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박정희는 장기 집권 원치 않았다? 뻔한 거짓말

92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39> 유신 쿠데타, 서른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유신 쿠데타, 첫 번째 마당] 여당도 당황케 한 청와대의 ‘공화국 죽이기’ 작전
[유신 쿠데타, 두 번째 마당] 궁정동의 은밀한 ‘사업’과 박정희, 그 특별한 관계
[유신 쿠데타, 세 번째 마당] 박정희와 김일성, 1인 독재 위해 뒷거래?
[유신 쿠데타, 네 번째 마당] ‘멸공’ 박정희, 김일성과 대화하려 쿠데타?
[유신 쿠데타, 다섯 번째 마당] 온 국민이 춤춘 그때, 청와대는 딴마음 품었다
[유신 쿠데타, 여섯 번째 마당] 북한보다 야당이 더 못됐다? 박정희의 위험한 선동
[유신 쿠데타, 일곱 번째 마당] “쿠바가 백악관 습격했다면”…분노한 박정희
[유신 쿠데타, 여덟 번째 마당] <타임>은 왜 박정희 주장을 ‘상상’ 취급했나

[유신 쿠데타, 아홉 번째 마당] 美·日이 박정희 쿠데타 초안에 퇴짜 놓은 이유

[유신 쿠데타, 열 번째 마당] 박정희, 경제 살리려 쿠데타? 치명적인 오해
[유신 쿠데타, 열 한째 마당] 전두환 ‘무시’, 박정희 ‘인정’? 자가당착 개발 독재
[유신 쿠데타, 열 두째 마당] 박정희 ‘핵 개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유신 쿠데타, 열세 번째 마당] 박정희는 ‘경제의 신’? 경제 실책으로 무너졌다
[유신 쿠데타, 열네 번째 마당] 박정희 시대, 정치 검찰의 ‘소신 판사 죽이기’ 대작전
[유신 쿠데타, 열다섯 번째 마당]왜 하필 거기에…”그래야 청와대서 잘 보이지”
[유신 쿠데타, 열여섯 번째 마당] 부정부패 박정희 정권이 자초한 천주교 횃불 시위
[유신 쿠데타, 열일곱 번째 마당] 아버지 천당행 빌던 프랑코 딸…박정희 딸은?
[유신 쿠데타, 열여덟 번째 마당] 박정희 실세는 왜 죽도록 매타작을 당했나?
[유신 쿠데타, 열아홉 번째 마당] “청와대 미스터 정” 추문 추궁한 그, 결국 끌려갔다
[유신 쿠데타, 스무 번째 마당] 전두환은 왜 ‘하나회 대부’를 청와대에 고발했나
[유신 쿠데타, 스물한 번째 마당] 박정희 눈 밖에 난 언론, 폭발물 테러까지 당했다
[유신 쿠데타, 스물두 번째 마당]박정희의 군인들은 학생들을 ‘전쟁 포로’ 취급했다
[유신 쿠데타, 스물세 번째 마당]박정희 쿠데타 안 막은 케네디, 눈감은 닉슨…왜?
[유신 쿠데타, 스물다섯 번째 마당] 검은돈 펑펑 쓴 박정희 분노 “표차가 이것밖에…”
[유신 쿠데타, 스물여섯 번째 마당] 박정희와 드골은 닮은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유신 쿠데타, 스물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측, 대선 지면 야당 후보 쏴 죽이려 했다
[유신 쿠데타, 스물여덟 번째 마당] 박정희 정권은 왜 국민을 “돈의 노예”로 타락시켰나
[유신 쿠데타, 스물아홉 번째 마당] 박정희식 부정 선거, 이승만 때 못지않았다

[유신 쿠데타, 서른 번째 마당] 태극기에 나치 문양…박정희 집권기에 어쩌다가?

[유신 쿠데타, 서른한 번째 마당] 박정희=임금, 김종필=신하? 그렇게 당하고도 왜?


프레시안 :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위해 추진한 3선 개헌은 거센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3선 개헌 반대 시위, 어떻게 전개됐나.

