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 2016년부터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를 민족문제연구소와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함께 발행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는 2000년 3월 창간되었으며 2015년 겨울호까지 통권 61호가 나왔습니다. 그간 『내일을 여는 역사』는 대중 역사 잡지를 표방하며 유익한 내용으로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으나 생각만큼 널리 읽히지는 못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내일을 여는 역사』를 통해 올바른 역사인식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하면서 연구소의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고자 합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가 역사의 진실을 알리고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데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역사를 사랑하는 시민 회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기존의 『역사와 책임』은 반년간 근현대 과거사청산 전문학술지로 계속 발간됩니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해방이 된지 70년이 됐지만 아직도 종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큰 이슈이고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외교 현안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 뒤 대일청구권 협상과 한일수교 과정에서 소외됐던 전쟁 중 희생됐던 종군 위안부 문제가 다시 부각하게 된 계기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의 종군 위안부에 대한 증언을 하고 1992년 1월부터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정대협 등 종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 단체에선 이 문제를 소수자 인권문제(성노예)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국제적인 연대를 도모하며 소수자에 대한 인권 운동으로 다
가서고 있다.
국내 다른 소수자 인권 운동과는 다르게 종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 안에서 빠르게 지지를 얻고 있다. 국내에서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 요구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증거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정면)(출처: 김진령) |
▲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뒷면)(출처: 김진령) |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 2011년 12월14일 1000차 수요시위에 맞춰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 길가에 세워졌다. 종군 위안부 할머
니들이 매주 집회를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소녀상이 놓인 것. 그 뒤 2013 년 9월에 최초로 고등학교 교정(서울 서초고)에 세워지고 2014년에 6개 지역에, 그리고 올해만 대전 울산 전주 청주 강릉 남해 등 10여 곳에 들어섰고, 지난 10월 말에는 서울 성북동에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최초로 들어섰다. 종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의 역사적인 특수성 속에서 놓인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 인권 보호를 위한 국제적인 연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만도 글렌데일시와 디트로이트시 등 9개 지역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내년 초 중국 상하이의 한 대학에 두 번째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질 예정이다. 국내에만 24점의 소녀상이 건립됐고 내년까지 서른 점이 넘는 소녀상이 세워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 서울 성북동 소재 한중 평화의 소녀상(출처: 김진령) |
종군 위안부 문제의 상징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국내에 단기간에 이런 단일한 주제의 조형물이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은
1970~80년대에 관 주도로 세워진 애국열사상이나 초등학교 교정에 보급된 이순신 장군이나 이승복 어린이상 등을 빼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로, 자발적인 시민의 성금 모금으로 전국 각지에 평화의 소녀상이 동시 다발적으로 들어선 것은 한국 사회에선 지금껏 보기 힘들었던 현상이다.
1. 평화의 소녀상 탄생
이 평화의 소녀상은 부부 작가인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공동 작품이고 김서경 작가는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이 작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조각 작품 ‘소녀의 꿈’을 만들었다. 김서경 작가의 말이다.
“남편(김운성)이 광화문 근처를 지나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아직도’ 수요집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2011년 봄 정대협을 찾아갔다. 남편이 “우리가 미술을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때가 수요집회 1000회 6개월 전이었다.
그랬더니 정대협에서 “평화비를 만드려고 한다”고 했다. 그 비에 쓰려고 길원옥 할머니의 붓글씨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정대협과 논의하면서 평화비에 ‘고무신을 놓을까’, ‘빈 의자를 놓을까’ 이런 저런 논의를 계속해 갔다. 그때 일본은 위안부 논의 자체를 무산시키고 평화비 건립도 무산시키려는 압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가 끌려갔을 당시가 소녀였으니까 소녀상을 디자인하고 그쪽으로 작업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소녀상은 애초 나의 아이디어였다. 내가 2006년도에 <소녀의 꿈>이란 작업을 했다. 나는 작업을 할 때 사회적 이슈도 고민한다. 대학 재학 중 ‘민중의 땅’ 전시에 참여하면서 작업을 시작했고 이어 민족미술연구소가 주관한 <푸른 깃발>전에 참여하는 등 사회 이슈를 조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주로 했다. <소녀의 꿈>은 정대협과 함께 하기 이전에 위안부를 염두에 두고 못다 핀 꽃이라는 의미에서 만든 작품이다. 소녀가 꿈을 꾸는 형상이다. 그들이 끌려가기 전에 얼마나 많은 꿈이 있고, 미래를 꿈꿨겠나. 그 작품은 할머니들의 잃어버린 꿈을 형상화한 것이다.
