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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왜 일본 극우를 그토록 칭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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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3> 유신 쿠데타, 서른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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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과 <국가와 혁명과 나>에 담긴 박정희의 역사관과 정치 이념을 짚어봤다. 두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그때까지 존재했던 정치와 정치인들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유신 체제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 이른바 생산적 정치와 직결되는 대목으로 보인다. 이 부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일제 때 군국주의에 투철했던 일본의 일부 군인들은 일거에 모순을 해결하고 비생산적 정치를 지양해 황도(皇道)를 실현하려 했다. 비생산적인 정치로 지목된 건 의회 민주주의, 정당 정치로 표현되는 민간인 정치다. 그러한 민간인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담고 있는 규정이다. 이들은 군인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지향했고 거기에 제국 관료 같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런 식의 정치를 통해 황도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한 가지를 잠깐 짚고 넘어가면 황도의 도 자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면 참 재미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박정희가 국민 도의를 말하는데, 그 도의가 뭔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살펴보니 그게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더라. 일반인이 생각하는 도의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누군가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했으면 좋겠다.


하여튼 박정희의 두 저서, <우리 민족의 나갈 길>과 <국가와 혁명과 나>를 보면 황도를 실현하겠다는 일본 군국주의나 천황제 파시즘의 주장, 이념과 닿아 있는 측면이 엿보인다. 일본 군인들의 그러한 주장은,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생산적인 정치를 지양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유신 체제 시기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프레시안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식민 사관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시기 박정희의 저서 등에서 식민 사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서중석 : 유신 체제와 식민 사관의 관계를 파악하려면 다시 5.16쿠데타 직후로 돌아가야 한다. 일제 식민 사관은 모두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정체성론은 한국이 쭉 정체된 역사를 가져왔으며 일본의 지배에 의해 비로소 거기서 벗어나 한국 경제가 발전하고 근대화가 가능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타율성론은 한국이 독자적인 역사를 영위하지 못했고 외세의 지배와 영향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주장으로, 그것에 부수해 만선(滿鮮) 사관도 있다. 그러니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 일제 관학자들이 당파성, 나쁜 민족성 같은 것을 강조하지 않았나. 당파성과 나쁜 민족성의 뿌리가 너무나 깊어서 한국인은 식민지 노예근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외국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일찍이 이광수는 3.1운동 직후 상해(상하이)에 가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결국 조선총독부에 귀순해 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속에서 민족 개조론을 편다. 한국인의 민족성이 워낙 열등하고 열악해 치유가 불가능하지만 다만 수양동맹회, 이건 안창호가 얘기한 것을 이광수가 국내에 돌아와 그렇게 구체화한 것인데, 그런 수양동맹회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이광수가 그러하다면, 박정희는 일제 시기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인의 독립 정신, 의지를 말살할 의도로 유포한 식민 사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모습을 두 저서 같은 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두 저서보다 먼저 나온, 그러니까 5.16쿠데타가 난 지 한 달 후인 1961년 6월 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한 <지도자 도>와 1962년 1월 18일 대한민국 공보부에서 발행한 <혁명 과업 완수를 위한 지도자의 길 해설판>을 통해서도 박정희의 생각을 비교적 잘 엿볼 수 있다. 저자 박정희, 발행처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돼 있는 <지도자 도>의 경우 발행 시점이 너무 이른 점이 의아하긴 한데, 하여튼 그렇게 돼 있다. 박정희는 이 글들에서 우리 겨레는 대부분이 강력한 타입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으로 변해 자각 없이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는 사대주의적 습성이 마음속에 깃들면서 자각, 자율, 책임감이 극도로 위축됐고 책임감 없는 자유가 방종과 혼란과 무질서와 파괴를 조장했다며 “모든 사회가 도적의 소굴이 되고 무질서와 혼란이 지배하고 있는 이 나라에 옳은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광범하게 상당한 기간 동안 강력한 강권 발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영웅적 지도자에 의해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 글들에서 시사했다. 민족성에 문제가 있으니 위대한 지도자의 강력한 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는 한국인의 민족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봤고, 외래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올바른 군인 정신을 가진 영웅적 지도자에 의해 생산적인 통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저서에서는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사가 타율성과 당파성으로 점철돼 있어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유신 체제와 같은 1인 통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5.16쿠데타 직후의 논설과 두 저서에서 나타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니까 생산적인 정치를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전후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미국 문화엔 부적응, 미국 요구엔 충실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그러한 정치 이념은 5.16쿠데타 이전 박정희의 경험, 삶의 역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나.


