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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7화 오키나와전, 그 지옥에 끌려간 조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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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활동해온 사람들의 이야기

[프로젝트 소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

올 봄, 강제동원과 관련한 일본 전범기업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노력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등재를 막지는 못했지만, 유네스코는 등재 조건으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이 유네스코의 재정을 부담하는 비중, 일본 정부가 십 수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점, 아베 정부가 외교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은 점, 일본정부가 강제동원 가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기한 적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일본으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본정부가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를 온갖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며 부정하려 하지만,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모습으로만 비칠 뿐입니다. 오히려 이번 일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강제노동’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유네스코 21개 회원국에게 일본 산업시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독일의 회의장 인근에서 열린 강제노동 전시회를 살펴본 회원국 관계자들은 “한국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왜 문제제기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이 왜 문제제기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치밀한 준비에 비하면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너무 늦게 대응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부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피해자와 함께 한일시민들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피해 구제 활동을 해온 경험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공서, 절, 기업 등의 문서고를 뒤지며, 폐허가 된 현장과 이름 없는 한국인의 무덤을 찾아 위령시설을 세우고, 유해를 발굴하는 한편, 일본 사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속해온 것입니다.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호주머니 털어서 밝힌
강제노동 실태”

‘일본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일단 정리가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일본정부가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제대로 기록할 것인가? 아베정권은 또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오늘도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자들의 고민과 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피해자와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보전하고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해왔습니다. 또한 진실과 정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기억의 전승과 연대의 허브’ 역할을 할 ‘식민지역사박물관'(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나눠 갖는 책임’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등 각지의 징용. 징병 강제동원 현장에서 활동하며 밝혀 온 성과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 를 전하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쫓아 수십 년간 노력해 온 사람들 역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스토리펀딩]1화. 세계유산 ‘군함도’ 지옥섬의 조선인을 기억하라

[스토리펀딩]2화. 바다에 갇힌 조선인의 영혼을 기억하라

[스토리펀딩]3화. 낯선 이국 땅, 카이지마 탄광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

[스토리펀딩]4화 “야스쿠니 참배는 백이면 백, 해만 된다”

[스토리펀딩]5화 “죽은 유골까지 차별하는 일본 정부”


[스토리펀딩]6화 “오사카 육군 조병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스토리펀딩]7화

오키나와전, 그 지옥에 끌려간 조선인들

영양과 오키나와의 ‘한의 비’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일어나고 1년 후인 1987년 3월 일본에 작은 평화시민운동 단체인 ‘평화와 생활을 잇는 모임’이 탄생했습니다. 이후 이 단체는 일본의 ‘군사대국화’ 저지를 가장 큰 과제로 삼아, 반전반군사기지운동, 전후보상운동, 반원전운동,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국 헌법에 위반되는 ‘안보법제’ 반대, 오키나와(沖繩) 헤노코의 군사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단체를 30년 동안 이끌어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마메타 도시키(豆多敏紀)씨입니다. 마메타 씨는 오랜 기간 지자체의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한편으로는 ‘평화와 생활을 잇는 모임’ 대표로 평화시민운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마메타 씨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꼭 기억해주길 바라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현재 경상북도 영양군과 오키나와 요미탄촌에는 ‘한(恨)의 비’라는 같은 모양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영양군에는 1999년에 요미탄에는 2006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눈이 가려진 채 손을 뒤로 묶인 남성과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성이 표현되어 있는 이 기념비는 일제 강점기 오키나와에 끌려가 희생당한 ‘조선인’ 피해자들을 추도하고 앞선 세대의 잘못을 다음 세대에 전하여 평화로운 미래를 지키고 싶다는 뜻을 담아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

일본에는 이런 뜻이 담긴 추도비나 안내판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선 6화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이런 시설을 파괴하고,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극우세력의 행패가 날마다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폭력에 맞서 우리들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이 어떻게 연대하여 싸워왔는지를 돌이켜보고 그로부터 새로운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한의 비’를 건립하는 과정에 깊이 관여하고 건립 후에도 매년 영양군을 찾고 있는 마메타 씨가 ‘한의 비’를 만들게 된 과정과 비문에 다 담지 못한 소망을 전해왔습니다. 끝부분에 독자 여러분에게 전하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편집자)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9년 8월 경상북도 영양군에 ‘한의 비’가 건립되었습니다. 그다음 해인 2000년 2월 저는 오키나와 지역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에 ‘또 하나의 오키나와 전-‘한의 비’ 건립을 향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한의 비’ 건립사업은 ‘또 하나의 오키나와전’이라는 표현이 갖고 있는 의미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우선 오키나와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 ‘오키나와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오키나와전’의