정대협과 평화비 건립 논의를 하면서 할머니들이 위안부로 끌려갔을 당시에 소녀니까 ‘잃어버린 소녀의 꿈’이란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그게 공감을 얻고 정대협에서 좋다고 해 작업에 들어가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 작업이 정대협과 함께 하면서 2011년에 위안부 소녀상 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 소녀상의 발 부분(출처: 김서경).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뒤꿈치가 들린 맨발을 통해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오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아픔을 형상화했다. |
▲ 소녀상의 바닥(출처: 김서경). 꿈 많던 소녀가 할머니가 된 현실과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이 나비로라도 환생해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겠다는 절박한 마음을 담았다. |
이 소녀상에는 많은 상징적 요소가 들어가 있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소녀상 외형의 상징 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밝혔다.
소녀상은 13~15세 정도의 소녀가 한복을 입고 맨발로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작가는 함부로 짧게 잘린 단발머리는 강제로 소녀를 정신대로 끌고 가 고향과 부모로부터 단절시킨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뒤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사과 받지 못하고 억울함을 풀지 못하며 긴 후유증을 앓아야 했던 불편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소녀 어깨 위에 내려앉은 새는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를 상징하기도 한다. 소녀가 앉아있는 의자 뒤 바닥에는 할머니가 돼버린 그 소녀의 그림자가 표현돼 있다. 그 그림자 속 가슴 부위에 하얀 나비가 있다. 나비는 환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본 정부의 사죄를 기다리다 먼저 세상을 뜬 할머니들이 나비로라도 환생해 생전에 그토록 원하던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겠다는 절박한 의미다. 소녀상 옆의 빈 의자는 먼저 세상을 뜬 할머니들의 자리이자 후손들이 그 자리에 앉아 끌려갈 당시의 어린 소녀들 심정을 느껴보는 공감의 자리이기도 하다.
이 소녀상은 이후 국내외에 세워진 2차 대전 중 일본군에 끌려간 성노예 추모상의 원형이 됐다. 국내에 세워진 대부분의 평화의 소녀상도 몇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품이 채택됐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관여하지 않은 작품일지라도 표현 양식은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1호 평화의 소녀상 표현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내 최초로 교정에 세워진 서초고의 소녀상은 이 학교 재학생과 관내 미술 관계자의 의견 수렴을 거체 자체 제작된 모델이다. 서초고 쪽에선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과 비슷한 작품을 세우고 싶었지만 예산상의 문제로 그럴 수 없었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성금 모금으로 비용을 충당한 서초고의 소녀상은 청동 조각품이 아닌 섬유강화플라스틱 (FRP) 소재를 써서 비용을 낮추고 디자인도 학생과 관내 미술계 인사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 만들었다. 대신 서초고는 자체 제작한 소녀상 이미지를 주제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표와 엽서 디자인을 공모해 실제 발행 하는 등 참여의 폭을 넓혔다.
▲ 서울 서초고 교정에 세워진 소녀상 (출처: 김진령) ▲ 서초고 학생이 디자인한 기념엽서와 우표 |
서초고 위안부 소녀상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는 다른 상징도 들어갔다. 한복을 입은 소녀상이라는 점은 같지만 가슴에 무궁화 무늬가 들
어가 있고 두 손에 태극기를 꼭 쥐고 있다는 점, 꽃신을 신었는데 한쪽 신이 벗겨져 있는 등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는 달리 식민과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교육’에도 방점을 찍었다. 이 학교 이대영 교장은 위안부 소녀상 건립 의의에 대해 “위안부 소녀상을 교정에서 매일 보는 것 자체가 생활 속의 역사교육이다. 올바른 역사인식이 나라 사랑이자 인류사랑”이라고 밝혔다.
