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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창고 같은 우리 역사, 불살라야” 박정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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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2> 유신 쿠데타, 서른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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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 이어 <국가와 혁명과 나>를 살폈으면 한다. <국가와 혁명과 나>, 어떤 책인가.


서중석 : <국가와 혁명과 나>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용은 더 많이 된다. 1963년 8월 25일 인쇄라고 돼 있으니, 그해 10월 15일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나온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경륜이라고 할까 이념을 정리해 대선용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도 구체적인 수치, 자료를 제시해가면서 5.16쿠데타를 합리화하고 군사 정권의 업적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 많다. 그러면서도 이 책 역시 그 핵심에는 박정희 자신의 생각이 적절히 내포돼 있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


서장에는 ‘국가, 민족, 역사의 명제’라는 거창한 제목이 붙어 있다. 앞머리 쪽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단군 성조 국기를 세운 지 5000년, 이 민족은 겨우 3000리의 좁은 변강 속에서 세계 최후의 순혈 동포이면서도 혹은 분방(分邦) 혹은 상잔을 거듭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두터운 봉건 속에서 빈곤과 나락과 안일 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아왔다.” 5000년 역사가 이런 “빈곤과 나락과 안일 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은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도 식민 사관에서 익히 많이 들었던 얘기다. 그래서 “단 한 번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보지 못하였음이 오늘까지 우리 역사이다.” 이렇게까지 철저히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야기는 이광수에게서도 안 나온다. 일제 관학자 중에서도 특히 지독한 사람들이나 이런 주장을 했다. 박정희는 그것에 이어서 “생각하면 참으로 곤욕과 혈로에 점철된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면서 우리 역사를 서장부터 아주 부정적으로 봤다.


해방과 독립 운동에 대한 박정희의 편파적 시각

▲ <국가와 혁명과 나>. ⓒ향문사

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박정희는 해방 공간, 독립 운동 등을 충실히 다루지 않았다고 지난번에 얘기했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어떠했나.


서중석 :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좋게 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나쁘게 볼 수도 있다지만, 이 책에서도 해방을 다룬 부분이 너무 짧다. 그리고 해방을 그냥 나쁜 것으로만 보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해방 풍조로부터 시작된 정신적 타락, 망국적 외래 풍조, 이에 깃든 부패, 허영, 사치, 나태를 능가할 수도 없으려니와”, 이렇게 쓰면서 우리 해방이 이런 나쁜 것만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요컨대 해방 후 19년간의 총결산, 그것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반면에 단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면 덮어놓고 흉내 내는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의 강제 이식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우리 역사를 아주 나쁘게만 봤다. 5000년 역사도 그렇게 보더니만 해방 이후에 대해서도 그랬다. 또 민주주의가 강제로 이식됐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민주주의를 “덮어놓고 흉내 내는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강제 이식”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그러고는 “피곤한 5000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썼다. 우리 역사가 피곤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서장에서 이렇게 얘기하면서 자기가 그걸 해결할 방안을 주겠다는 식의 태도를 취했다.


이처럼 이 책에서 박정희는 해방에 대해 짧지만 아주 나쁘게 서술했다. 근래 뉴라이트들도 그렇긴 한데, 하여튼 해방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뭐가 좋았느냐’, 이런 태도를 취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신용구의 책 <박정희 정신 분석, 신화는 없다>에도 시사돼 있고 다른 글에도 나온다. 뭐냐 하면 박정희는 대일본제국이 발전하는 속에서 만주군 군인으로서 큰 칼을 휘두르며 잘되는 것에 명운을 걸었는데 일거에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그런 기대가 날벼락을 맞게 됐고, 그렇기 때문에 해방을 다른 사람들처럼 맞을 분위기, 정신적 상태가 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침통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해방을 맞이한 것으로 쓴 글들이 나온다.


