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망각의 현장을 가다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조사하고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활동해온 사람들의 이야기
[프로젝트 소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
올 봄, 강제동원과 관련한 일본 전범기업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한 피해자와 시민단체의 노력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습니다. 등재를 막지는 못했지만, 유네스코는 등재 조건으로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이 유네스코의 재정을 부담하는 비중, 일본 정부가 십 수 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점, 아베 정부가 외교력을 집중적으로 쏟아 부은 점, 일본정부가 강제동원 가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명기한 적이 없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일본으로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일본정부가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를 온갖 해괴한 논리를 갖다 대며 부정하려 하지만,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모습으로만 비칠 뿐입니다. 오히려 이번 일은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의 ‘강제노동’ 문제가 국제적으로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유네스코 21개 회원국에게 일본 산업시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적극적으로 홍보했습니다. 독일의 회의장 인근에서 열린 강제노동 전시회를 살펴본 회원국 관계자들은 “한국의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왜 문제제기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이 왜 문제제기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치밀한 준비에 비하면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너무 늦게 대응한 것이었지만 내용은 결코 부실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피해자와 함께 한일시민들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피해 구제 활동을 해온 경험과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공서, 절, 기업 등의 문서고를 뒤지며, 폐허가 된 현장과 이름 없는 한국인의 무덤을 찾아 위령시설을 세우고, 유해를 발굴하는 한편, 일본 사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부나 기업의 지원 없이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속해온 것입니다.
“정부나 기업 지원 없이
호주머니 털어서 밝힌
강제노동 실태”
‘일본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문제는 일단 정리가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일본정부가 유네스코의 권고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제대로 기록할 것인가? 아베정권은 또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오늘도 한국과 일본에서 관계자들의 고민과 회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피해자와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보전하고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해왔습니다. 또한 진실과 정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 활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기억의 전승과 연대의 허브’ 역할을 할 ‘식민지역사박물관'(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똑같이 나눠 갖는 책임’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 등 각지의 징용. 징병 강제동원 현장에서 활동하며 밝혀 온 성과와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민들의 이야기 를 전하기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쫓아 수십 년간 노력해 온 사람들 역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스토리펀딩]1화. 세계유산 ‘군함도’ 지옥섬의 조선인을 기억하라
※[스토리펀딩]2화. 바다에 갇힌 조선인의 영혼을 기억하라
※[스토리펀딩]3화. 낯선 이국 땅, 카이지마 탄광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
※[스토리펀딩]4화 “야스쿠니 참배는 백이면 백, 해만 된다”
※[스토리펀딩]5화 “죽은 유골까지 차별하는 일본 정부”
※[스토리펀딩]6화 “오사카 육군 조병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스토리펀딩]7화 “오키나와전, 그 지옥에 끌려간 조선인들”
※[스토리펀딩]8화
하이난섬 조선촌에 묻혀있는
살해당한 조선인들
‘기슈광산(紀州鉱山)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일본의 기이반도(紀伊半島)에 있는 기슈광산에서 있었던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97년에 만들어진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임입니다. ‘모임’은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한국에 계신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수집해 왔으며, 강제연행 현장 추모제, 조사보고서 발간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모임’은 1939년 2월부터 1945년 8월, 일본군이 중국 하이난섬을 점령한 기간동안 자행한 전쟁범죄의 실태와 항일투쟁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2007년 ‘하이난섬근현대사연구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연구회는 최근까지 28회 하이난섬 현지조사를 통해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주민학살, 성노예화, 강제연행, 강제노동, 식량 및 자원의 약탈, 마을 파괴)의 실태를 규명하고 그 책임소재를 밝히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김정미 씨는 이들 모임을 중심적으로 이끌고 있는 재일조선인 활동가입니다. |
“조선보국대
(朝鮮報国隊)
일제식민지기 조선총독부는 일본 해군의 요청에 따라 경성형무소, 서대문형무소, 평양형무소, 신의주형무소, 진남포형무소, 해주형무소, 대구형무소, 대전형무소, 청주형무소, 광주형무소, 원산형무소 등에 수감되어 있던 조선인들을 골라 ‘남방파견보국대'(조선보국대)를 조직하고 하이난섬으로 강제동원했습니다. 1944년 말까지 이렇게 하이난섬으로 동원된 조선인 수감자는 약 2,000명이었습니다.
하이난섬에 끌려간 ‘조선보국대원’들은 싼야(三亜), 후앙리우(黄流), 링수이(陵水), 잉저우진 다포촌(英州鎮大坡村)의 일본 해군 비행장건설, 바수오(八所) 항만건설, 싼야∼바수오 철도건설, 링수이현 신촌(陵水県新村)의 특공정 격납용 동굴건설, 강은(感恩)철교 건설, 이시하라산업(石原産業)의 티안두(田独) 철광산, 일본질소가 경영한 쉴루 철광산 등에 투입되어 혹사당했습니다.