서중석 : 개헌 반대 시위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잠시 살펴보면, 이 당시에는 야당도 그랬고 재야 쪽에서도 활성화된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개헌 반대 시위가 그쪽도 미지근한 셈이었고, 그렇게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이라도 개헌 문제에 대해 할 이야기는 하고 쓸 건 써야 하는 건데, 1967년에 이미 언론들이 제대로 말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1969년엔 오죽했겠나. 3선 개헌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도 않았지만, 특히 3선 개헌 반대 운동 같은 경우 보도한다고 하더라도 선언문이나 결의 내용은 잘 보도하지 않았다. 그 당시 언론이 어떤 상황이었는가에 대해 언론인 송건호가 쓴 글이 있다. 그 글에 따르면, 1969년 3선 개헌 정국에서 <동아일보>만 후일의 기록을 위해 단 한 번, 개헌을 반대한다는 약한 논조의 사설을 겨우 내보냈을 뿐이라고 한다. 그 밖의 신문은 끝내 그런 태도를 밝힐 수 없었고 언론은 그때 죽어 있었다고 이분은 썼다.


사실 <동아일보>에서 그런 반대 사설을 언제 쓴 것인지도 알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개헌을 반대한다는 약한 논조의 사설을 언제 내보낸 것인지는 송건호 글에 안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의 7월 25일 특별 담화에 대해 조금 있다가 이야기할 텐데, 그 특별 담화가 나왔을 때 <동아일보>가 긴 사설을 내보내긴 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이게 찬성인지 반대인지 잘 알 수가 없게끔 돼 있다. <동아일보>조차, 그리고 ‘박 대통령의 개헌 문제 담화’라는 제목을 붙여 길게 쓴 사설인데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3선 개헌에 찬성한다는 말은 이 사설에 없으니 그러면 반대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도 어렵게 돼 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그러면 남은 건 학생들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이러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내는 건 학생밖에 없을 때가 많지 않았나.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도 사실 앞장서서 반대한 건 학생이었다. 그때 민주당은 활동을 조금밖에 못했다.


초산 테러 사건을 계기로 규모가 커진 3선 개헌 반대 운동

ⓒ오월의봄

프레시안 : 학생과 야권 등에서는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어떻게 펼쳤나.

서중석 : 야하고 야당이 여러 차례 투쟁 기구를 발족하려 노력하다가 1969년 4월 초에 가서야 신민당과 재야인사들이 ‘개헌 저지 국민 투쟁 준비위원회’라는 걸 만든다. 이게 바로 범국민 투쟁 위원회라고 불리는 건데, 이름을 나중에 그렇게 바꾼다. 6월 5일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 준비위원회’가 결성되는데, 김재준 목사가 위원장을 맡았다. 기독교장로회 원로인 이분이 위원장을 맡아 애를 참 많이 썼지만, 위원회 차원에서 무슨 활동이라고 할 만한 게 초기에는 없었다.


그런 가운데 6월 12일 서울대 법대생들이 먼저 ‘헌정 수호 법대 학생 총회’를 열고 개헌을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16일 다시 법대에서 학생 총회를 연 후 철야 농성에 들어가면서 3선 개헌 반대 투쟁이 구체화된다. 17일에는 서울대 문리대에서도 3선 개헌 반대 집회가 시작됐다. 19일에는 고려대와 서울대 공대에서 개헌 반대 성토대회가 열렸다.


그렇지만 6월 20일까지는 반대 운동이 많이 있었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그건 정치권이 애매한 태도를 계속 취했기 때문인데, 박정희가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개헌하겠다고 딱 부러지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분명히 개헌 쪽으로 가고는 있는 상황에서,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치고 나가야 할지가 애매하다고 봤던 것도 작용해 그렇게 됐다. 그런데 이때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6월 20일 밤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의 차에 괴한들이 초산을 퍼부은 유명한 초산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나기 1주일 전인 6월 13일 김영삼은 국회에서 “3선 개헌은 제2의 쿠데타”이며 개헌 음모의 총본부가 우리나라의 암적 존재인 중앙정보부라고 하면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파면을 요구했다. 중앙정보부장을 직접 거론하며 비판하는 건 드문 일이었는데, 김영삼다운 발언이었다. 그러고 나서 초산 테러 사건이 벌어지니까, 사건 다음 날 김영삼은 “이 독재 국가를 끌고 나가는 원부(怨府)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인 김형욱은 (3.15 부정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와 같은 민족 반역자다”라고 하면서 중앙정보부를 또 공격했다.