독립 운동에 대한 시각도 그런 것과 연관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같은 데서 독립 운동에 대해 충실히 써주는 게 필요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방 못지않게 독립 운동에 대해서도 호의적 시선을 갖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병주 글을 보면 그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 글에 따르면 이병주, 황용주와 만났을 때 박정희는 이승만과 관련해 이런 비판을 한다.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이승만 비판에서 독립 운동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러자 황용주가 이렇게 얘기했다. “물론 엉터리 독립 운동가도 더러 있었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진짜 독립 운동 한 사람도 많아. 그 사람들 덕분에 민족의 체면을 유지해온 것 아닌가?” 그러니까 박정희가 흥분했다.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황용주는 “그건 또 문제가 다르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무슨 문제가 다르다는 기고?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못지않게 독립 운동에 대해서도 얼마만큼 편파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5.16쿠데타 이전 한국 역사와 사회는 파멸적? 위험한 단정


프레시안 : 4월혁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뤘나.


서중석 : 4월혁명에 대해서도 4.19의 의미를 거의 쓰지 않았다. 4.19 정신을 5.16쿠데타 정부에서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상황, 분위기가 한때 있지 않았나.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5.16쿠데타 세력이 4.19정신을 한때는 평가를 해줬다. 그런데 이 두 저서를 보면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의 경우 한 줄로만 다뤘는데 ‘이승만 정권이 잘못해서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고 그래서 4.19가 났다’, 이 얘기만 했다. ‘파멸에서 재건으로’라고 해가지고 2장의 한 절로 설정돼 있는데, 거기에 뭐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이조’ 망국, 6.25, 4.19, 5.16 이렇게 돼 있다. 그 짧은 몇 쪽에 그걸 쓴 것이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을 다룰 때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예컨대 ‘전승해야 할 유산들’ 같은 데에서 4.19나 해방, 일제의 한국 지배의 문제점과 그에 맞선 독립 운동 같은 것들에 대해 비중을 두고 썼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선사를 그토록 부정적으로 보는 건 길게 썼으면서도 독립 운동 등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다뤘다. 그리고 존속 기간이 1년도 안 되는 장면 정권에 대해서는 하나의 장을 만들어 썼으면서도, 12년간 계속된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너무 소략하게 썼다. 덧붙이면, 앞에서 말한 ‘파멸에서 재건으로’에서 ‘재건’은 5.16쿠데타를 가리킨다. 그 이전 한국 사회는 파멸적이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그렇게 봤다.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굉장한 체질 개선, 사회 정화, 각 요소의 개신을 통해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바탕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는 식으로 내세웠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민족 혁명”이라고 하면서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 의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 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 개조 즉 국민 개혁 혁명인 것이다”, 이렇게 규정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긍정적인 건 없다고 하면서 5.16쿠데타에 대해서는 이렇게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의 정신적 특징이라고 할까, 그것을 이 두 권의 책에서 잘 들여다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 이야기한 부분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라고 하면서 근대화라는 말을 사회 혁명과 관련지어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정치적 의미로 사용했고 나중에는 경제적 의미를 강조해 이 말을 쓰는데, 여기서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박정희는 제1장 ‘혁명은 왜 필요한가’에 ‘4.19혁명의 유산과 민주당 정권’이라는 단락을 넣고서 다시 민주당 정권에 대해 아주 혹독하게 이야기했다. ‘이놈 저놈 다 틀렸다’는 비분강개를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파시즘에서도 그런 비분강개, 과격하고 극단적인 언사를 볼 수 있는데 하여튼 장면 정권을 비판하는 대목에서는 대단히 강한 비난조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을 비난하는 대목을 보면 사실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꽤 했다.