서중석 : 이 두 저서와 유신 체제에서 보이는 박정희의 정치 이념이 5.16쿠데타 이전에는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살펴보자. 또 10.17쿠데타 때 박정희가 특별 선언에서 “유신적 개혁”을 이야기하고, 유신 체제에서도 유신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지 않나. 이때 나오는 유신이라는 것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보다는 쇼와 유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러 연구자가 보고 있는데, 그 쇼와 유신의 군인 정신이 박정희 정치 이념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언론인으로서 큰 활약을 했고 한반도 전문가로 활동하다 얼마 전(2015년 7월) 사망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돈 오버도퍼가 박정희에 대해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얘기한 게 있다. 이 책에서 돈 오버도퍼는 일제 강점기에 받은 일본식 교육이나 유교 문화에 대한 애착을 가진 군인이었다는 배경 같은 것에 비춰볼 때 박정희가 거추장스럽고 비생산적인 관행으로만 비친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할 이유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견 그것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처럼 쿠데타 이후 미국이 원하는 바에 적절히 부응한 군인 정치가는 없었다. 사실 박정희는 미국이 원하던 것을 100퍼센트, 어쩌면 그 이상을 수행했다. 그건 통일 운동을 폈던 사람들, 자주성을 주장했던 사람들, 집단 학살 등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 군사 정권이 ‘혁명 재판’이라고 하는 걸 가지고 어떤 식으로 처단했는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는 과정, 또 베트남 파병을 밀어붙인 과정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한일 국교 정상화도, 베트남 파병도 박정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집권했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기는 하지만, 박정희의 경우 한일 회담에서 특히 강한 반발과 비판에 부딪혔는데도 그런 걸 무릅쓰고 밀어붙이지 않았나. 베트남 파병 역시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됐어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더라도, 박정희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미국의 국가 이익에 그야말로 적절하게 부응한 것이다. 일제 때 군인들 중 다수가 해방 후 친미파로 잘 변신했지만, 그런 친미적 군인들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을 박정희만큼 수행하지는 못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돈 오버도퍼의 글을 보면, 1975년 주한 미군 사령부에서 박정희에 대해 얘기한 게 인용된 대목이 있다.


프레시안 : 주한 미군 쪽에서는 박정희를 어떻게 봤나.


서중석 :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군사 쿠데타를 주동했을 때부터 정치 활동을 즐기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대한민국 국가 원수로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정치적 토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명령이 바로 시행되기를 바라는 군인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렇게 얘기했다. 여기서 말한 “군인의 사고방식”이라는 게 뭐였겠나. 박정희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할 이유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고 돈 오버도퍼가 이야기했다고 하지 않았나.


다시 말해 박정희가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활동을 잘했다는 점과 함께 박정희라는 사람은 사실 미국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 이 두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박정희는 미국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친미파 군인들이 미군 장성과 교제하려고 애썼던 것과 달리, 박정희는 미군 장성과 그렇게 교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박정희는 군 수사 기관원과 미군을 제일 혐오했다’고 이야기할 만큼 박정희는 미군 장성과 공식 접촉하는 것도 가능한 한 억제했고, 골프나 여가 활동을 같이하지도 않았다고 한 언론인은 썼다. 박정희는 1953년 말 미국에 가서 육군 포병 학교에 들어가 반년간 미국에서 지냈는데, 그때도 미군이 주최하는 파티장에 잘 가지 않았다. 미국 유학 시절에 학교 생활이나 미국 문화에 별반 적응하지 못했다고 얘기들을 하는데, 무엇보다도 미국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돈 오버도퍼가 말한 “자신의 명령이 바로 시행되기를 바라는 군인의 사고방식”은 일본 군인이 가졌던 사고방식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가 미국 문화를 싫어한 것에 대해 신용구는 <박정희 정신 분석, 신화는 없다>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미국 혐오감이 큰 것은, 그래서 군대 생활 중 미군과 상당히 마찰하게 된 것은 미국과 첫 인연이 악연으로 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일본이 패망하고, 군인으로서 자존심을 받쳐주던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 자존심을 잃게 만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패망한 것이 박정희로 하여금 미국과 미국 문화에 호감을 갖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난 그것보다도 체질적으로 박정희라는 사람은 미국 문화와는 잘 안 맞지 않았느냐고 생각한다. 또 박정희한테 절대적으로 소중했던 정치 이념과도 미국은 너무나 맞지 않았다. 돈 오버도퍼 책에 나오는 것처럼, 주한 미군 사령부가 박정희에 대해 평했던 것 그대로 “정치적 토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의 명령이 바로 시행되기를 바라는 군인의 사고방식”, 이러한 것이 박정희가 갖고 있었던 군인으로서 성격을 말해주는 건데 이건 미국 문화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박정희의 정치 이념이 미국 문화나 미국식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 점이 작용해 한편으로는 미국 문화 같은 것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5.16쿠데타로 집권했을 때에는 미국이 원하는 것에 가장 잘 부응한, 어떤 친미적인 장교보다도 더 부응을 잘한 것 같은 면을 박정희는 보여줬다. 그게 여기서 내가 강조하려는 것이다.