그러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3선 개헌 반대 쪽으로 강하게 잡혀나갔다. 6월 23일 서울대 문리대에서 3선 개헌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경희대, 경북대에서도 3선 개헌 반대 성토대회가 열렸다. 다음 날에는 경기대에서 열렸다. 6월 27일에는 고려대생들이 가두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생들은 그다음 날에도 시위를 했다. 고려대생이 시위를 벌인 27일에는 대구 계명대에서도 성토대회가 열렸고 그다음 날에는 대구사회사업대에서도 열렸다. 이 시기에 대구에서도 3선 개헌 반대 데모가 많았다. 1967년 대선 당시 경상도 쪽에서 박정희 후보 표가 많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이후 시기에 비하면 이때는 지역감정이 그렇게까지 강하지는 않았고 또한 민주화 운동 세력은 지역감정 같은 것과 상관없이 올바른 걸 밀고 나가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대구 쪽에서 이때 시위를 많이 했다.


6월 29일 무렵부터 대학생들은 매일같이 시위를 했다. 경북대생들은 이날부터 7월 1일까지 계속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를 했다. 6월 30일 연세대에서도 시위를 했고, 임시 휴교 상태이던 고려대 학생들도 또 시위를 벌였다. 경희대, 광주사대, 홍익대에서도 시위를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에서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에 당시 시위 상황이 잘 정리돼 있는데, 6월 30일 이날 페퍼포그라는 시위 진압용 가스 분사기가 고려대생 시위 현장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최루가스를 뿜어내는 것으로 유명한 페퍼포그라는 것이 이때 등장한 것이다. 7월 1일에는 연세대, 서울대 공대, 고려대, 경북대, 공주사대, 홍익대, 외국어대 학생들이 시위를 했다. 그다음 날에는 시위 규모가 더 커졌는데, 1일에 시위를 한 대학들 중 일부뿐만 아니라 중앙대, 동국대, 서울대 문리대, 서울대 법대 같은 데서도 시위를 했다.


이날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3선 개헌 반대 때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꽤 많이 했다. 고등학생 시위가 1970년대 이후에는 아주 드문 현상 아닌가. 평준화 이후 고교생 시위가 없어졌다는 말이 돌 정도로 고교생 시위가 사라진다. 그러나 이때는 상당히 있었다. 중앙고 학생들이 7월 1일에 시위를 했는데, 다음 날 학교는 바로 휴교에 들어간다.


7월 2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정보과 경찰을 시위 현장에서 억류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학생과 경찰이 당시로서는 극렬 대치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물론 1987년 6월항쟁 때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1969년 당시에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긴장과 두려움도 있었는데, 3일 새벽으로 접어들면서 대치 상태는 풀렸다.


시위가 이어지자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 휴교에 들어갔다. 7월 2일 서울대, 4일에는 고려대 등 다른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됐다. 7월 3일 전북대, 성균관대, 건국대, 외국어대, 동국대, 숭실대, 중앙대, 우석대 이런 식으로 시위가 계속 벌어졌다. 경찰 집계에 의하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12개 대학에서 3만32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학생 541명, 시민 35명이 연행됐다. 7월 4일에도 고려대, 경북대, 건국대, 한양대, 서울교대, 연세대 의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5일에도 몇몇 대학에서 시위가 있었고 7일에는 전국 각지의 여러 대학에서 성토대회나 시위를 했다. 그렇지만 이때쯤 되면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게 되고 고등학교는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7월 8일 부산대, 부산수산대, 대구 영남대, 계명대에서 성토대회가 열렸다. 7월 10일에는 대구의 대구고, 대륜고, 경북고 학생들이 성토대회와 개헌 반대 시위를 했다. 그다음 날에는 안동고, 대구 계성고에서 시위를 했고 7월 12일 마지막으로 큰 규모의 성토대회가 김천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경상도 쪽에서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중학생까지 가담해 시위를 크게 했다.


그렇지만 7월 12일 이후에는 시위를 더 이상 하기가 어렵게 된다. 전국의 주요 대학교, 고등학교가 문을 닫고 조기 방학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된 건데, 물론 그것에 맞서 시위를 벌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시위를 더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접어든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방학 동안 강하게 추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선 학생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방학 동안에 중요한 뭔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3선 개헌도 그 기간 동안 강하게 추진됐다.


박정희가 3선 개헌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까닭


프레시안 : 시위가 잦아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어떤 식으로 밀어붙였나.