실상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제는 구미열강을 따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를 확장해 나간 나라입니다. 원래 오키나와는 에도시대의 지방 정부 가운데 하나인 사쓰마(薩摩)와 청나라 사이에서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 온 독립국가로서 ‘류큐왕국’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메이지정부는 무력으로 류큐를 점령하고 복속하여 ‘오키나와현’으로 만들었습니다. 류큐에 대한 이런 ‘강제병합’을 ‘류큐처분’이라고 하는데, 이후 메이지정부가 오키나와를 통치한 방식이 조선, 대만 등에 대한 식민지배의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일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본격적으로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까지 전선을 확대했습니다. ‘구미의 식민지인 아시아 제국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핑계를 들며 주변의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해 갔습니다. ‘중일전쟁(15년전쟁)’에 뒤이어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실제로는 그 1시간 전에 이미 일본군이 말레이반도의 고타바루를 침공하며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키나와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패전의 기색이 농후해지던 1944년 10월 나하(那覇)대공습을 시작으로 1945년 3월 말 경부터 미군의 오키나와에 대한 총공격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섬을 둘러싸고 해상을 봉쇄한 미군 병력은 54만 명, 일본군의 숫자는 현지에서 동원한 2만 명을 포함해 11만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전투였습니다. 6월 23일 오키나와 수비군의 조직적 전투가 끝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철의 폭풍’이라고 불린 맹렬한 함포사격을 비롯하여 포탄의 폭풍이 섬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섬의 형태가 바뀔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파괴된 오키나와 나하시 (오타 마사히데, ‘사진기록 <이것이 오키나와전이다> 개정판’, 1990년, 일본어)


이 전투의 사망자는 오키나와 주민 약 9만 4000명, 일본군 9만 4136명, 미군 1만 2520명, 총 20만 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오키나와 주민의 사망자 수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일본군으로 현지에서 동원된 희생자를 포함하면 오키나와 주민의 사망자 수는 12만 명에 이릅니다. 주민 4명 가운데 1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주민이 전투에 휩쓸려 이렇듯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진 곳은 일본 영토에서 오키나와가 유일합니다.(일본 본토 주민 희생자의 대부분은 원폭과 공습의 희생자였습니다).


이 전쟁터에서 일본군이 주민을 스파이로 몰아 고문, 학살하거나, 식량을 약탈했다는 많은 증언도 있습니다. 대피한 동굴에서 일본군이 쫓아내어 전쟁터로 내몰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최후의 오키나와 주민 한 사람까지 싸워라’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당하지 말라’며 일본군은 미군에게 투항하지 못하도록 했고 궁지에 몰린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는 ‘집단자결’도 일어났습니다. 오키나와전은 ‘모든 지옥을 모아놓은 곳’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처참한 전쟁터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참한 체험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누치두 다카라’(‘생명이 곧 보물’이라는 뜻으로 생명과 인권이 어떠한 ‘국익’ ‘공익’보다 앞선다는 생각)라는 생각을 강하게 뿌리내리게 했습니다. ‘누치두 다카라’는 지금도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뜻을 무시하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헤노코의 군사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섬 전체의 싸움 속에서 숨 쉬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또 하나의 오키나와전’


그런데 일본군은 애초에 승산도 없는 이 전투에 주민들의 희생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면서 오키나와 수비군이 전멸할 각오로 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국체호지'(천황제를 지킨다)가 유일한 목적이었던 ‘종전교섭’과 ‘본토결전’을 위한 ‘시간벌기’였으며, 오키나와가 ‘버리는 돌'(희생양)로 취급당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오키나와전의 비극은 내부식민지로 여겨진 오키나와가 겪은 슬픈 ‘운명’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습니다. 이 오키나와의 전쟁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많은 청년들이 ‘소모품’으로 강제동원, 강제연행되어 ‘오키나와전’이라는 ‘지옥’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오키나와전’입니다.