하여튼 박정희가 미군 장교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미국 문화를 싫어한 건 그 자신의 정치 이념이나 성향으로 볼 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일본 군인이었다가 친미파로 변한 사람들하고도 다른 점이다. 박정희 눈에는 미군 장교들이 자신이 해방 전에 알고 있었던, 투철한 소명 의식을 지니고 올바른 군인 정신에 충만한 군인으로 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 박정희에게 미국 문화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에 오염된, 타파해야 할 문화로 인식됐다.


군국주의 일본 장교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은 박정희

ⓒ오월의봄

프레시안 : 박정희는 미국 쪽과 달리 일본 쪽에는 여러모로 친밀감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그간 많지 않았나.

서중석 :박정희는 일본 문화에 아주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검도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이 있었는데, 화가 나면 일본 군용도를 막 휘둘렀다고도 여러 사람이 이야기한다. 술에 취하면 일본 가요를 자주 불렀다고도 한다. 하여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애착이 컸다.


이병주 글에 의하면,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산에 있을 때 동래 온천장에 있는 대송관이라는 데에서 일본 정종, 그러니까 청주를 마시는 걸 참 즐겼다고 한다. 상냥하고 애교가 넘치는 일본 여자가 주인인 가게였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일본 청주는 선원들이 배에 싣고 오거나 밀수하지 않으면 한국에 들여오기 어려운 술이었다.


박정희에 대한 여러 글에서 박정희가 일본 무사를 연상케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5.16쿠데타를 앞두고 “소원 성취 못하면 쾌도 할복 맹세하고 일거 귀향 못하리라”, 이렇게 자형에게 글을 보냈다고 한다. 이 할복이라는 말도 한국 문화에선 낯선 것이지만 일본 무사 문화에서는 얼마나 많이 나오는 건가. 또 박정희가 갖고 있던 독특한 여성관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박정희의 여성관도 일본 소설에 나오는 일본 무사들의 여성관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본 무사를 연상케 하는 면이 많았다.


더 나아가, 박정희의 멘털리티에 대해 최영 교수는 일본 사무라이가 극찬한 일본 지향적 인물로 일본 육사와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배속 장교로 와 있던 아리카와 게이이치 교련 주임으로부터 박정희가 깊은 감화를 받았고 그를 통해 사무라이 숭배를 배웠다고 설명했다. 아리카와 게이이치 교련 주임은 한국인을 멸시하고 심지어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까지 멸시했는데 박정희를 “보쿠세이키”, “보쿠세이키”, 이건 박정희의 일본 발음인데 특별히 그렇게 부르면서 총애했고 교련 시간에는 앞에 나와 시범을 보이는 조교 역할도 하게 했다고 그런다. 그런데 최영 교수는 ‘아리카와 게이이치의 사무라이 정신은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쇼와 유신의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로 상징되고 있는 굴절·왜곡된 군국주의의 정화로 얘기되는 쇼와 유신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의 소설가로 1970년 11월 도쿄 자위대 본부 옥상에서 군국주의 부활, 평화 헌법 폐기를 부르짖으며 할복자살했다. <편집자>) 최 교수는 책임성이 없는 것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다분히 사이코적인, 다시 말해 정신병적인 광신적 국수 사상의 희생물로 쇼와 유신 시기의 사무라이 정신이 나타난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사무라이 정신이 이것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저서에서 시사했다.