그 후 전쟁이 끝나기 직전까지 살아남은 ‘조선보국대원’은 다시 싼야시 교외의 난딩촌(南丁村)으로 끌려가 다시 군용도로·군용동굴·군용시설 건설현장의 잔악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고 1945년 여름에 학살당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난딩촌은 그곳에서 죽음 당한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뜻으로 ‘조선촌(朝鮮村)’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조선촌’에는 지금도 살해당한 조선인들이 묻혀있습니다.
하이난섬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다행히 가석방되어 고향으로 귀향한 217명의 서류가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행형부(行刑部)에서 작성한 이 문서는 한국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 자료를 통해 살아 돌아온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난섬에서 희생당한 조선인 수와 희생자의 이름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하이난섬에 강제동원 되었다가 돌아온 조선인 수감자의 서류 |
저희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고복남 씨(1917년생), 여조봉 씨(1913년생), Y모 씨(1917년생), P모 씨(1920년생), F모 씨(1922년생) 등 다섯 명을 찾아가 증언을 들었습니다. S모 씨(1917년생)는 전화로 증언을 받았습니다. 이 분들은 처음 경험한 열대기후의 열악한 환경과 일본군의 폭력, 기아, 질병, 가혹한 노동에 쓰려져 간 동료들의 이야기, 그 곳에서 자신들의 겪은 참혹한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 도망치다 잡힌 뒤, 족쇄가 채워지고 철사에 두 손을 뒤로 묶여 매달린 채로 구타를 당한 상황을 설명하는 고복남 씨 |
“
‘조선촌’ 학살
1945년경 일본군에 의해 근처의 도로건설 작업에 강제로 동원되었던 푸아룽(符亜輪) 씨(1916년생)는 기억을 되짚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야자나무 숲 속에 꽃에 둘러싸인 자택 정원에서 조선인들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짊어지고 흙을 날랐다. 조선인들은 먹을 것을 조금밖에 못 먹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다. 흙바구니를 짊어지지 못하면 일본인에게 맞았다.
도로건설이 끝난 뒤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조선인들을 두 사람씩 나무에 매달아 때렸다. 일본인은 조선인이 조선인을 때리게 하면서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리고는 이들을 죽을 때까지 때리다가 결국 죽으면 두세 명씩 구덩이에 묻었다. 다른 조선인에게 구덩이를 파서 묻게 했다.”
소년 시절 ‘조선촌’ 근처에서 소를 몰던 저우쉬에친(周学勤)씨(1935년생)는 “조선인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무서웠다. 가까운 뒷산에서 산 채로 불태워지는 조선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어렸을 때 간간이 들려오던 낮은 비명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저우쉬에친 씨는 1945년경 도로공사에 동원된 많은 조선인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풀이 우거진 그 현장에서 그는 지게를 짊어진 모습을 재연하며 “조선인들이 이렇게 흙을 날랐다”고 증언했습니다.
▲ 조선인들이 만든 도로 옆에서 조선인들이 지게를 짊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저우쉬에친(周学勤) 씨(2000년 3월 30일 촬영) |
‘조선보국대’ 사람들은 ‘조선촌’ 주변에서 도로 공사, 우물파기, 군용동굴·군용시설 건설 등에 동원되었습니다. ‘조선촌’ 옆 중촌(中村) 마을의 뒷산에는 일본군이 사용하던 건물과 군용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몇 군데 남아있습니다.
▲ 중촌 뒷산에 남아있는 일본군의 군용동굴(2002년 3월 26일 촬영) |
▲ 중촌 뒷산에 있는 일본군 건조물(용도불명)(2001년 1월 15일 촬영) |
2001년 1월 12일부터 2월 11일까지 ‘조선촌’의 난딩초등학교 뒤쪽에 있는 광장에서 발굴 작업을 했습니다. 일부 구역을 한정해서 진행을 했는데 100구가 넘는 유골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망시 전체 몸이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유골. 두 사람의 두개골이 달라붙은 유골. 총탄을 맞은 것으로 보이는 구멍 뚫린 두개골. 손발과 몸이 부자연스럽게 접힌 유골.