올해 대구와 군위에 들어선 평화의 소녀상도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소녀상도 다른 모습이다. 대구시 남구 대구여상 교정에 세워진 ‘대구 평화의 소녀상’은 실제 위안부로 끌려갔던 이용수 할머니를 모델로 대구 경북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병준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 이병준 작가는 이용수 할머니의 젊었던 시절 사진을 바탕으로 키 160cm 정도의 소녀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있는 입상을 만들었다. 소녀상은 단발머리에 맨발, 짧은 치마 한복을 입은 모습에 옆에는 앉을 수 있는 빈 의자가 있고 소녀상 뒤로 그림자가 있다는 점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 동일하다. 다만 서있는 모습에 그림자가 하트 모양이고, 태극기가 등장한다는 점은 다르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의 기폭제 역할을 담당한 정대협 쪽에선 각 지역에 들어선 소녀상과 정대협이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정대협의 류지형 간사는 “소녀상 표준모델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각 지역 건립위가 판단하는 것에 따라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과 같은 모양으로 하기도 하고 따로 의미를 생각하고 부여해 다른 모양으로 하기도 한다. 정대협에서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권장사항 같은 건 전혀 없다. 우리는 각 지역에서 평화비를 건립할 때 자료를 드린다든가 과정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연을 한다든가 하는 것들로 지원을 할 뿐 우리가 건립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2. 종군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대표 도상으로 자리 잡은 1호 평화의 소녀상
작가는 달라지더라도 각 지역에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크게 보면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만든 ‘1호 평화의 소녀상’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품은 미국에 이어 중국에도 세워질 예정으로 일제 정신대에 끌려간 종군 위안부의 희생과 인권을 의미하는 ‘대표 도상’으로 지위를 굳히고 있다.
물론 김서경 김운성 작가도 20여 개의 작품을 모두 똑같이 만들지는 않는다. 김서경 작가는 “얼굴 모양 표현은 비슷해 보이지만 작업할 때마다 세우는 곳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때 그때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작업한 거제시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서있는 모양(입상)이다. 서있는 소녀는 두 손에 새를 보호하는 모습이다.
▲ 거제시에 세워진 소녀상(출처: 김서경) |
남해군에 세워진 소녀상도 입상인데 이번에는 손에 뚝뚝 떨어진 동백을 쥐고 있다. 김 작가는 “남해에는 위안부에 끌려갔던 박숙이 할머니가
생존해 계시고 그 할머니를 기리는 마음으로 작업한 것”이라고 밝혔다.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는 지역의 역사적 배경이나 지역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변주하고 있다. 이는 평화의 소녀상 건립이 국가의 예산 지원 아래 벌어지는 관 주도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 남해군에 세워진 소녀상(출처: 김서경) |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의 20년 수요집회가 없었다면 저 소녀상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게 99.999%이다.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짐으로써 소녀상의 상징성이 획득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계에서는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소녀상이 종군 위안부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획득했다는 데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소녀상 건립 운동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생겼고 1호 작품이 김서경 김운성 작가 작품이다. 이 모델이 제일 많이 세워진 만큼 처음 작가가 만든 상상을 존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짐으로써 일제의 종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정체성을 획득했다”고 말했다.
3. 소녀상에 대한 조심스러운 저격, 고증 논란의 시작
매주 수요일 오전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평화의 소녀상이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매주 수요집회에는 전국 각지의 초중고에서 단체 참여 신청이 정대협에 쏟아지고 있다. 이는 민간 주도의 시위 현장에 학교장 허가 아래 ‘현장 학습’으로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사례일 것이고, 여야 정파의 시비 대상이 되지 않는 인권 운동 현장일 것이다.