박정희의 국수주의, 반의회주의 정치 이념의 뿌리는 일본 군인 문화, 사무라이 문화에 어느 정도는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가 이런 군인 정신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이준식 박사가 쓴 글에 있다. 이상우 책에서 인용했던데, 5.16쿠데타 직전 박정희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2.26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이전 박정희의 모습을 다룬 글 중 많이 인용되는 것이 앞에서 대송관과 관련해 언급한 이병주의 글이다. 이병주의 눈에 비친 박정희를 찬찬히 되짚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떠했나.


서중석 : 박정희 정치 이념의 뿌리와 관련해 상세한 부분은 소설가 이병주의 글에 잘 나온다. 이병주는 <국제신보> 주필로, <부산일보> 주필이던 황용주와 함께 박정희를 처음 만나게 된다. 황용주는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와 있던 박정희를 황용주가 이병주한테 소개한 것이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만났는데, 이병주는 거기서 나눈 대화를 글로 옮겼다.


이병주의 책에는 박정희가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한테 심취해 있던 부분이 잘 나온다. “그(박정희)는 5.15, 2.26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에게 심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5.15사건은 1932년 일본의 급진적인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변란으로, 이때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을 죽이지 않았나. 그러면서 정당 정치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2.26사건, 이건 1936년에 일어난 2.26쿠데타를 가리킨다. “그는 그들을 본떴음인지 우국지사의 풍모를 애써 꾸미려고 했다. 대개 묵묵했지만 입을 열었다고 하면 나라 걱정이고 민족 걱정이었다. 그는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국애족을 호흡하고 있었다.” 앞에서 난 비분강개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병주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다.


박정희는 황용주와 논쟁을 벌이는데, 황용주가 직업 군인을 비판하자 박정희는 자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기 도의적으로 말짱한 사람 있어. 걱정하지 마.” 어깨를 펴며 결연하게 이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박정희는 자신의 정치 이념이라고 할까 신념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앞에서 누차 강조하지 않았나. 소견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내가 뭔가 잘못하는 게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특징이었다. 그래도 이때는 황용주가 그런 소리를 하는 박정희에게 민주주의의 ABC를 가르치려고 했다. 여기서 이병주의 글 일부를 그대로 인용할 필요가 있겠다(<> 부분). 원문에는 H라고 나오는데 그건 누가 봐도 황용주다.


<박 장군은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집어치워.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시자”며 술잔을 들었다. 한 번은 박 장군과 H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박 장군이 또 일본의 5.15, 2.26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장교들을 들먹이며 찬사를 늘어놓자 H가 “너 무슨 소리를 하노? 놈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따라서 일본 중심주의자들이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알고 하는 소리인가?” 하고 반박하자 박 장군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얘기했다.>


“또”라고 한 건 5.15사건, 2.26사건을 일으킨 일본 장교들에 대한 얘기를 박정희가 그전에도 한 적이 있다는 뜻이다. “너 무슨 소리를 하노? 놈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따라서 일본 중심주의자들이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황용주가 그래서 “자기 나라만 제일이라는 그런 고루한 생각을 갖는 건 세계 평화에 해독이 되고 결국 나라까지 망친다”고 이론을 펴니까 박정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며 열띠게 말을 계속했다고 그런다. “아까 너,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했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그러자 황용주는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국수주의를 반대한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오해하지 마”라고 반박했다. 박정희는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 국민의 저변에 흐르고 있어. 그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너나 오해하지 마.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이렇게 얘기했다.


이게 핵심이다. 이병주의 글이 핵심을 아주 잘 찔렀다고 볼 수 있다. “견식의 깊이와 넓이로 보아 박 장군은 H의 토론 상대가 아니다. 대학생과 초등학교 학생 간의 토론을 방불케 하는 국면마저 있었다. 그런데도 박 장군은 한 번 입 밖에 냈다고 하면 자기의 말을 끝까지 고집한다.” 이병주는 이렇게 썼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만주군 시절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프레시안 : 박정희 눈에는 미군 장교들이 올바른 군인 정신에 충만한 군인으로 비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올바른 군인 정신에 충만한 군인으로 박정희가 봤을 사람으로 누구를 꼽을 수 있나.