이 발굴에서 확인한 유골의 모습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증언한 대로 많은 조선인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유골과 함께 탄피, 일본군 양식의 ‘군인수첩’, 단추, 천 조각, 금니, 뿔 모양의 쇠틀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 ‘조선촌’ 전경. 난딩촌 남동쪽의 난딩령(嶺, 표고 485m)정상에서 촬영 (2002년 3월 26일) |
▲ 두개골이 납작하게 달라붙은 유해(2001년 1월 촬영) |
▲ 몸이 뒤틀린 유해(2001년 1월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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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조선촌’은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 현장이며 일본군의 범죄를 증명하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군의 범죄현장이 이렇게 남아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2001년에 저희가 진행한 작업은 시굴 개념으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김대중 대통령(2002년 4월)과 노무현 대통령(2003년 5월) 앞으로 요청서를 보냈습니다.
① ‘조선촌’의 유골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발굴하고 매장된 사람들의 사인을 해명하며 ② 하이난섬 ‘조선촌’ 희생자와 유골문제를 국가 차원의 사업으로 검토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 11월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원회)가 한국의 국가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4월 저희들은 다시 강제동원위원회에 ‘일제강점기 하이난섬의 조선인 강제동원·학살 피해진상규명을 공동으로 실시할 것, 이를 위해 엄밀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조선촌’ 유골발굴을 실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런 저희들의 요청에 대해 강제동원위원회는 동의했지만 이후 위원회는 하이난섬에 대한 조직적인 조사도 ‘조선촌’ 발굴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은 독자적으로 발굴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2006년 5월 2일 이른 아침, 발굴기록을 통해 학살의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인 고고학자, 고고학 발굴전문가와 함께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시굴’을 시작했습니다.
① 매장양식, ② 매장상태, ③ 유해상태, ④ 유골, ⑤ 유물상태, ⑥ 유물내용 등을 과학적으로 해석·감정·분석하고 사인을 특정하여, 일본인에 의한 ‘조선촌’ 조선인 학살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굴’이 시작되고 약 1시간 뒤에 하이난성(海南省) 정부의 경찰관이 찾아오면서 작업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후 하이난성 정부는 외국 민간인을 마을로 들이지 말 것을 ‘조선촌’ 주민들에게 지시했습니다.
▲ 2006년 5월 2일 이른 아침 ‘시굴’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 없지만 매장되어 있는 유해는 산 사람이 말하지 못하는 많은 진실을 전해줍니다.
희생자들은 유골이 되어 일본의 침략범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유골이 된 그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나 ‘하이난섬 근현대사연구회’와 같은 민간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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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팅 리족 먀오족 자치현
(保亭黎族苗族自治県)
난링(南林)에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 미군의 하이난섬 싼야 해안 상륙을 예상한 일본군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의 난링으로 군사거점을 옮기려 했습니다. 난링에는 7개 이상의 커다란 군용동굴과 발전소 터가 남아있습니다. 발전소 터는 밭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일본군이 방치한 이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지금도 난링의 농민들이 밭을 경작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난링에서 일본군의 도로 공사와 건축 작업에 동원된 지밍허(吉明和) 씨(1923년생)는 “동굴을 판 것은 타이완인, 대만인, 조선인, 홍콩인 등이고 동굴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에도 동원되었다” “조선인은 1,000명 이상 있었던 것 같다. 푸른색 옷을 입었고 문이 있는 울타리 안에서 지냈다. 지금 난링향(南林郷) 정부가 있는 곳에 일본군 본부가 있었고 그 근처에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인은 밥을 조금 밖에 먹지 못했기 때문에 쇠약해져서 죽은 사람도 있다. 일본인에게 맞아 죽은 조선인도 많았고, 조선인이 목이 잘려 살해당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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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팅 리족 먀오족 자치현
바오팅에서
일본이 패전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조선인 여성 박래순(朴来順) 씨는 바오팅에서 살았습니다. 바오팅 문사자료공작위원회 주임이었던 장잉용(張応勇) 씨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리족입니다. 장잉용 씨는 ‘전지병참복무대’에 끌려가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던 리족 여성들이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난링과 바오팅지역에서 ‘일본 딸’ ‘일본특무’ 등으로 비난받고 박해를 당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장잉용 씨의 자택 근처에 박래순 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장 씨는 박래순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그녀를 돌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박래순 씨는 장 씨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난 박래순 씨는 일본의 군함에 실려 1942년 2월에 하이난섬의 하이커우(海口)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위안소’에 배치되었다가 다시 1943년 1월에 싼야 홍샤(紅沙)의 ‘위안소’로 옮겨졌습니다. 티안두 광산 근처에 있었던 홍샤의 ‘위안소’에는 타이완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 50여 명이 있었습니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이시하라산업(石原産業)의 관계자도 ‘위안소’에 왔다고 합니다.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박래순 씨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바오팅현의 공로국(公路局)에서 일하며 살다가 1995년에 돌아가셨고 그곳에 묻혔습니다. 묘비에는 ‘1912년생, 1995년졸 (生於一九一二年卒於一九九五年)’ ‘조비한국교공래순박씨묘(祖妣韓国僑工来順朴氏墓)’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 박래순 씨의 묘(2000년 3월 29일 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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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촌’의 지금
2006년 5월에 ‘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 독자적으로 시작했던 시굴이 중단된 뒤에 저희들이 우려한 대로 매장지와 그 주변은 대규모로 개발되었고 일본군 만행의 증거는 파괴되었습니다. 하이난섬 일주 고속도로가 ‘조선촌’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면서 조선인이 매장되어 있던 땅의 절반이 두꺼운 토사로 뒤덮였고 그 위에 도자기 공장이 세워졌습니다.