서중석 : 이 시기 국회 상황을 잠시 살펴보면, 7월 9일 국회의장 선거가 또 치러진다. 그런데 1차 투표에서 이효상이 재석 163명 중에서 80표밖에 못 얻으면서 국회의장이 되지 못했다. 2차 투표에서 이효상은 재석 165명 중에서 92표를 얻어 재적 과반수인 88표를 간신히 넘기며 국회의장이 다시 되긴 했다. 그렇지만 1·2차 투표에 참여한 야당 의원 수를 감안하면, 공화당과 친여 성향인 정우회를 더한 여당권에서 1차 투표 때는 35명, 2차 투표 때는 24명의 반란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추진된 3선 개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박 대통령의 3선 문제였다. 핵 중의 핵은 박 대통령이었다. 그러면 박 대통령이 개헌 문제를 분명하게 이끌고 나간다든가 어떤 태도를 뚜렷하게 취해야 하는 것인데, 이때까지는 그게 없었다.


그러다가 7월 25일, 유일하게 이 개헌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특별 담화라는 걸 발표한다. 이 특별 담화는 여러 가지 점에서 논란이 됐다. 예컨대 이렇게 이야기했다. “임기 중에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개헌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1월에 이야기하고 그랬지만, 이 특별 담화에서도 “내 개인이 개헌을 원하지 않고 있다”고 또 이야기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개헌을 하겠다, 안 하겠다 할 권한은 없다”고 했다. 개헌이 자기하고는 마치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건데, 이걸 납득할 수 있는 건가. 이건 국민을 우롱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다음 날 <동아일보> 사설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개헌 문제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바로 박 대통령이고 따라서 당사자인 박 대통령 자신의 태도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공화당 총재이기도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공화당 총재로서 ‘3선 개헌에 대해 공화당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데, 자신은 마치 오불관언(吾不關焉), 즉 3선 개헌 문제와 거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일부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개헌을 원치 않나 보네’, 이런 생각을 갖게 했을지는 몰라도 많은 국민들한테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가.


서중석 : 대통령이 왜 이런 애매한 태도를 계속 취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거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난 본다. 뭐냐 하면, 3선 개헌을 하려면 그걸 해야만 하는 확고한 이유를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이유 때문에 3선 개헌을 안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뚜렷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있었나?


예컨대 3선 개헌을 추진할 때 4인 체제에서 ‘김종필은 후계자감이 못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든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 또는 ‘안보를 위해 3선 개헌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그렇게까지 강한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예컨대 ‘김종필은 내 후계자감이 못 된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없었고 거기다가 ‘나 아니면 경제, 안보가 안 된다’, 이런 주장이 먹혀들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 없으면 경제가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건 1971년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박 대통령이 경제에 아주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이 시점에 많았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위해 3선 개헌을 해야 한다’, 이걸로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그게 아니라 안보를 이유로 제시할 경우, ‘그럼 안보 때문에 다른 사람은 대통령을 하지 말라는 뜻이냐’라고 야당이나 여당 내 반대 세력이 비판하고 나서면 그것에 답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로서는 왜 3선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안 됐는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가 계속 집권해야겠다’, 이건데 그렇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국민을 상대로 또는 정치인을 상대로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3선 개헌을 꼭 해야 한다’고 마땅하게 이야기할 게 없었고, 그렇다고 본심을 그대로 밝힐 수도 없어서 그런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의 7.25 특별 담화 내용을 보도한 <경향신문> 1969년 7월 25일 자 1면. ⓒ<경향신문>