프레시안 : 어떤 대목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민주당 정권에서 자유당 못지않은 의혹 사건이 속출하였고”, 이것도 너무나 극단적인 과장이다. “7.29선거를 당하여는 벌써 부정 선거를 감행하였고 폭도적 선거 사범을 비호하였고”, 이 역시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자유당에서도 악질적인 일을 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자유당 때 국회의원들이 1960년 7.29선거에서 여러 명 당선되자, 그것에 대해 아주 강한 비판이 일었고 창녕 같은 데서는 당선자 쪽을 굉장히 심하게 다룬 경우가 있다. “폭도적 선거 사범”이라는 건 그걸 가리키는 것 같은데, 그건 사실 장면 정권하고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장면 정권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7.29선거 직후에 일어난 일로 보이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장면 정권 말기에 있었던 혁신 세력의 움직임 등과 관련해서도 사실과 맞지 않는 서술이 나온다. “중립 조선을 제창하는 등 급기야는 남북한 자체의 공동 위원회가 판문점에서 재개되기에 이르렀다.” 뭘 가리키는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다. 1961년 5월에 들어서서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뭔가를 해보자고 한 것을 이렇게까지 표현한 것 아닌가 싶다. 그걸 빼놓고는 설명할 내용이 전혀 없다. 그걸 이렇게 서술한 것도 너무 일방적이고 한쪽으로 쏠린 비난을 퍼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면서 ‘서구적 민주주의 제도가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 부작용만 초래했다’는 이야기를 역시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와 히틀러 낳은 독일에 대한 인상적인 평가

▲ 가말 압델 나세르. ⓒ위키미디어커먼스

프레시안 : <국가와 혁명과 나>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이 인용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이 책이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은 이유 중 하나는 가말 압델 나세르 부분 때문이다. ‘박정희가 이집트 군사 혁명과 나세르를 칭찬하지 않았느냐. 그런 점에서 박정희를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 진보적으로 봐야 한다’, 이런 주장이 꽤 있었다. 그 부분 때문에 이 책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자.


나세르의 중립 노선을 좋게 평가한 것과 관련해 박정희가 5.16쿠데타 직후 혁신계의 통일 운동을 얼마나 심하게 탄압했는지, 중립화 통일론을 이야기한 세력이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세르의 중립 노선은 좋게 보면서 박정희 정부 쪽에서 1960년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비동맹 운동을 얼마나 사갈시하고 나쁘게 봤는가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중립 정책과 관련해서는 그런 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


그런 것을 구태여 지적하지 않더라도 나세르 문제와 관련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이집트 군사 혁명에 관해 예컨대 이런 대목이 나온다. “파괴 활동의 금지”, 그러니까 파괴 활동을 금지했다고 하면서 “반공에 대한 제 입법을 서둘렀고 계엄령은 존속하게 하였다. 라디오 방송의 완전 통제, 그리고 모든 신문, 기타 통신에 대해서도 검열제를 실시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평가를 과연 올바른 평가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이런 주장도 나온다. “완전 공화제의 실시는 반동적으로 반정부 행진, 공산주의적·사회적인 일대 민중 운동을 수반하여 왔다. 이대로 둔다면 혁명은 완전히 유산이 된다. 혁명위원회는”, 이건 이집트 군사혁명위원회를 가리키는데, “여기에 강경한 조치로 임하였다. 비상 특별 혁명 재판소의 설치가 그것이다. 이 기관은 학생, 농민, 사회, 노동 반혁명 음모에 대한 강력한 단속은 물론 언론, 출판, 집회까지도 완전히 금지하게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정부는 총역량을 경제 건설에 주력하였다.” 이 부분도 박정희 자신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튼 이런 것을 긍정적으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 박정희가 이집트 군사 혁명에 대해 꽤 길게 쓰고 있는 부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또 논쟁이 될 수 있는 게 아돌프 히틀러와 관계된 부분이다.


프레시안 : 히틀러와 관련해 어떻게 썼나.