서중석 : 이용문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박정희가 1950년대 초 이용문과 함께 쿠데타를 하려고 했다는 건 여러 군데에서 인용되고 있다. 이용문은 박정희의 유일한 존경 대상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다. 이렇게 박정희가 대단히 존경했다고 하는 이용문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나이는 박정희보다 불과 한 살 위이지만 일본 육사로 따지면 7기 위다. 이용문은 일본 육사 50기였는데, 기병 장교로 도쿄 주둔 근위 부대인 제1기병연대에 배속됐다고 한다. 조갑제가 쓴 책에 따르면 이 무렵 이용문은 빨간 바지를 입고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준마를 탔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어쩌면 일본 군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자리에 있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1942년부터는 대본영으로 불린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1년 남짓 있었다. 이 역시 선망의 대상이 될 만한 대단한 자리였다. 대본영에 근무하기 전해에 큰아들 이건개가 태어나는데, 아들 이름의 한자, 그중에서도 특히 개(介) 자는 일본 사람이 이름에 많이 쓰고 한국에서는 잘 안 쓴다는 점을 근거로 아들 이름을 일본식으로 지은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건 그러다가 남방 전선, 그러니까 동남아 쪽으로 가게 된다. 해방 후에는 1949년 대령으로 육본 정보국장을 지내고 나중에는 장성이 되는데, 1953년 비행기 사고로 죽는다.


이용문은 박정희의 마음을 즉각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렇게 박정희의 마음을 사로잡고, 박정희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여러 글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에 관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외모, 성격 등 여러 면에서 이용문은 박정희와 아주 달랐던 사람이다. 시인이자 국방부 기관지이던 <승리일보> 편집장을 지낸 구상이 쓴 글을 보면, 영웅적인 풍모가 깃든 이용문의 기세에 내성적인 박정희가 압도당한 느낌마저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 면이 박정희한테 영향을 주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런 점도 작용했겠지만, 박정희 눈에는 이용문이야말로 자신이 생각한 올바른 군인 정신에 충만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전전(戰前) 군인의 정화라고 할까 상징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용문은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 출신 아닌가. 박정희의 정치 이념을 키워주고 미래를 갖게 한 건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 있던 시기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시절,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 있던 시기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향수로 끝나지 않았다. 그건 해방 후에도 살아 있는 힘이 됐다. 이런 이력은 박정희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다.


프레시안 :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1948년 여순사건이 난 후 진행된 숙군 과정에서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의 핵심 인물로 체포되지 않나. 그때 죽음의 위기에 놓인 박정희를 살려준 것이 바로 만주 인맥이라고 불리는 인맥이었다. 프락치들을 잡아들인 숙군 수사의 핵심 인물인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과 그 밑에 있었던 김안일, 김창룡 같은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해 연대 보증을 서줬다. 김안일은 박정희와 육사 동기이고, 백선엽은 정일권과 함께 한국군에서 만주 인맥을 대표하는 사람 아니었나. 그리고 백선엽과 정일권은 채병덕 총참모장한테 사형 집행 면제를 공식 건의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한테 각각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박정희의 면죄, 즉 죄를 면해달라고 호소했다고 그런다. 그와 함께 백선엽은 총참모장 고문관인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와 윌리엄 로버츠 준장에게 박정희 구명 활동을 했다.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는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고, 윌리엄 로버츠 준장은 주한 미군이 철수한 후 군사고문단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다.


백선엽, 정일권, 김창룡 같은 이들 말고도 만주군 의무 장교(중좌)였던 원용덕, 만주군 대위였던 김일환, 간도특설대에 있었던 김백일 같은 사람들도 다 박정희 구명에 나섰다. 그렇게 된 데에는 박정희가 이재복, 이중업 조직책으로 이어지는 한국 군부의 거의 모든 적색 조직을 샅샅이 폭로해 숙군 작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 기본적으로 작용했을 거라고 본다. 제임스 하우스만 같은 사람도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았나. 그런 점이 있었지만, 역시 만주 인맥이 감싸준 것이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게 있다.


프레시안 :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헌병 총사령관을 지낸 원용덕에 대해 박정희가 특별하게, 백선엽이나 정일권에 대해서보다도 더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왜 그런 건지에 관한 자료가 뚜렷하게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는 큰딸 주례를 원용덕에게 부탁했다고 그런다. 여기서 말하는 큰딸은 박근혜 대통령이 아니라, 박정희와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가리킨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원용덕한테 세배를 갔다는 자료가 나온다.


