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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친일 청산’, 내 자식 안 막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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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맞은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 그가 밝힌 소원은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리고 이틀째가 되던 지난 2일 늦은 시각, 제 휴대전화로 짧은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의 부인, 김희숙 여사님이 구순을 맞이하여 조촐한 식사 모임을 하는데 참석할 수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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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숙 여사님의 구순 생신 축하모임. 가족과 가까운 몇 분만 모시고 조촐한 행사를 가졌습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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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 191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후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해방 후에는 백범 김구의 비서로, 또 <사상계> 언론인으로, 다시 국회의원과 재야 민주주의 지도자로 일생을 바친 ‘대한민국 진짜 민주주의자’. 그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장준하 선생님 옆에서 함께한 분이 바로 부인 김희숙 여사입니다.


사제지간에서 부부가 된 ‘동지’, 장준하와 김희숙


두 분의 첫 인연은 사제지간으로 출발합니다. 1938년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한 장준하 선생님이 잠시 소학교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만난 제자 중 한 명이 김희숙 여사였습니다. 처음엔 그저 사제지간이었던 두 분이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는 과정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특별한 사연이 숨어 있었습니다.


1941년, 3년간의 소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장준하 선생님은 신학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이 소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 지냈던 하숙집의 아주머니에게 종종 안부 편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글을 모르던 하숙집 아주머니는 딸에게 그 편지를 읽어달라고 했고 답장도 대신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 하숙집 딸이 장준하 선생님이 가르치던 제자 김희숙이었습니다.


그렇게 편지가 오가면서 어느덧 미혼의 젊은 두 남녀 사이에서 남다른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오가는 편지를 통해 조금씩 서로의 마음이 열려가던 1943년 어느 날, 제자 김희숙이 보내온 한 통의 편지를 앞에 두고 장준하 선생님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편지에는 ‘어려운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사연과 함께 ‘정신대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장준하 선생님은 결심하게 됩니다. ‘제자 김희숙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만은 막아야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당시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 중 다수가 ‘일본군 성노예'(일본군 위안부)가 되라고 강요받은 사례도 있어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 김희숙이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은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자신이 김희숙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신대는 미혼의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강제 동원령이었기에 자신이 김희숙과 결혼한다면 유부녀가 된 김희숙이 정신대로 끌려갈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1943년 11월 30일, 장준하 선생님은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합니다. 그리고 이미 제자가 아닌 여성으로 사랑하던 제자 김희숙과 결혼하게 됩니다. 이러한 장준하 선생의 결혼에 대해 적지 않은 이들이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김희숙은 살릴 수 있지만, 대신 장준하가 죽는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1943년 12월, 당시 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휩쓸려 가는 상황에서 일제는 모든 인력과 자원을 전쟁터로 쓸어 넣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전시 총동원령을 선포한 일제는 일본인은 물론이고 식민지 치하에서의 청년까지도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따라서 장준하 선생님이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것은 학병으로 끌려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장준하 선생님은 결혼하고 불과 10일 만인 1943년 12월 10일, 평북 삭주에서 일본 군인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이처럼 결혼하고 10일 만에 죽음의 사지로 끌려가는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당시 열여덟 살 어린 신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바로 그때였습니다. 며칠 후면 만주 일본군 부대로 떠날 남편을 평양 신병 훈련소에서 마지막으로 면회하고 돌아서던 어린 신부에게 남편 장준하 선생님이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몰래 남겼다고 합니다. 훗날 자신의 자서전인 <돌베개>에 장준하 선생님이 남긴 말씀입니다.


“이미 며칠 전 (마지막으로) 면회 왔던 아내에게 장차 취할 나의 행동에 대해 암시를 준 일은 있었다. 중국에 가면 꼭 매주 주말마다 편지를 하마. 만약 그 편지의 끝이 성경 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받는 편지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성경 구절을 읽고 있을 땐, 이미 나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진영이나 또는 우리 임정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길은…” 어린 신부의 물음


남편 장준하에게 이 말을 들은 어린 신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내가 이 결심을 말했을 때 아내의 표정이 백지장같이 변하던 그 모습은, 그때 이후 오늘까지 반년이 넘도록 잊을 수가 없었다(돌베개 중).’