▲ 2015년 10월 21일 수요집회 모습(출처: 김진령). 현장 학습으로 참여한 학생들이 소녀상 주변에 모여 있다. |
여성가족부와 교육부는 지난 4월 초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 확산을 위해 <일본군 위안부 바로 알기> 교육 교재를 제작 배포한다’는 보도 자료를 냈다. 인터넷 누리집과 교사용 교재, 학생용 워크북, 동영상 등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교육부에서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강력히 대응하는 조치’로서, 여성가족부에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여성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계기가 될 것을 희망’하면서 종군 위안부문제에 대응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문제 제기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비판이다. 그는 2013년에 펴낸 『제국의 위안부』라
는 책에서 “‘위안부’가 없는 ‘위안부 소녀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을 인용해본다.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녀상은 마치 ‘위안부’의 대부분이 소녀였던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소녀 위안부’의 기억을 강화시켜 나간다. 소녀의 단발머리는 그를 단정한 학생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학교 교육을 아예 혹은 조금밖에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녀상은 실제 조선인 위안부와는 거리가 있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주먹을 쥐고 쏘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이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 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제국의 위안부』, 204~205쪽)
박 교수의 주장은 평화의 소녀상이 실제 전쟁에 끌려간 ‘평균적인 종군위안부’와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일부 보수진영 인사에 의해 인용되면서 ‘일본식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등 고증과 거리가 먼 정대협의 반일 히스테리’(조우석)라는 식으로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이 논란에 대해 정준모 미술평론가는 “짧은 한복 치마와 단발머리에 맨발로 주먹을 쥔 소녀의 모습은 이미 대중에 각인된 모습이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소녀가 나이 들었다고 늙게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 장군상도 조선시대 군인 복장의 세세한 고증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게 광화문에서 위엄 있게 세종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징성이다. 예술은 사진같은 게 아니다. 이런 작품에서 무슨 리얼리티를 찾나. 로댕이 만든 <칼레의 시민>에서 리얼리티를 찾나? 역사적 현장을 강조해서 리얼리즘보다 더 한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게 예술”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평화의 소녀상이 시각적인 상징 기호로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함축하는 도상으로 외국인도 보기만 해도 이 조각상이 위안부 문제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상징으로 자리 잡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기획하기도 한 미술평론가 김준기는 “이 작품은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를 포괄적으로 조명하는 작품이기에 고증을 갖고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기존에 해오던 창작 작업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창작품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4.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이뤄져도 또 다른 논란가능성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과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인권’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좌우 진영의 편가르기가 통하지않는 범국민적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 종군 위안부의 피해를 기리고 기념하는 방식에서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교육 당국의 교재 배포와 학생들이 현장 학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인권 운동 측면 못지않게 기존의 극일 캠페인과 맥을 같이 하는 ‘역사 바로알기’라는 성격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평화의 소녀상이 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식민역사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이 아니라 종군 위안부가 ‘인류 공통의 인권 범죄’이기 때문이다. 국회 사무처가 발간한 <글렌데일시 위안부 소녀상 건립과 이에 따른 영향>(2014년, LA입법관 정홍진)이라는 문건을 보면 글렌데일시에 소녀상이 건립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인류 공통의 인권 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소녀상이 세워졌고 (글렌데일시) 모든 사람이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그 범죄행위에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적시했다. 한복을 입고 있는 소녀상이 상징하는 것이 ‘한국인만의 특별한 아픈 기억’이었다면 미국 땅에 세워질 이유가 없었지만 종군 위안부가 ‘인류 공통의 인권 범죄’이기에 보편성을 획득하고 글렌데일 시민의 동의를 얻어 미국 땅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 내에서 대중의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 운동은 기존의 반일 또는 극일 캠페인에서 볼 수 있었던 ‘민족주의적’ 요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국내에 세워지는 평화의 소녀상이 변주되면서 ‘태극기’같은 민족주의적 상징 요소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그 반증이기도 하다. 김준기 평론가는 “평화의 소녀상이 애초 창작자의 의도와는 달리 민족주의 담론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럴 가능성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군위안부 문제를 여성, 10대, 식민지인 등 사회적 약자 인권 보호 측면을 제거하고 일본책임론으로만 귀책하면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21세기 초반 한국에서 일고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 운동은 해방 뒤 숱하게 반복되어온 반일 캠페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때문에 이 운동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기도 하다. 일단 시민 운동으로 출발한 이 운동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이끌어낸다면 이는 한국 시민 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운동’의 성공 사례로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징표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성공 동력이 도시 빈민이나 일용직 노동자, 성소수자, 난민 같은 한국 사회의 산적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 향상 운동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여전히 물음표이다.
무엇보다도 이 운동을 한일간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한 역사 바로알기 차원으로 인식한 이들에게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1호 평화의 소녀상은 버거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일본 언론에선 “일본 정부가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 타결의 조기 타결 조건으로 한국 정부에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내걸고 있다”(2015년 11월16일자 교도통신)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당장 평화의 소녀상의 입지가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학동과 수송동을 가로지르는 길가 보도에 종로구청의 재량으로 세워진 1호 평화의 소녀상은 종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이뤄진다면 ‘인권 운동의 상징성’과 ‘국익론’으로 한국 사회의 내부 구성원끼리 충돌하는 이슈가 될 가능성이 있다.