서중석 : 독일의 부흥, 그러니까 이 시기 서독의 부흥을 다루면서 그 제목을 ‘라인강의 기적과 불사조의 독일 민족’이라고 했다.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한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불사조의 독일 민족’이라는 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니냐, 즉 순혈주의, 게르만 민족의 위대성 또는 대일본제국과 관련해 일본 민족의 위대성 같은 걸 이야기하는 것과 연관해 생각할 수 있게끔 하는 냄새를 풍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들이 좀 있다. 예컨대 독일 민족을 굉장히 칭찬하는데 이런 식이다. “독일 민족처럼 질서를 존중하고 복종하며 직업을 신성시하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독일 민족이 갖고 있는 국가관이나 사회 윤리, 그러한 철학은 벌써부터 유전되어오는 게르만 민족의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명석한, 분별 있는 민족성이다.” 이런 얘기도 나치 제3제국에서 이야기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 바로 그 분위기를 상당히 풍기는 면이 있다. 독일 민족을 이른바 ‘우등 민족’, 모범적인 민족으로 본 건데, 이 책을 살펴보면 일본인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그러면서 5000년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빈곤과 나락과 안일 무사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아왔다”고 본 점이 참 대조적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나폴레옹 전기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애독했다고 하는데 그 후 만주군관학교에 다닐 때나 일본 육사 시절에, 그러니까 히틀러의 나치즘이 유럽 등에서 풍미할 때 그 영향을 좀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히틀러도 지도자를 굉장히 중시했는데, <국가와 혁명과 나>에 이런 대목이 있다. “부흥의 원동력이 된 국민성 외에 좋은 지도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 점이 ‘라인강의 기적’, 부흥의 원동력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몇 줄 아래에는 그런 지도자와 관련해 이런 설명이 나온다. “비스마르크나 히틀러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정치가는 국민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히틀러를 이야기하는 게 금기시됐는데, 히틀러에 대해 자유스럽게 이야기할 수만 있었다면 박정희가 이야기할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새로운 자료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어쨌건 ‘라인강의 기적’을 가리키면서 “전후 그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도 결국은 지도자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라고 했다. 거듭 얘기하지만 히틀러나 나치가 인종·민족 우열론, 우등 민족 또는 일등 국민론을 많이 이야기하고 일본 군국주의자들도 ‘일본인과 독일인만이 위대하고 모범적인 민족이다’, 이런 주장을 많이 했는데, 그런 것들이 좀 깔려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게 하는 대목들이 ‘라인강의 기적과 불사조의 독일 민족’이라는 항목에 들어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참으로 한심…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 역사,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프레시안 : 이 책의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했나.


우리 역사를 이렇게 보고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이 외세의 강압과 정복의 반복 밑에 겨우 생활 아닌 생존을 연장하여왔다”, 이렇게도 이야기했다. “스스로를 약자시하고 남을 강대시하는 비겁하고도 사대적인 사상”, 이게 노예근성이라고 표현된 것일 텐데, “이 고질, 이 악유산을 거부하고 발본하지 않고서는 자주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파 상쟁에 관해 “이것은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당파에 대한 역사를 또 썼다. 그러고 나서 요약했다. “이상과 같이 우리 민족 역사를 고찰해보면 참으로 한심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버려야 옳은 것이다.” 참 해도 너무한 주장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무리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박정희는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 이념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서구적인 민주주의의 직수입이 한국적인 체질에 여하히 작용할 것인가에 이르러서는 이 지도 이념이”, 이건 새로운 지도 이념을 가리키는데, “바로 외국과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교도 민주주의건 규범 민주주의건 이것 또한 지도 이념에서 택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가 나오는 것이다. 어쨌건 한국에는 그런 식의 민주주의가 시행돼야 한다면서 그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시 말해 “참으로 한심”하고 “모든 악의 창고 같은” 한국의 역사, 민족성이 현대에도 살아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박정희가 주장하는 그것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끝부분에 식민 사관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온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면서 8장의 마지막 부분, 280쪽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누차 언급한 바와 같이”, 정말 두 책에 걸쳐서 누차 언급했다. “한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오늘의 미국이나 불란서나 영국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모든 식자가 공인하는 바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는 왜곡된 위장 민주주의에 시달려왔고 “진정한 민주주의”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는 제한돼야 한다, 이런 뜻이다.


이 책의 기본 논조와는 상관이 없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다른 정권 때 경제 문제는 나쁜 정치 탓, 자기 정권 때 어려운 건 자연재해 탓?


프레시안 : 어떤 것인가.


서중석 : 261쪽에 오면 박정희 군사 정권이 경제 재건을 위해 얼마만큼 일했는가를 쭉 설명하다가 17가지 주요 정책을 제시했다. 첫 번째가 농어촌 고리채 정리인데, 이게 실패로 끝났다는 건 예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세 번째가 통화 개혁인데, 이것도 경제를 큰 혼란에 빠뜨린 시책이었다. 그런데 맨 끝에 ‘수출 진흥책의 확립’이 들어 있다. 내가 뭘 이야기하려는 것이냐 하면 박정희 정부가 수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건 1964년, 1965년에 가서라는 것이다. 1963년 대선을 목전에 두고 이 책을 썼을 때만 해도 수출 진흥책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경제 정책 중 맨 마지막인 17번째에 집어넣은 것 아니겠나.