3선 개헌과 자신에 대한 신임을 연계해 국민 압박한 박정희

프레시안 : 7.25 특별 담화에는 그 밖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서중석 : 박 대통령은 이 특별 담화에서 야당에 대해 강한 비판, 비방, 비난을 퍼부었다. “수차에 걸친 주요 도시에서의 (야당의) 유세는 그 도를 넘어 반정부 선동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전국적 유세를 펴 있는 말, 없는 말로 마치 적국 정부라도 규탄하듯 온갖 욕설을 나와 이 정부에 퍼붓고 국민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까지 들었다. 박 대통령은 “야당의 유세는 한갓 개헌 반대의 한계를 넘어서 반정부 선동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그 도는 날이 갈수록 더 극심해질 것이 예상됩니다”라고 하고는 “박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보다 더 지독한 독재자다, 이 정부는 민주주의를 완전히 짓밟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 정치를 하고 있다, 박 정권의 경제 시책은 완전히 실패했고 며칠 안 가서 파탄이 된다, 부정부패가 극도에 달해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김일성에게 먹히고 만다, 민심은 정부와 완전히 이탈되고 있는데 대통령 혼자 독주를 하고 있다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야당이 욕설을 퍼붓고 있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야당이 이야기한 것에 대한 박정희 자신의 평가라고 볼 수 있고, 어떤 것은 야당 중에서도 일부가 이야기한 것을 야당 전체의 얘기인 것처럼 주장한 면도 있다. 또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쪽에서 보면,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 특별 담화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5.16쿠데타 직후 발표문, 논설, 저서, 담화문, 연설문 같은 걸 쭉 보면 야당에 대해, 그중에서도 특히 장면 정권에 대해 아주 강한 공격과 비난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심하지 않느냐, 또 상당 부분은 근거가 약하거나 없는 것 아니냐, 야당을 공격함으로써 쿠데타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너무 심하게 노출한 것 아니냐는 느낌을 참 많이 받았다. 또 1960년대나 1970년대나 박정희 쪽에서 야당을 비판한 내용을 보면, 야당의 존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그런 비판을 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경우가 참 많다. 야당의 임무라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 자체를 ‘야당이 정권이나 잡으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문제 삼는 경향을 느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도 야당이 정권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주 심하게 비난했는데, 그것과 꼭 닮은꼴이다. 정당 정치라는 걸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게 아닌가 싶은데, 박정희의 특별 담화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 부분이 야당 비난이라는 점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선 개헌에 대한 자기 의견을 뚜렷하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결국 야당을 비난하는 것으로 3선 개헌 명분을 세우려 한 것 아니냐는 느낌을 준다.


그러고 나서 박 대통령은 공화당에 대해 요구했다. 공화당에서 3선 개헌안을 발의하라는 이야기였다. 이 부분도 조금은 논란이 된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공화당이 아무리 박 대통령 명령일하에 움직이는 당이라고 하더라도 과정이라는 게 있는 것 아닌가. 3선 개헌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공화당 내에서 3선 개헌에 관한 논의를 먼저 해야 할 것 아닌가. 그걸 거친 다음에 그 의견을 모아 ‘공화당 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3선 개헌에 찬성하니 그걸 당론으로 결정하겠다’, 이런 식으로 해서 발의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이때까지 형태상으로만 보면 공화당에서 3선 개헌을 논의하기 위해 의원 총회를 열었다거나 하는 게 없다. 그런데 7.25 특별 담화에서 대통령이 ‘공화당에서 3선 개헌안을 발의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여러 항명 파동이 잘 보여주듯이 박 대통령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해당자들을 공화당에서 쫓아내거나 의원직에서 제명하는 식으로 강하게 처벌하지 않았나. 그런 대통령이 ‘내겐 개헌을 하겠다, 하지 않겠다고 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도 ‘공화당에서 3선 개헌안을 발의하라’, 이렇게 지시한 것이다. 개헌 문제와 관련해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도 공화당에 그런 주문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 이 7.25 특별 담화가 주목받은 건 앞에서 말한 이 세 가지 때문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중대한 하나의 선언을 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박 대통령은 야당이 이렇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그러면 국민에게 신임을 물어 진퇴를 결정해야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여야 정치인들에게 제의하는 바입니다. 일, 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 문제를 통해서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에 가서 “개헌안이 국민 투표에서 부결될 때에는 나와 이 정부는 야당이 주장하듯이 국민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나와 이 정부는 즉각 물러선다”, 이렇게 천명했다.


이건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국민이나 야당에 대한 협박 아니냐고 볼 수도 있다. 당시 야당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강하게 반발했다. 개헌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묻는 국민 투표를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거기서 신임까지 묻느냐는 것이었다. ‘그건 헌법에 없는 사항 아니냐. 만약 국민 투표에서 부결돼 정부가 물러난다면,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무정부 상태로 가자는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게 없지 않나. 이건 3선 개헌안을 꼭 통과시켜달라고 국민 또는 야당을 압박하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해서 특별 담화의 그 부분이 초헌법적 발상이라고 야당과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김정열 “자유당 시절 개헌 이유와 똑같다” – 박정희 “그만둬, 그만둬”

프레시안 : 특별 담화 후 상황은 어떠했나.

