의 막이 31번이나 다시 올라가야 했을 정도로 유례없는 대성공을 거뒀다. 1969년 윤이상은 서독의 권위 있는 상인 킬 문화대상 수상자가 됐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인물이 몇 사람 있지 않나. 무용가로는 일제 때 유명했던 최승희가 있고 음악가로는 윤이상이 있다. 윤이상이 감옥소에서 나온 이후인 1972년 8월 1일에는 뮌헨올림픽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오페라 ‘심청전’이, 이것도 국내에 보도가 참 많이 됐는데, 볼프강 자발리쉬의 지휘, 귄터 레너트의 연출로 초연됐다. 1974년에는 서베를린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됐고, 1977년에는 베를린예술대학 정교수로 재직하게 됐다. 광주항쟁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 1982년 8월, 유명한 ‘광주여 영원히’라는 곡이 북한에서 연주됐다.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됐다. 한 달 후인 1982년 9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이 ‘남한 정부도 폭이 넓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랬겠지만, 제7회 대한민국 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이 열렸다. 윤이상의 복권이라고 볼 수 있는 조치가 이뤄진 것이다.


1988년 5월에는 인권 관계 발언으로 유명한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윤이상에게 수여했다. 1990년 윤이상은 분단 45년 만에 남북 통일 음악회를 성사시켰다. 그 결과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평양 음악단은 서울 송년 음악회에 참가했다. 1992년에는 만 75세 생일 기념으로 <윤이상, 시대의 작곡가>라는 논문집이 발간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이상 탄생 75주년 축하 음악회가 열렸다. 그해 일본에서는 열흘에 걸쳐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개최됐다. 같은 해에 일본 영서방(影書房) 출판사에서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이 출간됐다. 그해 함부르크 자유 예술원의 공로상도 받았다. 1995년 유명한 괴테상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받았고, 그러고 나서 그해 세상을 떠났다.


프레시안 : 이응로는 어떠했나.


서중석 : 이응로 이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면서 미술 활동을 계속했다. 미술 전문가들이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를 꼽을 때 이응로가 여러 차례에 걸쳐 꼽혔다. 2015년 <아트 인 컬처>에서 창간 15년을 맞아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조사에서 1위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2위는 월북 화가 이쾌대였고 3위는 이응로와 김환기였다. <월간 미술>이 1996년에 실시한 조사에서도 역시 백남준, 김환기, 이응로 이 세 사람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응로는 1996년 <월간 미술> 조사에서 3위, 2001년 <아트 인 컬처> 조사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이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분들이 1967년 6.8 부정 선거로 정국이 한창 소란했던 때 간첩 사건으로 붙잡혀 와서 심하게 고문당하고 중형을 선고받은 건 민족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빼놓을 수 없는 큰 문제가 또 있다.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보복당한 민비연 관계자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바로 민비연 재판이다. 민비연 관련자들은 권력에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가를 세 차례에 걸쳐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보복을 당할 수 있느냐 싶을 정도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얼마나 고문했겠느냐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도대체 황성모 교수가 1950년대에 독일 유학을 한 것하고 민비연을 연결시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활동을 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1967년 12월 서울형사지법 3부는 민비연을 순수 학술 단체로 인정했다. 그에 따라 황성모의 간첩죄와 피고인 7명 전원의 반국가 단체 구성 및 가입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황성모, 김중태에게는 반공법 제4조 1항의 유명한 이적 단체 구성 예비 음모죄를 적용해 각각 징역 3년,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데모를 벌이고, 북괴를 찬양하고 이롭게 할 단체 구성에 대한 예비 음모를 했다는 혐의는 인정한 것이다. 1968년 4월 서울고법에서도 황성모의 간첩죄와 피고인 7명 전원의 반국가 단체 구성 및 가입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역시 이적 단체 구성 예비 음모죄로 황성모와 김중태한테는 징역 2년, 현승일과 김도현한테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1심 때보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늘어났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을 판결했던 대법원이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 네 명에 대해 “민비연을 불법 단체로 변질시키려 예비 음모를 했다는 소명이 공소장에 없다”고 하면서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걸 깨고 서울고법으로 환송했다. 이적 단체 구성 예비 음모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판결도 용기 있는 판결이었다. 그렇게 되자 공소장을 변경해 서울고법에서 다시 재판을 진행했다. 공소장을 변경한 상태에서 1968년 11월 26일 서울고법은 반국가 단체 조직 예비 음모죄로 황성모와 김중태에게 징역 2년, 현승일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상고는 기각됐고, 재판은 그렇게 종결됐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이 사건의 당사자라고 볼 수 있는 김형욱은 민비연 사건에 대해 미안하다는 뜻으로 쓰면서, “민비연이란 이름만 들어도 정나미가 떨어질 만큼 애를 먹었다”고 회고록에 밝혔다. 무지무지한 고문으로 만들어낸 억지 사건임을 이처럼 김형욱이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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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5-12-20> 프레시안

☞기사원문: 태극기에 나치 문양…박정희 집권기에 어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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