그러면 장면 정권은 어떠했나. 예컨대 환율 정책 하나만 보자. 수출 정책과 환율 정책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나. 장면 정권은 환-달러 환율을 두 배로 올려 1300 대 1로 만들었다. 1961년 2월 1일에 그렇게 했다. 정권 출범 후 만 6개월도 안 됐을 때 환율 문제에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1964년 5월, 즉 이 책이 나온 이듬해에 가서야 원-달러 환율을 255 대 1로 조정하지 않았나. 5.16쿠데타 후 3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너무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한 것 아니냐는 것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주요 경제 정책의 첫 번째와 세 번째로 제시한 것이 모두 경제를 혼란에 빠뜨려 아주 비판을 많이 받은 것이라는 점도 그렇고 수출 진흥책을 17번째에 넣었다는 것도 당시 박정희가 경제 정책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얼마나 경제에 어두웠는가를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프레시안 : 다른 하나는 무엇인가.


서중석 : 박정희 이 사람은 자기 정권에서 잘못한 것을 외부 탓으로 돌렸다. ‘구정치 세력들이 정치를 정말 잘못해서 우리 경제를 망쳤다’는 주장을 아주 강조해서 되풀이한다. 5.16쿠데타 후 군사 정권 때도 그렇고 제3공화국 초기에도 경제가 참 어렵지 않았나. 1961년에서 1964년까지 4년이 다 그랬다. 그것에 대해 박정희는 290쪽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뜻하지 않은 흉작과 풍수해가 겹쳐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주었다. 운이 없다면 몰라도 저들처럼 악정치의 여파로써 우리가 못살고 있는 게 아니다.” 역대 정권에서 경제가 좋지 않았던 건 다 나쁜 정치, 악정치의 여파로 일어난 것이고, 자신의 정권에서 경제가 그렇게 어려운 건 “뜻하지 않은 흉작과 풍수해가 겹쳐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적절한 것인가. 깜냥 있는 지도자가 할 이야기인가. 이런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병주는 박정희에 대해, 견식은 좁지만 군인으로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고나 정치 이념을 잘 정리한 자료를 찾아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군사 정권 시기가 끝나고 정치를 할 때 박정희의 저작이라든가 연설문 등은 정치적으로 많이 윤색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도 점점 현실화돼서 자기주장을 은폐하는 면이 많이 있었다. 유신 체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자신의 신념과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본 것들을 주장하는 모습이 박정희의 저작이나 연설문집 같은 데서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의 경우 박정희가 좁은 시야를 가졌고 식견도 얕기는 했으나, 확고한 주견을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국민에게 꼭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을 품고 쓴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한다. 조력자가 글을 많이 써줬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자신이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이 이 두 권의 책에 잘 표출돼 있다고 본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두 저서에서 일제 식민 사관을, 공공연한 수준을 넘어 자신의 역사관으로 당당하게 강조, 역설하면서 한국 민족을 꾸짖은 점이다. 2014년에 한 총리 후보자가 식민 사관을 피력한 사실이 드러나 단칼에 나가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식민 사관을 바탕에 두고 군국주의와 유사한 면 보인 박정희 정치 이념

ⓒ오월의봄

프레시안 : 지난번에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이 시기에 식민 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건 박정희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았나.


서중석 : 그 당시 식민 사관을 지니고 있었던 건 박정희만의 특별한 현상은 아니었다. 역사학계도 초보적인 수준에서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있었을 뿐이고, 대부분의 지식인이 많든 적든 식민 사관에 감염돼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역사학계에서 식민 사관을 비판하고 있을 때에도 인접 사회과학 교수나 지식인 중 상당수가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난 의아해한 적이 많았다. 사실 그런 현상이 굉장히 심했다. 서울대에서 그런 교수들을 보면서 ‘저 교수들은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을 1960∼1970년대에 참 많이 했다.