서중석 : 7월 25일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당 총재 상의역으로 있던 정구영, 최희송, 김정열, 윤치영 같은 사람을 불러들였다. 간부들을 불러 개헌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 이때 와서야 처음으로 이뤄진 것이다. 이에 앞서, 이 담화가 나온 날 정구영 집에 신윤창, 박종태, 양순직, 예춘호 같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서로 입을 쳐다보고 있었다. ‘3선 개헌을 해서는 안 됩니다, 총재 각하’라는 주장을 담은 건의문을 7월 1일 자로 작성해 40명이 서명한 상황이었는데 7월 25일 이런 담화가 나오자 정구영과 이 사람들은 ‘한 10명은 꼭 확보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총재인 박 대통령이 정구영 등을 부른 것이다.


정구영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대통령 특별 담화 발표에 대한 얘기를 여러 가지로 하면서 ‘담화문에 정말 놀랐다. 우리는 건의문을 전달하려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자 ‘담화가 법적으로 잘못된 게 있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정구영은 “어디에 근거를 두어 총재께서 개헌을 발의하라고 당원들에게 종용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면서 “당론으로 결정된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셔야지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당론으로 결정된 바 없는 것을 발의하라고 한 것은 비민주적입니다”라고 총재를 직접 비판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얼굴을 붉히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김정열이 나섰다. 김정열은 이승만 정권 말기에 국방부 장관을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야하라고 종용했다. 국방부 장관이었으니 미군과 잘 알고 있었고 군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나. 허정하고 김정열, 이 두 사람이 이승만에게 하야하라고 한 게 당시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김정열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개헌이 부당하다는 말을 몇 차례 드린 적이 있었고”라고 하면서 자유당 때 국회 속기록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때는 김정열도 대단하더라. 그런데 나중에 신군부 정권 가면 또 좀 그렇기는 하다. (김정열은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에 국정자문위원 등을 맡으며 신군부에 힘을 실어줬고, 전두환 정권 말기에는 국무총리를 맡는다. <편집자>) “여기 국회 속기록을 가져왔습니다. 자유당 시대에 3선 개헌을 할 적에, 그게 사사오입 개헌이죠, 그 당시 제안 이유를 설명한 기록이 여기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장기 집권해야 옳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북괴의 남침 위협이 있다’, ‘조국의 경제 발전을 이룩해야겠다’, 즉 조국의 근대화, 셋째로는 ‘적당한 후임자가 없다’, 이 세 가지를 들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유당 시절의 개헌 이유를 재판(再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때 속기록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러니까 대통령이 자유당 시대의 것을 왜 여기서 이야기하느냐며 화를 냈다. 김정열이 “글쎄요. 그래도 좀 들어보세요”라고 하자, 대통령은 “그만둬, 그만둬”라고 했다. 김정열은 “이거하고 똑같습니다. 들어보세요”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언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공화당 상의역 가운데 3선 개헌에 찬성한 것은 윤치영 한 명이었다. 정구영은 청와대에서 나오면서 ‘개헌 반대 의원을 10명 정도는 확고히 결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 3선 개헌과 관련해 제일 유명한 회의가 드디어 열리게 된다.


이후락·김형욱 퇴진 조건부로 3선 개헌안 발의 결의한 공화당

▲ 이만섭(1986년 모습). ⓒ연합뉴스

프레시안 : 어떤 회의인가.

서중석 : 7월 29일에 열린 공화당 의원 총회였다. 여기서 3선 개헌에 대해 의견을 모으려고 한 것이다. 반대가 많이 나왔지만 윤치영, 백남억, 김성곤, 백두진 같은 사람들은 찬성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만섭 의원이 발언을 신청했는데 찬반 토론이 아닌 진행 발언권을 신청했다. 이 이만섭 의원 발언이 3선 개헌과 관련해 많이 이야기되는 유명한 발언인데, 논리가 아주 특이하다고 할까, 이상했고 그러면서 공화당 분위기를 싹 다른 방향으로 바꿔버렸다.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설사 개헌을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말했다. 이때까지 이만섭은 개헌을 반대했다. 그런데 ‘개헌을 한다고 하면’, 이런 식으로 얘기를 꺼내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러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선행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나왔다. 다시 말해 ‘개헌하자. 다만 조건을 내세우자’, 이렇게 나온 것이다.