마침내 1944년 7월 7일. 장준하 선생님이 중국으로 떠나고 약 5개월이 지나가던 그때, 중국의 쓰카다(塚田) 부대에서 발송된 엽서 한 장이 김희숙에게 도착합니다. 약속처럼 매주 한 통씩 엽서가 왔는데 그날따라 엽서를 받아들기가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 펼쳐 든 엽서 말미에 적힌 문구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창세기 28장 10~15절).’


5개월 전, 남편 장준하 선생님이 아내에게 남긴 그 말처럼 엽서에는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마침내 장준하 선생님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희숙 여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도 아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처음 남편 장준하 선생님에게 일본군 탈출에 대한 고백을 들은 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될 정도로 두렵고 떨렸던 당시 열여덟 살의 어린 신부가 스승이었던 남편 장준하 선생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남편 장준하 선생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날, 열여덟 살의 어린 신부였던 김희숙 여사의 기도는 그래서 더 간절했다고 합니다. 그저 남편의 무사한 탈출만을 도와달라며 천주님에게 매달렸던 그 날의 신부. 바로 그 어린 신부였던 김희숙 여사가 지난 1월 3일, 구순의 생신을 맞이한 것입니다.


남편 장준하 선생의 정신적 동지, 김희숙 여사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6천 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 찾아간 장준하 선생님이 이후 광복군 대위로, 백범 김구 선생님의 비서로 조국을 찾은 후 다시 만날 때까지 아내 김희숙 여사의 삶도 평탄치 않았습니다.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보낸 일제강점 말기의 삶. 김희숙 여사는 이후 6.25 전쟁 중 ‘사상계’를 창간한 남편을 돕기 위해 자신의 옷을 내다 팔아야 했습니다. 김 여사는 그렇게 만든 ‘사상계’를 팔기 위해 남편이 끌고가던 손수레를 뒤에서 함께 밀던 정신적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37번 연행과 3번의 구속 등 남편이 겪는 고난 속에서 대신 다섯 자식의 생계를 책임졌던 김희숙 여사.


그러다가 결국 1975년 8월 17일, 자신의 나이 49살이 되던 해 남편을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 시절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잃었습니다. 그러고도 억울하다는 말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지난 40년 세월이었습니다. 김 여사가 겪은 고통은 심적인 억울함 만이 아니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권력은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장 선생님의 유족을 탄압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남긴, 장준하 선생님 관련 비공개 동향문서에 의하면,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님 사후에도 유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일체 어떠한 생계 수단도 가질 수 없도록 괴롭혔습니다.


자식 중에 누가 회사에 취직하면, 중정이 해당 회사를 찾아가 취직 경위를 물어대니 어느 회사가 그 자녀를 채용할까요. 딱한 처지를 보다 못한 당시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이 쌀 한가마니를 장 선생님 댁에 놓고 오라고 지게꾼에게 부탁합니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유신독재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추후 이 사실을 중정으로부터 보고받은 김종필씨가 김옥길 총장을 호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장준하씨 집에 쌀을 보냈느냐”며 “당신, 유신에 반대하는 거냐?”고 추궁했다고 합니다. 김옥길 총장 역시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그 집 가족들이 다 굶어 죽어가는데 그까짓 쌀 한 가마니 준 게 유신에 반대하는 것이냐”며 맞섰다는 것입니다. 훗날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 김옥길 이대 총장의 일화였습니다.