그런 속에서 1950∼1960년대 술집 같은 데에서 ‘우리 민족성이 글러먹었다’느니 ‘조선놈은 노예근성을 가졌다’느니 하면서 떠드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저작 같은 걸 통해 공공연히 식민 사관을 적극적·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으로 민족의 지도자를 자임한 사람 아니었나. 그런 박정희의 두 저서에서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하고 조선총독부나 군국주의자들이 견지·선전·홍보했던 논리, 한국인을 열등시하면서 주장한 식민 사관이 얘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박정희 자신의 역사관, 정치 이념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데 이 두 책의 특징이 있다.


일제 시기나 해방 후 경력을 볼 때 박정희는 폭넓은 시야, 세계관, 역사관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박정희는 자신에게 그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젊은 군인들처럼 비분강개해 과격한 언사를 강렬하게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는 ‘이것저것 다 썩었다’는 논리가 들어 있었다. 해방 후에도 다른 군인들, 그러니까 만주군관학교 출신이건 일본 육사 출신이건 다른 군인들과는 달리 군인 정신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지니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역사관이나 정치 이념만이 한국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과격하고 극단적인 언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원리주의자들보다도 박정희는 집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저서에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보수 정당이건 진보 정당이건 가리지 않고 비난, 매도하면서 민간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까지의 모든 정치인을 비난한 데서도 알 수 있지 않나. 표현이 완곡한 곳이 꽤 많긴 하지만, 서구 민주주의를 혐오한 군국주의자들이 가졌던 생각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요약하면 박정희의 정치 이념은 식민 사관을 바탕에 깔면서 군국주의 정치 이념과 유사한 면을 보여줬다. 아울러 민족성이나 민족사가 잘못돼 있으니까 강권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5.16쿠데타 이후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한 일종의 메시아적인 사상을 박정희가 갖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모습을 이 두 책에서 보여줬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 부정은 일거에 이뤄질 수 없음을 박정희 자신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국내외적인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며 그때까지 그런 조건, 다시 말해 의회 민주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부정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체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사전 조직된 공화당은 자유당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 : 공화당과 자유당, 어떤 점에서 달랐나.


서중석 :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정말 무능하다는 얘기를 들을 만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 정권이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고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공화당은 자유당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공화당에 초기부터 자유당원들이 들어갔고 1963년 총선을 할 때도 자유당 출신이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되기도 했지만, 공화당을 이끌어간 중심인물 가운데에는 지식인이나 언론인, 법조인 또는 혁신계 출신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좀 해보려고 했던 면도 있었다.


김종필 또한 일본 군인은 아니었다. 김종필을 내가 좋게 보는 몇 안 되는 면 중 하나이기도 한데, 뭐냐 하면 여운형에게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한다고 보도됐을 때 김종필도 여운형을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괜찮게 평가하더라. 5.16쿠데타 직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이 김종필을 민족주의자로 찍어서 기피했던 데에는 어느 정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미국이 한때 박정희보다 김종필을 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 데에는 박정희와 김종필, 이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고 예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에 더해 김종필 주위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지식인, 언론인, 법조인 또는 혁신계 출신 등이 좀 있었던 면도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공화당 정권은 4월혁명 이후 거세진 경제 자립, 사회 쇄신 분위기에 호응한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면 정권이 출범하면서 내건 경제 제일주의,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관료제 쇄신, 즉 직업적이고 전문적인 관료제로 나아가는 것 등을 이어받았다. 5.16쿠데타 후 초기 몇 년간은 공화당 사전 조직, 그리고 4대 의혹 사건처럼 경제가 정치에 종속되는 사건도 있었고 당시 유행어가 된 ‘시행착오’를 잇달아 범했다. 그렇지만 1964∼1965년경부터 경제 발전을 할 수 있는 국내외적인 여러 조건이 형성됐고, 그런 여러 조건과 결합해 박정희의 리더십 아래 경제 발전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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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1-06> 프레시안

☞기사원문: “악의 창고 같은 우리 역사, 불살라야” 박정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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