“첫째,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퇴진케 해야 합니다. 이들이 있는 한 공화당이 무슨 짓을 해도 납득하지 않아요. 둘째, 중앙정보부는 지금과 같이 정치에 간여할 것이 아니라 대공 사찰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정치 사찰은 즉시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차제에 말단 단속에 그치고 있는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는 조치를 단행해야 합니다.”


이만섭이 이렇게 발언하자 이상한 흥분 같은 걸로 장내 분위기가 들떴다. 김종필계는 이후락, 김형욱을 아주 미워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계속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서운 실력자들 아닌가. 야당에서도 김영삼 같은 사람이나 공격했지, 이 사람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공격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더군다나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 공개적으로 ‘이 두 사람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 특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물러나게 하자’, 이렇게 얘기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다. 다들 맘속에서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입을 열 수 없는 분위기가 당시에 있었다. 그런데 이만섭이 딱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곳곳에서 “옳소!”, “옳소!” 하고 나온 것이다.


그러자 4인 체제의 한 사람인 백남억 정책위원회 의장이 일어났다. 백남억은 “공화당은 여당이면서도 여당 구실을 못하고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당해왔다”고 하면서 이만섭 발언에 동조했다. 회의를 중단하고 의견을 모았는데 ‘그럼 의원 총회 결의로 하자’, 이렇게 됐다. 개헌 찬반 토론에서 분위기가 이렇게 확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후락, 김형욱 이 두 사람을 축출하자는 쪽으로 가면서 ‘그러면 개헌할 수 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돼버렸다. 이 의원의 건의 사항을 정리해 김성곤과 장경순 국회 부의장이 청와대에 가서 전달하기로 했다. 이게 29일 밤 11시경이었다고 한다.


프레시안 :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김형욱이 이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발언이 있었다는 걸 알자마자 김형욱은 청와대로 달려가 이후락 비서실장 방에 들어가서 “이만섭 이놈 죽인다”, “김성곤도 잡아넣을 걸 그랬어”라고 해가면서 막 소리를 질러댔다. 이후락이 대책을 협의하자고 했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한 후 대통령에게 갔다고 한다. 대통령이 이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돼 있다.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하기로 한 사람들 중에서 김성곤은 진짜 갔는지 안 갔는지도 모른다고 돼 있는데, 장경순 국회 부의장은 확실히 갔다. 장경순이 의원 총회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선행조건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선행조건은 무슨 놈의 선행조건이야”, 이러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장경순은 더 말을 못하고 나왔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하면서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 김성곤이 나섰다. “김형욱이 날 잡아넣겠다고 한다.”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자 풀이 죽어 있던 의원들의 흥분이 되살아났다. 두 사람의 사표를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래서 다시 장경순이 청와대에 갔다. 대통령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장경순은 “나를 믿고 묻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김택수 원내총무가 “자, 이제 개헌 결의문을 채택하자”, 이렇게 나왔다.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채택하기 위해서 여러분, 손뼉을 쳐봐라”라고 하니 다 손뼉을 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물론 안 친 사람도 있겠지만 누가 안 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여튼 이렇게 만장일치로 손뼉 치는 쪽으로 분위기를 끌어간 것이다.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서명했다고 그런다. 98명이었다. 중간에 퇴장한 정구영, 현정주, 이동영 이 세 의원은 서명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 대통령은 “국민 투표가 끝나면 이 실장, 김 부장을 그만두게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여튼 공화당에서는 이 두 사람을 쫓아내는 걸로 의견을 모아가는 방식이 돼버렸다.


정구영은 이 이만섭 발언이 요지경이라고 평가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평가한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어째서 특이한 형태로 문제를 제기했느냐고 하면서, 이건 짜고서 한 것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정구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했다. “대통령한테 사전에 양해 받은 쇼일 수도 있어. ‘개헌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 분위기를 돌려놓지 않으면 개헌안 발의를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미리 짠 각본 같아. 그게 보여.” 회고록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럼 핵심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김성곤, 백남억이 이만섭과 함께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 아니겠느냐고 정구영은 이야기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리스트 모두보기▶

김덕련 전 기자

<2015-12-27>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는 장기 집권 원치 않았다? 뻔한 거짓말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