2001년 1월 발굴 당시 수습된 5명의 유골은 간단히 보존처리 된 후 유리상자에 넣어져 당시 그 땅을 임차하고 있던 한국인이 만든 전시관에 전시되었습니다. 그 때 유골과 함께 발굴된 일본군 양식의 ‘수첩’ 철사로 된 유물, 단추 등도 함께 전시되었습니다. 하지만 2009년 6월 26일에 저희들이 제17차 현지조사로 ‘조선촌’에 찾아갔을 때 전시관에 있던 5명의 유골과 유물 등은 사라졌습니다.
2011년 10월 10일, 저희들은 서울의 ‘강제동원위원회’를 찾아가 사무국장, 관련 담당자 등과 면담을 하며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사라진 ‘조선촌’의 유골에 관해 정식으로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사무국장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2015년 12월 현재까지 사라진 유골에 관해 한국 정부의 책임 있는 부서가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2008년 가을에 ‘조선촌’을 찾아갔을 때 과거 유골이 묻혀있던 부분의 절반 이상이 하이난섬 일주 고속도로 공사의 자재보관소, 고속도로용 자재 제조공장, 노동자 숙소 등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2012년 가을에 갔을 때는 고속도로가 완성되었고 그곳은 도자기 제조공장의 가마터와 전시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2013년 10월 31일에 ‘조선촌’에 갔을 때는 주변 일대의 대규모 ‘개발’과 도로 정비를 위한 토지의 강제수용문제로 ‘조선촌’을 포함하여 주변 마을이 함께 반대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공 회사 측은 텐트를 치고 마을 주민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갔을 때 마을의 농민 100여 명이 낫과 몽둥이를 들고 모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주민을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사용했고 마을 주민이 체포되었습니다. 저희 일행 세 명도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가 몇 시간을 갇혀 있다가 촬영한 사진을 모두 삭제당한 뒤에서야 풀려났습니다.
이날 저희들이 ‘조선촌’에 갈 때마다 만나고 교류하는 현지 주민은 “고속도로공사와 도자기 제조공장을 건설하면서 조선인들이 묻혀 있는 장소 전체를 파헤치려 했지만 ‘조선촌’ 사람들이 강하게 반대하고 싸워서 겨우 일부분이라도 남게 되었다”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제28차 하이난섬 현지조사를 위해 2015년 11월 17일에 하이난섬에 갔다가 11월 25일에 돌아왔습니다. ‘조선촌’에는 11월 21일에 찾아갔습니다. 2014년 3월 25일 제25차 현지조사 후 1년 8개월 만에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조선촌’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증언해 준 푸아룽 씨의 아들인 푸쉬에시오(符学秀) 씨(1955년생)는 “도자기 회사를 만들 때 유골이 많이 나왔다. 그 유골들을 어딘가에 버렸는데 어디인지 모르겠다. 유골은 역사적인 증거이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조선인이 묻힌 장소를 어떻게 해 줄 수 없는지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작년에 조선인이 묻혀 있는 매장지에 갔을 때는 사람 키가 넘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쓰레기가 널려 있었습니다. 이번에 갔을 때는 고구마 밭이 되어 있었고 모과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조선인이 묻힌 곳은 ‘조선촌’ 사람들이 지켜내서 겨우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일제식민지기 어떤 사연으로 형무소에 갔는지, 어쩌다가 먼 이국 하이난 섬까지 끌려왔는지, 어떤 고초를 당하다 학살당했는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고향이 어디인지 가족이 누구인지,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 곳에 묻힌 분들 중 한사람이라도 이름이 밝혀져서 그 사람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해명되기를 바랍니다.
▲ ‘조선촌’ 전시관 내부, 유리상자 안의 유골(2006년 5월초 촬영) |
▲ 유골이 사라진 유리상자. 유골조각이 붙어 있다(2012년 11월 3일 촬영) |
▲ 유골을 떼어낸 흔적이 보인다 |
글 | 김정미(‘기슈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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