김운성 작가는 평화의 소녀상을 일본에서 전시할 때 한 일본인으로부터 ‘왜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웠냐’는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불편하라고 거기에 세운 것”이라고 답했다. “소녀상이 나타내는 종군 위안부를 일본은 수치로 여긴다. 그게 바로 이 작품을 거기엔 세우는 이유이자 의미”란 것이다. 그는 “그곳에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역사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철거한다는 방안은 안 나올 것이라고 본다. 일본대사관이 옮겨도 평화의 소녀가 앉아있는 저 자리는 이미 역사적 의의를 획득한 것”이라고 밝혔다. 소녀상이 우리만의 역사 바로알기 차원을 넘어서 인류 공통의 인권 범죄(성노예)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광복 75주년 또는 80주년에 1호 평화의 소녀상이 어디에서 그 기념일을 맞을지 여부도 21세기 한국 사회의 단면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김서경 김운성 부부 작가 인터뷰
평화의 소녀상을 공동 작업한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동기 동창(중앙대 예술대학 조소학과 1기, 84학번)이다. 대학 다닐 때부터 커플이었으니
까 30년째 ‘동행’을 하고 있다. 재학 중인 86년에 ‘민중의 땅’이라는 전시 작업에 참가했고 이들이 졸업하던 해에는 제주 4·3기념 조형물을 섬
유강화플라스틱(FRP)으로 작업해서 전시회에 출품했고 1990년에 광주 개방대에 5·18기념물이 한국 최초로 설치됐는데 그때 작업도 했다.
▲ 김서경 김운성 부부 작가와 소녀상(출처: 김진령) |
평화의 소녀상 작업의 원형은 애초 김서경의 작업물이었다. 김서경은 2006년도에 <소녀의 꿈>이란 작업물을 내놨었다. “그때 정대협과 상관
없이 위안부 할머니를 생각하고 못다 핀 꽃이라는 의미에서 <소녀의 꿈>이란 것을 만들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터로 끌려갈 당시의 나이에는 얼마나 많은 꿈이 많았겠나. 할머니들의 그 잃어버린 꿈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작업이 2011년에 위안부 소녀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부의 공동 이력 작업엔 ‘효순이 미선이 추모비’도 있고 서대문 형무소에 세워진 독립열사상도 있고, 민주열사상도 있다. 그런 일련의 작업흐름 속에 평화의 소녀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 일각에서 일고 있는 소녀상의 외형에 대한 논란에 대해 김서경은 “소녀상의 외형이 ‘순결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하는 데 그건 넌센스다. 그럼 (종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이)불결해야 하나? 왜 그런 단어를 써서 공격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운성 작가는 “처음에는 평화비를 만들려고 디자인을 했다. 그런데 평화비 건립을 일본 정부가 집요하게 반대했다. 우리 땅에 세우는 것조차도 반대하다니 화가 났다. 그래서 정대협에 조형물로 가자고 제안했다”며 평화의 소녀상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
“일제가 끌고 간 한국의 여성 중 80% 이상이 미성년이었다. 그런 아이를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 그래서 소녀상을 채택한 것이다.
왜 소녀상이고 왜 한복을 입혔느냐고 시비를 하기 이전에 이런 배경을 안다면 순결주의로 몰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 시대에는 왜 머리 모양이 단발이냐는 지적도 있는데, 위안부 여성은 끌려간 뒤 대부분 머리를 잘랐다. 댕기머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창작품이다. 이 작품을 고증물로 판단한다면 발꿈치가 들린 모습도, 새가 어깨에 앉아있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디테일이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현실의 디테일로 설명하는가? 그런 비판은 정대협이나 인권(여성) 운동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기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작업한 서대문 역사박물관 여옥사에 들어가 있는 유관순 열사 전신상은 역사학계 연구자의 고증을 받아 복식과 얼굴 표정에 정밀성을 기했다. 하지만 평화의 소녀상은 고증 받을 대상이 아니라 창작품이다.”
김진령 저널리스트, 전 시사저널 기자
§출처: 『내일을 여는 역사』 61호, p17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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