지금까지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밝히고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함과 동시에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전하려는 노력들이 많은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한편 오키나와에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연행되었다고 하는 조선인 군부(軍夫)의 존재와 비극은 지금도 어둠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방비 상태로 공격에 노출되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항만하역, 무기·군수물자 운반, 엄폐호를 만드는 일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많은 조선인 군부들이 전사하거나 굶어 죽었고, 나아가 일본군에게 ‘스파이’로 몰리거나 규율을 위반했다는 명목으로 처형을 당하는 사람까지 나왔습니다


▲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조선인 군부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 종합안내, 2006년, 일본어)



그러나 오키나와전 동안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공식 기록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키나와전 전몰자의 이름이 새겨진 현립평화기념공원의 ‘평화의 초석’에 식민지 출신자로 대한민국 365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 대만 3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2015년 6월 현재). 그러나 이 또한 뜻있는 많은 시민들과 연구자들이 노력을 기울여 축적한 조사,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오키나와전에 ‘조선인’이 얼마나 동원되었고 얼마나 죽었는지, 누가 살아서 돌아왔는지 이러한 사실을 밝히려 하지도 않고 조사도 착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와의 만남


저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누치두 다카라’의 사상과 반전·반기지 투쟁을 배우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오키나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오키나와전'(조선인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첫 번째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7년 7월 말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일하는 청년의 전국교류회(ZENKO)’에서였습니다. 50여 년 전 오키나와에 강제동원된 고 강인창 씨가 자신이 소속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의 이희자 씨와 함께 참가했습니다.


강인창 씨는 오키나와에서 겪은 가혹한 체험을 증언하면서 ‘지금도 타향에서 방황하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고국으로 모셔 정중히 모시고 싶다. 이를 위해 일본의 뜻있는 시민들의 지원을 부탁한다’고 절절히 호소했습니다. 강인창 씨의 체험은 오키나와의 게라마(慶良間)제도, 아카지마(阿嘉島)에 끌려가서 겪은 일이었습니다. 미군이 상륙한 뒤 식량도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끌려다니며 도주하며 방황하다가 ‘벼이삭과 고구마를 훔쳐먹었다’ ‘도망치려 했다’는 등의 이유로 군부였던 동료 12명이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자리에 입회했던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 오키나와 아카지마로 끌려간 고 강인창 씨 ⓒ민족문제연구소



강인창 씨의 절절한 호소를 듣고 본토에서 ‘크지도 않은’ 평화시민운동을 하고 있던 저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불안과 고민 속에서 망설이면서도 강인창 씨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희생된 동포를

추도하고 싶다


그해 12월 다시 오키나와를 찾은 강인창 씨 등과 함께 자마미(座間味), 아카지마를 비롯하여 많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유골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조사에는 강인창 씨와 같은 경상북도 출신으로 미야코지마(宮古島)에 끌려가 역시 많은 동포 조선인 군부들이 바다 속 물귀신으로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본 고 씨도 참가했습니다. 서정복 씨도 아직까지 머나먼 오키나와 땅에 잠들어 있는 ‘죽은 동포·동료들의 넋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추도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습니다.



▲ 오키나와의 미야코지마에 끌려간 고 서정복 씨 ⓒ민족문제연구소



아카지마에서 실시된 조사에서 처형 장소를 확인하는 등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만 유골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주민들이 발굴하여 오키나와 어딘가의 위령탑에 함께 모신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었습니다.


이 조사를 통해 ‘유골을 고국으로 모시고 싶다’는 바람에 하나의 매듭을 짓고자 한국과 오키나와에 위령과 기억의 의미를 지닌 기념비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기념비 제작은 오키나와의 조각가 긴조 미노루씨가 맡아주었습니다.


이후 급속히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오키나와-일본 본토를 오가며 강인창 씨, 서정복 씨, 유족회 분들과 서로 상의하여 기념비의 명칭은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 피징발자 한의 비’로 결정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을 앞머리에 붙인 이유는 조선에서 오키나와전에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한’이 태평양전쟁에 강제연행당한 모든 아시아 사람들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피징용자’가 아니라 ‘피징발자’로 쓴 이유는 실제 ‘쓰고 버리는 물품’으로밖에 취급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항의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각의 이미지는 긴조 씨가 제안한 ‘존엄을 유지하며 처형에 맞서는 조선 청년’으로 정했습니다.


“한국과 오키나와에

추도비를 세우다


1998년 12월 오키나와 나하시(那覇市)에서 피해자들과 관계자들이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 피징발자 한의 비 건립을 추진하는 모임’을 발족시켰습니다. 모금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것은 1999년 3월 말이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약 5개월 동안 전국 33개 도도부현에서 약 700 분들로부터 성금이 답지했습니다. 모금 총액도 약 700만 엔에 이르렀습니다.


강인창 씨가 오키나와의 ‘일하는 청년의 전국교류회’에 참가한 날로부터 만 2년. 드디어 경상북도 영양 땅에 ‘한의 비’가 세워진 것입니다. 1999년 8월 12일 영양에서 ‘한의 비’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습니다.