무엇보다도 김성주(1952년 대선 당시 조봉암 선거 사무차장, 이승만 집권기에 헌병 총사령부에 끌려갔다가 고문으로 사망) 사건 처리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4월혁명 후 김성주 사건이 크게 문제가 되면서 원용덕은 헌병 총사령부 장교들과 함께 재판을 받는다. 그런데 중형이 선고된 원용덕이 박정희 정권 때 특별 사면으로 풀려난 것으로 돼 있다. 이 사건 처리 과정을 보면 박정희가 이렇게까지 원용덕에게 깊은 호감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4월혁명 이후인 1960년 8월 3일 원용덕 중장은 김성주 고문 살해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혐의로 수감된다. 한 달 후인 9월 19일 첫 번째 공판이 열리는데, 선고는 그로부터 1년 후 이뤄진다. 5.16쿠데타 이후인 1961년 9월 30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이 사건과 관련해 원용덕과 김진호에게 각각 징역 15년, 목영철에게 징역 10년 및 세 사람 모두 전 급료 몰수 파면을 선고했다. 그러나 원용덕의 수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2년 5월 23일 군사 정권은 3월 1일 자로 원용덕 중장을 파면했다고 발표하는데,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원용덕은 이미 병보석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1963년 6월 18일 자 <경향신문>은 원용덕이 한국전쟁 당시 반공 포로 석방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후 1963년 대선에서 사상 논쟁이 벌어지자 원용덕은 박정희를 두둔했다. 덧붙이면, 박정희가 소위로 춘천 8연대에서 근무할 때 8연대장이 원용덕이었다. <편집자>)


그런데 이상우의 글을 보면, 백선엽이 장교가 되는 과정에서 원용덕이 은인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걸 감안하면, 원용덕이 백선엽한테 강하게 얘기했기 때문에 백선엽이 박정희를 살리기 위한 활동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그에 관한 자료가 더 안 나와서 이게 맞는지는 얘기를 못하겠다. 하여튼 내가 이야기하려는 건 군대 내의 만주 인맥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박정희를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시절,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 있던 시기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이 말이다.


▲ 1977년 9월 29일 청와대에서 악수하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에 있던 만주 인맥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연합뉴스

침략에 앞장선 일본의 만주 인맥과 박정희의 깊은 관계


프레시안 : 만주로 떠난 후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 박정희가 한 경험은 5.16쿠데타 이후 한일 관계와도 이어져 있지 않나.


서중석 : 집권 18년 동안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등 일본에 있던 만주 인맥과 대단히 깊은 관계를 맺었다. 이 점에서도 만주군 장교나 만주군관학교 시절에 대한 향수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을 지지·지원한 만주 인맥의 핵심이던 기시 노부스케라든가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 여러 사람은 일본에서 대륙 침략의 우두머리급 인사였다. 더욱이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이었다. 그러한 일본의 만주 인맥은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박정희의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 아니냐”, “한일 관계에 새날이 찾아왔다”며 기뻐했다고 하지 않나. 만주 인맥에 속한 인사들은 패전 후 뿔뿔이 흩어졌다가 기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을 중심으로 국제선린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처음 만난 주요 인물들이 바로 이들 만주 인맥이었다.


1961년 11월 존 F. 케네디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렀을 때 박정희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 수상과 함께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만주 인맥을 만났고 특히 만주군관학교 교장이던 나구모 신이치로를 특별히 초청해서 나오게 했다. 나구모 신이치로가 만찬에 참석한 것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박 장군이 특별히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다. 이때 기시 노부스케와 그런 식으로 만난 것도 난 석연치 않지만, 나구모 신이치로를 특별 초청한 것에 대해서도 그게 과연 적절한 행동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나구모 신이치로는 천황제 파시즘, 군국주의 파시즘의 화신이라고 이야기되는 관동군 사령부에서 사관학교에 파견한 사람 아닌가. 그만큼 철저한 천황제 파시즘, 군국주의 파시즘 신봉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국내에 있던 한국인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사람은 만나고 싶더라도 좀 참았다가 나중에 만나는 게 좋지 않았겠나. 그런데 이렇게 특별 초청해 만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 기시 노부스케 같은 사람들에게는 한일 관계가 잘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그랬지만, 그와 함께 만주군 시대에 가졌던 특별한 향수가 작용해 기시 노부스케건 나구모 신이치로건 그들을 그런 식으로 만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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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1-10>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는 왜 일본 극우를 그토록 칭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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