김희숙 여사는 자신이 다니는 성당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으면 내심 ‘나는 살았다’며 좋아했다고 부끄러워하며 웃으셨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남들은 가족이 죽어 슬플텐데 왜 그 일이 좋았다고 했을까요. 사연이 이랬습니다. 평소에 중정의 감시로 김희숙 여사는 어디를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장례가 있으면 거기에 가는 것은 중정도 막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갓집을 가면 그곳에서 김희숙 여사는 죽은 이의 몸을 씻겨주고, 또 수의도 입혀주는 등 시신을 수습하는 궂은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상가에서 먹을 것과 돈을 조금씩 줬는데 그것을 가져와 아이들을 먹이고 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 자택으로 찾아간 저에게 김희숙 여사가 이런저런 말씀 끝에 전해 주시던 일화를 듣고 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김희숙 여사가 구순을 맞이했으니 당연히 찾아갈 일이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서울 강남 일원동 인근 식당에서 조촐하게 마련된 곳을 도착하니, 잠시 후 김희숙 여사께서 오셨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을 감시하던 중앙정보부가 남긴 ‘비공개 동향기록’을 토대로 얼마 전 제가 쓴 장준하 선생님 40주기 추모 평전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뒤늦게 김희숙 여사님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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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님 40주기 추모평전인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를 드린 후 부인 김희숙 여사님과 저자가 기념 사진을 남겼습니다. 남편 장준하 선생님의 사진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내리는 손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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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이 좋지 못해 북 콘서트에 오실 수 없었던 김희숙 여사는 “참으로 고맙다”며 제일 먼저 책 표지에 실린 남편의 얼굴부터 가만히 손으로 쓸어내립니다. 남편 장준하 선생님을 사랑하시고 그리워하는 그 모습이 또 안타까웠습니다.


잠시 후, 공식적인 구순 축하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다양한 분들의 간략한 축사가 이어지고 이날의 주인공인 김희숙 여사님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었을까요. 이날, 구순의 여생을 살아오신 그분이 남기신 말씀입니다.


구순의 김희숙 여사 “내 소원은 친일 청산과 평화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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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숙 여사가 구순 생신모임에 오신 분들께 낭독하기 위해 직접 자필로 써서 가져오신 감사 인사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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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 생일잔치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즈음 백세시대라 합니다. 저도 천수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명은 천수를 타고났는데, 운명은 순탄치 않았군요.


장준하 선생님과 사별한 지 40년, 그때 제 나이가 49살이었습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박복한 운명을 탄 사람이, 어찌 저 혼자이겠습니까? 무명 잡초처럼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견디며 힘들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생인 듯합니다. 저 역시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삶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장 선생님이 먼저 걸어간 그 길로 나설 준비를 하려 합니다. 이제 저는 고단했던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40년 전 장 선생님이 먼저 걸어간 그 길로 나설 준비를 하려 합니다.


오늘 아침, 내게 남겨진 소원이 무엇인가 헤아려 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소원은 조국의 자주독립이었습니다. 장 선생님의 소원도 자주독립이었고, <등불>이라는 잡지를 통해 희망을 밝히셨습니다. 독립 후(에는) 국토 분단과 비민주적 군사 독재 종식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아내로서 내조를 제대로 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남기신 정신은 아직도 제 가슴 깊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저 역시 제 자식과 후손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의 소원은 올바른 역사 정립과 남북통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족들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특히 친일 청산과 남북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제 자식들이 목숨을 걸고 동참한다 해도, 결코 막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올바른 역사 정립과 민주 확립, 평화통일의 등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습니다. 이 등불이 이 나라를 환하게 비추는 날까지 멈추지 말 것을 부탁드리며, 부끄러운 오랜 삶에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희숙 여사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너무도 뜨거웠습니다. 구순의 노인이 여전히 소원하는 올바른 역사 정립과 조국의 평화통일은 젊은 저에게 부끄러움과 감동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픔은 여전합니다. 남편 장준하 선생님의 사망 원인은 국가 차원의 조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진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히자는 진상규명 특별법은 임시 국회가 끝나가는 오늘까지도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박근혜 권력의 횡포는 그 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공권력은 마구잡이 소환장을 발부하고 있습니다. 온 사회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비판의 자유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런 지경에서 과연 김희숙 여사께서 염원하는 꿈은 언제 실현 가능할까요. 과연 그 끝을 보실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던 이유였습니다.


그렇습니다. 2016년 4월 총선과 다가오는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주의자 장준하 선생님이 염원하시고 김희숙 여사께서 소원하시는 남북통일과 올바른 역사 정립이 이뤄지는 꿈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에서 저 역시 한결같이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두 분께 약속합니다.


그 꿈이 이뤄지는 날까지. 김희숙 여사님, 건강하소서. 반드시 그런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고상만 기자

<2016-01-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목숨 걸고 친일 청산’, 내 자식 안 막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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