▲ 1998년 영양군수와 ‘한의 비’ 장소 문제를 논의하는 강인창 씨와 서정복 씨, 마메타 씨 등 ⓒ민족문제연구소


▲ 1999년 8월 12일 영양에 건립된 ‘한의 비’ ⓒ민족문제연구소

▲1999년 영양 ‘한의 비’ 제막식 ⓒ민족문제연구소


그 뒤의 상세한 경과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영양의 ‘한의 비’ 건립으로부터 7년 뒤, 당초부터의 목표였으며 또 하나의 쌍을 이루는 오키나와 ‘한의 비’ 건립이 요미탄촌의 땅에 실현되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시민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결성된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 피징발 조선반도 출신자 한의 비의 모임’이 부지 확보의 어려움 등을 극복하고 실현시킨 것입니다.


이 평화시민운동단체는 영양 ‘한의 비’ 건립사업을 계승하여 ‘한의 비’가 오키나와에 뿌리내리는 것을 목표로 연속강좌 ‘틴사구(봉선화의 오키나와 말)와 봉선화의 모임’ 개최, 소식지 발간 등 꾸준하게 활동을 해왔습니다.


다이라 오사무 목사와 아사토 에이코 작가, 활동가인 아리메 마사오 씨와 니시오카 노부유키 씨가 중심이 되었으며, 저는 ‘전국 사무국장’으로서 본토의 활동을 집약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 계속 참여했습니다. 2006년 5월 13일에 열린 제막식은 한국에서 강인창 씨와 건강이 좋지 않은 서정복 씨를 대신하여 두 아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관계자들을 비롯하여 오키나와, 전국 각지에서 모두 200여 명이 참가하여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 2002년 오키나와 ‘한의 비’ 건립을 위해 영양군청을 방문한 강인창 씨와 마메타 씨 등 ⓒ민족문제연구소


▲ 오키나와 ‘한의 비’ ⓒ민족문제연구소


▲ 오키나와 ‘한의 비’ 비문 ⓒ민족문제연구소

▲ 키나와 ‘한의 비’ 제막식 ⓒ민족문제연구소

▲ 조각가 긴조 미노루 씨 ⓒ민족문제연구소

▲ 목사 다이라 오사무 씨 ⓒ민족문제연구소


▲ 작가 아사토 에이코 씨 ⓒ민족문제연구소

▲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는 이희자 씨와(왼쪽) 강인창 씨, 긴조 씨. ⓒ민족문제연구소


현재 오키나와 모임은 ‘NPO법인 오키나와 한의 비 모임’으로 재출발하여 매년 6월에 총회와 위령제를 개최하는 한편 소식지 발행,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조사,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학습회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계속적인 영양 방문, 영양군청과 요미탄촌에 지원을 요청하고 협력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등 힘써야 할 과제도 많습니다.


“미래를 만드는

평화의 가교로


강인창 씨의 절절한 호소를 들은 지 19년이 지났습니다. 실현된 ‘한의 비’를 보시고 “우리들이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고, 세대와 국경을 넘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습니다”(강인창 씨), “지금까지 일본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습니다만, 지금은 얼어붙은 마음이 눈이 녹아내리는 듯 감동의 눈물이 흐릅니다”(서정복 씨)라며 저희들의 ‘노력의 시작’을 자상하게 격려해 주시던 두 분은 이제는 저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슬프고 허전합니다만 ‘다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지 않겠다’는 결의를 마음에 새기고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향해 나아갈 길을 모색해 가고자 합니다. ‘미래를 만드는 평화의 가교로’라는 말을 표어로 삼고 있는 저희들의 ‘한의 비’ 건립사업은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영양 ‘한의 비’ 앞에 선 마메타 씨 ⓒ민족문제연구소


▲ 영양 ‘한의 비’를 바라보는 마메타 씨와 꽃을 바치는 강인창 씨 ⓒ민족문제연구소


“한국의 여러분들께

한국 국내에서도 경북 영양은 멀 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한 번 영양의 ‘한의 비’를 찾아주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오키나와의 ‘한의 비’도 찾아주십시오. ‘한의 비’를 통해 우리들이 만나는 계기가 된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강인창 씨, 서정복 씨, 이희자 씨 등을 만나 여기까지 함께 올 수 있었던 것처럼, 국경과 세대를 넘어 시민들의 ‘얼굴’과 ‘얼굴’의 만남-시민교류야말로 ‘미래를 만드는 평화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한의 비’ 건립사업에 함께 하며 얻은 가장 큰 확신입니다.


글 |
마메타 도시키 豆多敏紀 (‘태평양전쟁·오키나와전 피징발자 한의 비 건립을 추진하는 모임’ 사무국장, ‘평화와 생활을 잇는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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